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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스터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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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인물

1. 개요

미국과 영국에 걸쳐 존재하는 명문가.

이 가문은 18세기 후반 미국 최초의 백만장자라 불리는 존 제이콥 애스터에 의해 독일에서 영국으로, 다시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오며 여러가지 사업을 개척하고 번성하면서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뉴욕의 안주인으로 취급될 만큼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특히 뉴욕 사교계에서 독보적인 지위에 군림했는데, 19세기 후반쯤 가면 강도 귀족들이 미국 사교계까지 좀먹기 시작하여 20세기초에는 거의 좌지우지하게 되었으나, 이때에도 애스터 가문만큼은 드물게 아메리칸 드림에 성공한 배경으로 성립된 진짜배기 명문가의 하나로서 인정받아 재력 면에서 한참 앞서는 강도 귀족 자본가들조차 한 수 접고 들어갈 정도였다. 게다가 영국에서 진짜 귀족 가문[1]이 되었다.

이들이 유산으로 남긴 이름은 지금도 미국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세워진 그 자리가 아스터 가문이 살던 공간이다. 하지만 19세기 말 집안싸움, 즉 사촌 간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한쪽 일파가 영국으로 떠났고[2], 미국에 남은 가계는 수장이 타이타닉호 침몰사고에 휘말려 사망했다. 전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빈센트 애스터는 후계를 남기지 못해 대가 끊겼지만 수장 사후 4개월 뒤에 태어난 막내 아들이자 유복자 존 제이콥 애스터 6세를 통해 후손이 이어지고 있다.[3] 영국으로 간 가계는 정계에 진출하고 애스터 자작(1917)과 애스터오브히버 남작(1956)[4] 작위를 세습하는 가문이 되는 등 계속 번영하여 현재에도 명문가의 하나로 남아있다.

2. 인물

  • 존 제이콥 애스터(John Jacob Astor)
  • 존 제이콥 애스터 4세(John Jacob Astor IV) : 1864년 7월 13일 ~ 1912년 4월 15일. 타이타닉호에 어린 둘째 아내랑 탑승했다가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로 아내는 살았지만 본인은 죽었다. 영화판에서도 나왔다. 윌리엄 월도프 애스터와는 사촌관계다.
  • 윌리엄 월도프 애스터(William Waldorf Astor, 1st Viscount Astor) : 1848년 3월 31일 ~ 1919년 10월 18일. 백만장자다. 처음에는 사업이 아닌 법학을 공부하여 미국 뉴욕 주에서 공화당 소속으로 정계에 진출하는데 성공했으나 인신공격을 당하면서 재선에 실패하고 대신 1882년 주이탈리아 공사로 뽑혀 유럽에서 예술 방면의 심미안에 눈을 뜨게 된다. 이후 부친으로부터 유산을 분할상속받으면서 엄청난 재산을 갖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에게 잠재되어 있던 사업적 재능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사촌간에 깊어진 갈등 끝에 영국으로 이민갔지만[5] 거기서 오히려 여러 가지 사업을 성공시켜 더욱 출세한다. 1906년에 피의 다이아몬드가 손에 들어와, 그의 아내에 의해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그리하여 영국 정계까지 진출한 후 제1차 세계 대전 기간의 자선활동을 이유로 남작(1916년)과 자작(1917년) 작위를 수여받음으로써 세습귀족이 되었다. 존 제이콥 애스터 4세와는 사촌관계다.
  • 월도프 애스터(Waldorf Astor, 2nd Viscount Astor) : 1879년 5월 19일 ~ 1952년 5월 2일. 낸시 애스터의 남편이다. 아내와 생일이 같고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태어났다.
  • 낸시 애스터(Nancy Astor, Viscountess Astor) : 1879년 5월 19일 ~ 1964년 9월 30일. 영국의 실질적으로[6] 최초의 여성 의원으로 미국 출신이다. 남편인 월도프 애스터 서민원(하원) 의원이 1919년 자작 지위를 상속받음으로서 2대 에스터 자작이 되는 바람에 서민원 의원직에서 물러나 영국 귀족원으로 옮겨갔을 때, 남편이 권유해서 출마해서 서민원 의원에 당선되었고 자그마치 26년간 서민원 의원으로 활동한 사람이다. 1923년 술 허용 연령대를 18세 이상으로 올리고, 1928년 공무원 남녀 동등권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 많은 족적을 남겼다.[7] 그녀의 생애가 TV 시리즈화 되기도 했다.
한편 그녀는 반공주의자였으며 나치 동조자이자 반유대주의자였다. 게다가 인종차별주의적인 신념까지 가지고 있었다. 평소에도 공공연히 아돌프 히틀러의 정책에 대해 바람직한 것이라며 칭송했고,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정치인에게 욕설을 퍼붓는 짓을 벌인 적도 있다. 영국이 나치 독일과 적으로 맞붙게 된 2차 세계 대전에서도 이런 태도는 변하지 않았고[8], 전후에도 인종차별 및 제국주의 망언을 일삼아 말년에는 가족들에게마저 절교당했다. 심지어 낸시의 아들 존 에스터는 어머니가 혐오하던 천주교 신자와 결혼하기까지 했다.
한가지 일화도 있는데 낸시는 의회에 출석한 윈스턴 처칠에게 "Sir, if you were my husband, I would poison your drink." (내가 당신 부인이었다면, 당신의 찻잔에다 독을 탔을 거에요.)라고 독설을 내뱉었고, 처칠도 지지않고 "Madam, if you were my wife, I would drink it." (애스터 부인, 당신이 내 부인이었다면, 난 당신 남편으로 사느니 차라리 그 (독이 든) 찻잔을 마셨을 거요.)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파일:Nancy Astor_Viscountess Astor.jpg 파일:Nancy Astor and Waldorf Astor.jpg 파일:Nancy_Astor_Viscountess_Astor.jpg
젊은 시절 1935년의 남편과 함께 1949년
  • 존 제이콥 애스터(John Jacob Astor, 1st Baron Astor of Hever) : 1886년 5월 20일 ~ 1971년 7월 19일. 영국의 신문 경영자. 작위 이름을 따 애스터 오브 히버(Astor of Hever)라고도 한다. 초대 에스터 자작의 3남으로 태어나 1908 런던 올림픽 라켓(다이빙) 남자 복식 금메달리스트였다. 1922년 비스카운트 노스클리프에게서 타임스를 인수하였다. 1956년 애스터 오브 히버 남작작위를 받았다.
  • 윌리엄 월도프 애스터 3세(William Waldorf Astor III, 4th Viscount Astor) : 1951년 12월 27일 ~. 현 애스터 자작가의 수장. 존 메이저 내각에서 디지털·문화·미디어·스포츠부 정무차관을 지냈다.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 부인 서맨사의 계부이기도 하다.
  • 존 제이콥 애스터 8세(John Jacob "Johnny" Astor VIII, 3rd Baron Astor of Hever) : 1946년 6월 16일 ~. 현 애스터 오브 히버 남작가의 수장. 데이비드 캐머런 내각에서 국방부 정무차관을 지냈고, 2022년 7월 은퇴하기까지 귀족원 의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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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스터 자작위, 히버 남작위[2] 갈등이 얼마나 심했는지, 본래 두 집안이 같은 블록을 둘로 나눠 지은 집을 물려받아 살았는데, 영국으로 떠난 집안(월도프 애스터)이 자기들 집 있던 자리에 의도적으로 거대한 호텔을 지어서 옆에 있던 사촌집을 가려버렸다. 결국 사촌도 못 견디고 집을 다른 블록으로 옮기면서 역시 자기 집 부지에 호텔을 지었는데 이 둘이 합쳐진 것이 바로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이다.[3] 다만 유산 대부분은 이복형 빈센트 애스터의 몫이 되었는데, 부모의 무관심 속에서 자라난 빈센트는 아들보다 두 살이나 어린 처녀와 재혼해 집안 망신은 다 시키고 유럽으로 도망간 아버지가 ‘여자와 아이들 먼저’라는 규칙으로 딸뻘인 아내와 하녀에게 밀려 죽은 것도 기가 막히는 마당이라 어린 계모와 이복 남동생을 평생 불신했기 때문.[4] 시조 초대 애스터 자작의 3남[5] 이때 존 제이콥 애스터 4세는 윌리엄 월도프 애스터가 운영하던 월도프 호텔을 자신이 운영하던사실 사촌 겐세이 놓겠다고 바로 앞에 세웠던 아스토리아 호텔과 합병, 월도프 아스토리아 뉴욕이 된다.[6] '실질적으로'란 단서를 붙인 이유는, 명목상 최초의 여성 의원이 이미 있기 때문이다. 1918년 콘스탄스 마르키예비츠(Constance Georgine Markievicz)가 신페인 소속 아일랜드 지역구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바 있으나, 신페인 소속이란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의회에 등원하지 않고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7] 출처 : 세계사 산책.[8] D-Day 기피자들 발언을 하면서 이탈리아 전선의 영국 장병들을 공분에 빠트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