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23:17:09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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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파일:Flag_of_the_European_Coal_and_Steel_Community_12_Star_Version.svg[1]
<colbgcolor=#0786D5><colcolor=#fff> 창설 당시 지도[2]
파일:European_Coal_and_Steel_Community_Map_1952.svg
1952-2002
수도 없음[3]
회원국 12개국
공용어 11개[4]
정부 형태 국제 기구
역사 파리 조약 (1951년 4월 18일)
정식 출범 (1952년 7월 23일)
브뤼셀 조약 1967년 7월 1일
파리 조약 만기 및 유럽 공동체로 이관 (2002년 7월 23일)
* * * * * *
설립 이전 루르 국제 통치령
통합 이후 유럽 공동체

1. 개요2. 역사

[clearfix]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기관 하에 공업 생산량을 조절하기 위해 세워진 국제기구이다. 1951년, 프랑스, 이탈리아, 서독,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6개 국가가 파리 조약을 조인하며 1952년 7월 23일에 정식으로 창설되었다. 처음으로 국가를 초국가주의(Supranationalism)을 기반으로 한, 국가연합을 목표로 하는 국제기구였으며 이는 추후 유럽 경제 공동체 등을 비롯한 로마 조약 이후 범유럽주의 기관들의 기반이 되며 추후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의 후신인 유럽 공동체는 비로소 유럽연합이 된다.

2. 역사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쉬망[5]에 의해 1950년 5월 9일,[6] '쉬망 선언'으로 처음으로 입안된, 프랑스와 독일간의 전쟁을 막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의 논지는 두 국가간의 경제가 충분히 연담화가 된다면 두 국가간 전쟁은 상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불가능한 것이 된다는 것. 또한, 유럽 국가들을 위한 석탄과 철강의 공동시장이 생긴다면 국가들간의 경쟁도 줄어들고 분쟁도 더 쉽고 평화적이게 해결이 가능하며 경제 개발에도 이바지할 것이었다. 특히 이 당시 루르 국제 통치령의 철강 및 석탄 자원과 관련해서 경쟁이 어느정도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는데 이 기관의 설립을 통해서 이 또한 해결이 가능할 것이었다.

1950년의 쉬망 선언에서 쉬망은 ECSC의 목표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하나된 유럽을 향한 첫 발판이 될 것.
  • 회원국들간의 전쟁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
  • 세계 평화에 이바지할 것
  • 유럽을 한발짝식 (분야별로 각각 초국가적 기관들을 설립해나가며) 민주적으로 유럽을 통일해 나갈 것. (이는 철의 장막 건너편도 해당)
  • 세계 최초의 초국가적 기관을 세울 것
  • 세계 최초의 국제적 반독점 기구가 될 것
  • 공동체 전체에서 단일 시장을 만들어 나갈 것
  • 석탄과 철강 시장으로 시작해서 다른 공동체들을 통해 유럽 전체의 경제적 부흥에 이바지할 것
  • 세계 경제와 개발 도상국들의 발전을 지원할 것

쉬망은 이후 서독프랑스를 아우르며 정치적 커넥션을 만들어 그의 구상 속 유럽 연합을 현실화 하기 위해 힘썼다. 하지만 그만큼 어려움도 매우 많았다. 서독의 독일 사민당쿠르트 슈마허는 (슈마허의 프랑스에 대한 불신은 차차하고) 쉬망의 유럽 연합의 구상은 독일 사민당의 주요 의제였던 독일 통일을 어렵게 할 것이고 독일 사민당이 원했던 독일의 석탄-철강 산업 국영화를 불가능하게 해 유럽의 경제를 결국에는 독점 카르텔에 의해 돌아가게 할 것이라 믿었다. 프랑스에서 슈마허의 유럽 연합의 구상은 비-공산계열 정치인들의 환영을 받았는데, 특히 그와 유럽 연합에 대한 구상을 공유한 사람은 샤를 드 골이었다. 드 골은 1945년부터 프랑스 주도 하의 유럽 연합을 구상하며 독일의 루르자르의 자원을 통해 프랑스의 발전, 그리고 독일의 견제를 꿈꿨다. 하지만 드 골은 쉬망의 ECSC는 유럽의 통일을 위해서는 매우 부족하고 주먹구구식인 구상으로 보았던 반면 쉬망은 드골의 프랑스 주도 하 유럽연합에 대해 프랑스는 유럽 연합을 주도할 능력이 부족하다 믿었기에 둘의 죽이 매우 잘 맞았다 보기는 어려웠던 듯.

또한 영국의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는 영국의 석탄 산업을 이리 비민주주의적이고 믿을 수 없는 기관에 넘길 수 없다며 ECSC 가입에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래도 유럽 연합에 대한 구상을 프랑스와 서독 모두에서 영향을 끼치고 어느정도 지지를 받으며 나아가 1951년 파리 조약으로 이어져 1952년 수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리하여 ECSC의 석탄 공동시장은 1953년 2월 10일, 철강 공동시장은 1953년 5월 1일 출범하게 되고 루르 국제 통치령은 해산된다.

6년 뒤 ECSC의 초대 맴버들은 로마에 모여 ECSC를 모델로 한 다른 범유럽 국제기구들 (유럽 경제공동체, 유럽 원자력 협회) 등의 설립에 대한 로마 조약을 조인, 유럽 연합에 한발짝 더 나아가게 된다.

ECSC가 세워진 이후 다른 범유럽 국제기구들이 속속 들어서며 2002년, 50년 전에 조인된 파리 조약의 기간이 만기되자 다른 유럽 기관들과 함께 유럽 공동체를 출범, 유럽연합의 포석을 깐 ECSC는 막을 내리게 된다.


[1] 2002년 해체 당시 기. 기의 별은 각각 공동체의 회원국을 상징한다. 창설 이후 회원국이 계속해서 늘었기에 깃발도 계속 바뀌었던 것. 창설 당시에는 회원국이 6국 뿐이라 아래 기를 사용했다. 파일:ecsc1958.png[2] 알제리는 프랑스 본토의 일부로 취급되어 포함되었다.[3] 본부는 룩셈부르크에 위치.[4] 덴마크어, 네덜란드어, 영어, 핀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스웨덴어[5]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프랑스의 독일계 지역 알자스 출신이다. 장 모네와 함께 유럽연합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6] 이 날은 1985년, 유럽의 날로 지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