<colbgcolor=#051440><colcolor=#fff> 프랑스 공화국 상원의장 알랭 에밀 루이 마리 포에르 Alain Émile Louis Marie Poher | |||
출생 | 1909년 4월 17일 | ||
프랑스 압롱쉬르센 | |||
사망 | 1996년 12월 9일 (향년 87세) | ||
프랑스 파리 | |||
재임기간 | 상원의장 | ||
1968년 10월 3일 ~ 1992년 10월 1일 | |||
대통령 권한대행 | |||
1969년 4월 28일 ~ 1969년 6월 20일 1차 | |||
1974년 4월 2일 ~ 1974년 5월 27일 2차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51440><colcolor=#fff> 가족 | 앙리에타 튀글레르 슬하 자녀 2명 | |
학력 | 파리 국립광업학교 (토목공학) 파리 정치대학 | ||
종교 | |||
소속 정당 | 대중공화운동 (1946~1966)[[민주중도(프랑스)| 민주중도 ]](1966~1976) | ||
경력 | 상원의원 (1946~1948 ,1952~1959, 1959~1995) 유럽의회 의장 (1966~196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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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정치인. 프랑스에서는 대통령 권한대행을 2번 맡은 인물로 유명하다. 자세한 사정은 후술.2. 생애
알랭 포에르는 1909년 4월 17일 프랑스 파리 근교의 발드마른주 압롱 쉬르 센에서 태어났으며, 리세 루이르그랑과 리세 생루이를 졸업하고 법학을 전공하였다.이후 알랭 포에르는 1938년 프랑스 재정경제산업부의 하급간부로 관료 경력을 시작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에는 레지스탕스와 접촉하였으며 프랑스 해방 이후에도 재정경제산업부의 관료로 남았다. 해방기인 1946년에는 자신의 고향인 압롱쉬르센의 시장을 역임하였으며 재정경제산업부의 장관인 로베르 슈만[1]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같은 해에 프랑스 상원에 입성하였다.
1948년부터 1952년까지는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지 않았지만 1952년에 다시 프랑스 상원에 입성하여 1995년까지 상원의원을 지냈으며, 1968년부터 1992년까지 상원 의장을 지냈다. 1966년부터 1969년까지는 유럽의회의 의장을 맡았다.
3. 2번의 대통령 권한대행
프랑스 상원의장의 의전서열은 프랑스 대통령과 프랑스 총리에 이어서 3위로, 프랑스 국민의회의 수반인 의장보다 높다. 또한 프랑스 대통령의 궐위시에는 프랑스 대통령의 권한대행을 맡는데, 알랭 포에르는 당시 프랑스 상원의 의장으로서 권한대행을 2번 맡았다.첫 번째 권한대행은 1969년이었다. 당시 샤를 드골은 자신의 재신임 여부와 결부하여 지방 분권화와 상원 개혁안을 국민투표에 부쳤는데, 개헌안이 53%의 반대로 부결되자 샤를 드골은 국민투표의 결과를 받아들이고 다음 날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알랭 포에르는 샤를 드골의 사임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었고 동시에 같은 해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조기 대선에서 알랭 포에르는 조르주 퐁피두와 결선 투표까지 가는 경쟁을 벌였으나 결국 결선 투표에서 낙선하였고 6월 20일 조르주 퐁피두가 취임할 때까지만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두 번째 권한대행은 1974년이었다. 이때는 대선에서 자신과 경쟁을 했던 조르주 퐁피두가 임기 도중인 1974년 4월 2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다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다만 이때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고,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이 5월 27일 취임할 때까지 맡았다.
알랭 포에르는 이후 1995년에 상원을 떠났고 1996년 12월 9일 사망하였다.
[1] 1950년 장 모네와 함께 모네-슈만 플랜을 입안하여 1951년 유럽연합의 전신인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를 창설하였으며 오늘날에는 유럽연합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