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9 00:09:16

알리 알 합시

오만의 前 축구 선수
파일:Ali-Al-Habsi.jpg
이름 알리 알 합시
Ali Al-Habsi
본명 알리 압둘라 하립 알 합시[1]
Ali Abdullah Harib Al-Habsi
출생 1981년 12월 30일 ([age(1981-12-30)]세)
오만 무스카트
국적
[[오만|]][[틀:국기|]][[틀:국기|]]
신체 194cm / 체중 79kg
직업 소방관축구 선수 (골키퍼 / 은퇴)
소속 선수 알미다이비 (1998~2002)
알 나스르 SC (2002~2003)
FK 륀 (2003~2005)
볼턴 원더러스 FC (2006~2011)
위건 애슬레틱 FC (2010~2011 / 임대)
위건 애슬레틱 FC (2011~2015)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2014 / 임대)
레딩 FC (2015~2017)
알 힐랄 FC (2017~2019)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2019~2020)
국가대표 128경기 (오만 / 2003~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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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기록
4.1. 대회 기록4.2. 개인 수상
5. 여담6.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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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만의 전 축구 선수. 아시아 출신으로는 최초의 프리미어 리그 골키퍼.[2]

오만 쇼크의 주역으로 대한민국 팬들에게도 유명하며, 특히 EPL에서 오랜기간 활동해 해외 축구 팬들에게 낯이 익은 인물 중 한 명이다. 중동 지역 축구선수로써는 가장 유명하고, 오랜 기간 유럽 빅리그에서 활약한 선구자격 인물이다.

2. 선수 경력

프로 데뷔 전에는 오만의 무스카트 국제공항에서 소방관으로 일했다고 한다.

자국의 프로팀인 알미다이비, 알나스르에서 뛰다 2004 아시안컵 본선 예선전에서의 활약을[3] 눈여겨 본 유럽 스카우트에 의해 노르웨이 리그 엘리테세리엔의 명문팀 FC 린 오슬로로 진출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그냥 운좋게 유럽에 진출한 것처럼 보였고 후보 골키퍼에 머물것으로 예상이 됐지만 주전으로 활약을 하며 노르웨이 리그 최우수 골키퍼에 선정이 된다. 참고로 이 후 오만 쇼크 설욕전에서 5-0으로 한국이 이기긴 했지만, 당시 그가 아닌 다른 골키퍼가 나왔다. 2009년 비공식 평가전에서도 기성용의 페널티킥을 막아내며 0-0 무승부를 이끌었다.

노르웨이 리그에서의 활약을 눈여겨 본 볼턴 원더러스 FC가 2006년에 영입을 했다. 그러나 유시 야스켈라이넨에게 주전에서 밀리며 어떤 시즌에는 리그는 커녕 컵대회까지 단 한 경기도 못뛰기도 했다.[4] 다만 2007-08 시즌 올리버 칸이 나선 FC 바이에른 뮌헨과의 UEFA 컵 원정경기에서 2-2로 비기는데 일조를 하며 사실상 올리버 칸에 판정승을 거두기도 했다.[5] 시즌 막바지에는 주전 야스켈라이넨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어 주전으로 나와 팀의 프리미어리그 잔류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2008-09, 2009-10 시즌 야스켈라이넨에게 주전에서 밀리자 2010-11 시즌에는 위건 애슬레틱 FC으로 임대를 갔다. 사실 그곳에서도 벤치신세를 질 것이라는 전망이 대부분이었다. 위건에는 리버풀 FC에서 한때 주전으로 뛰었고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경험도 있는 크리스 커클랜드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골키퍼 리처드 킹슨과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골키퍼 블라디미르 스토이코비치도 결국 커클랜드를 넘지 못하고 팀을 떠날 정도였다.

그러나 반전이 시작되었다. 시즌 초반 당연히 크리스 커클랜드가 주전으로 나섰으나 블랙풀에 4-0, 첼시에게 6-0으로 지는 등 막장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커클랜드가 부상으로 빠지게 되고 상대는 지난 시즌 9-1로 위건을 패배시켰던 토트넘 홋스퍼 FC. 그것도 원정경기였다. 알리 알 합시는 이 경기에서 선발출장을 했고 팀은 1-0으로 이겼다. 그야말로 팀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며 커클랜드의 부상 회복 후에도 그는 주전자리를 빼앗기지 않았다. 결국 커클랜드는 2부리그격인 챔피언쉽의 레스터 시티로 임대를 갔다. 그리고 11-12 시즌 위건으로 완전 이적했다.

11-12 시즌 2경기에서 1실점을 당했다. 상대들이 모두 승격팀(노위치, 스완지 시티)이라서 다소 아쉬움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팀은 2무를 기록 중. 12월 22일 열린 리버풀 전에서는 야신모드가 발동. 수 차례 선방은 물론 찰리 아담의 PK 까지 막아내며 0:0 무승부를 이끌어내 골닷컴 선정 MOM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또한 이러한 활약으로 2011년 위건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하지만 이후로 많은 실점을 기록하며 강등권으로 추락했는데 그가 부진하기 보단 수비에서 난조를 보이는 팀내 문제점이 컸다. 그래도 그 와중에도 여러 경기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는데 33차전 맨유와의 안방경기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며 프리미어 리그 개편 이후 팀의 첫 맨유전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으며 결국 팀의 강등권 탈출에 기여하며 다음 시즌도 주전으로서 위건에 계속 남게 되었다.

2012-13 시즌에 팀이 강등권 가까이 빠지는 위기에 놓이면서 중요한 경기가 된 레딩 FC과 안방경기에서 실수로 자책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다행히 위건의 고메스가 헤트트릭을 기록하며 3:2로 역전승을 거뒀기에 이 실수는 넘어가긴 했다. 하지만 12-13 시즌에는 팀이 2부리그로 강등당하면서 빛이 바랬다.

하지만 이 시즌 위건이 FA컵에서 맨체스터 시티를 1-0으로 제압하고 우승하면서 알 합시 또한 생애 첫 잉글랜드 무대에서 메이저 트로피를 들게 되었다.

2014년 10월 31일 브라이턴 앤 호브 앨비언으로 1개월 단기 임대되었으나 1경기 출장에 그쳤다. 이후 소속팀으로 복귀하였다.

파일:external/i3.getreading.co.uk/al3.jpg

14-15 시즌 종료 이후 3부리그로 강등된 위건 애슬레틱 FC을 떠난 알 합시는 이후 잉글랜드 2부리그에 속해있는 레딩 FC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은 뒤 2년 계약을 맺고 입단했다.

레딩 FC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쳤는데, 비록 팀은 승격하진 못했지만 2시즌간 총 91경기에 나섰고, 2시즌 모두 팀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면서 엄청난 활약을 선보였다.

이후엔 레스터 시티 이적설이 불거지기도 했지만, 최종 선택은 알 힐랄이었다. 알 힐랄과 3년 계약을 맺으며 오랜만에 아시아 무대로 복귀했다.

2019년 알 합시는 웨스트 브롬으로 이적하며 오랜만에 잉글랜드에 돌아왔다. 비록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지만 팀의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지켜봤고, 시즌이 끝난 뒤 팀을 떠났다.

2020년 8월 22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3. 플레이 스타일

큰 키를 가져서 골키퍼로의 신체조건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반사신경도 뛰어나다는게 장점이다.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 위건 애슬레틱 올해의 선수: 2010-11
  • 레딩 올해의 선수: 2015-16, 2016-17

5. 여담

오만에서는 IMF 시절 대한민국에서 박찬호MLB 선발 등판경기를 중계한 것처럼 알리 알 합시 선발출장 경기를 방송하는 등 국민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다만 오만의 전력이 아시아 상위권도 아닌 중위권인 탓에 월드컵 예선에서 번번히 고배를 마셨다. 대신 2004, 2007, 2015 세 번의 아시안컵에 출전했다. 2015년 대회에서는 대한민국과 같은 조에 편성되어 선발출장했으나 한 골을 내주며 팀의 0-1 패배를 지켜봐야했다.

볼턴 시절 이청용에게 차를 태워주기도 하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6. 같이보기


[1] علي عبد الله حارب الحبسي[2] 이전에 일본카와구치 요시카츠가 2001년부터 2003년까지 포츠머스 FC에서 12경기를 뛴 바 있지만, 그 당시의 포츠머스는 2부 챔피언쉽 리그에 소속되어 있던 상태였다.[3] 2003년에 열린 2004 아시안컵 2차 예선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의 무수한 슛을 막아내며 한국 대표팀에 일명 오만 쇼크를 안겨준 주역이기도 하다.[4] 특히 잉글랜드 대표팀 후보 골키퍼로 유로 96과 유로 2004에 출전한 이안 워커까지 있어서 끼어들 틈이 없었다.[5] 당시 볼턴은 강등위기에 있던 상황이어서 이 날 결과는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