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山浦栄二일본의 애니메이션 프로듀서, 기업가. 1936년 8월 11일 출생. 2010년 7월 27일 사망. (향년 73세)
선라이즈를 키워낸 프로듀서로 기동전사 건담의 프로듀서로 유명하다.
2. 경력
영화인을 목표로 했으나 당시 TV의 보급으로 영화 업계가 무너져 무시 프로덕션에 촬영으로 입사했다.촬영보다는 업무 수행력이 좋아 비서로 승격 되었는데 무시 프로덕션의 경영이 개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시 프로덕션은 당시 애니메이터를 정직원으로 고용하고 고정급을 지급하고 있었는데 일을 대충해도 월급이 나오니 직원들이 실력이 있는데도 일을 대충하거나 부업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능력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아첨으로 승진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야마우라는 이를 보고 "인간은 믿을 수 없다."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무시 프로덕션이 조만간 망할 거라고 확신해 무시 프로덕션의 재능있는 인력을 포섭하면서 독립할 준비를 했다고 한다. 다만 무시 프로덕션 1군은 마루야마 마사오가 매드하우스로 빼가서 2군만 모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윽고 무시 프로덕션을 그만두고 소에이샤(훗날의 선라이즈)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원래는 좀 돕다가 나가서 촬영 하청사를 차리려고 했는데 그가 기획한 제로 테스터, 용자 라이딘이 히트하면서 선라이즈에 눌러앉게 되었다고 한다. 선라이즈의 창업자가 7명이었는데 [1] 기획을 하겠다는 사람이 1명도 없어서 자신이 했다고 한다.
야마우라는 무시 프로덕션의 경영을 반면교사하여 연출가와 애니메이터를 전원 프리랜서로 고용하고 모든 수당을 실적에 맞춰 지급해 근무 태만을 막고 경영은 경영 전문가에게 맡길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2] 물론 야마우라 혼자 정한 건 아니고 선라이즈 창업자 7명이 전원 같은 생각이었다고 한다. 코즈마 신사쿠는 이를 두고 토에이 애니메이션과 선라이즈가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저임금의 근원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선라이즈에 실적제를 도입해서 악덕 기업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람은 굉장히 좋고 말도 잘해서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따뜻한 성격이었지만 공과 사는 확실히 구별해서 일할 때는 굉장히 차가워지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실력있는 사람에게는 돈도 많이 챙겨주었다고 한다. 우에다 마스오에 따르면 정말 대단한 프로듀서이며 1970 ~ 1980년대의 선라이즈의 실질적인 리더와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기획을 주로 했지만 기동전사 건담은 프로듀서 시부에 야스오(渋江靖夫)가 더★울트라맨을 만들겠다고 중간에 나가서 야마우라가 실질적인 현장 프로듀서를 했다고 한다. 기동전사 건담 성공의 주역으로 꼽히기도 한다. 히트를 위해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냈으며 본방 당시 시청률이 낮을 때도 이 작품은 언젠가 반드시 인정받을 것이며 망할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토미노가 건담을 3부작 극장판으로 다시 만들고 싶다고 무리한 요구를 했을 때도 흔쾌히 통과시켰다고 한다. 다만 건프라의 성공은 본인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퍼스트 건담은 완성된 작품이라 생각해 후배 우에다 마스오와 함께 이 작품은 속편을 내지 말자고 약속했는데 회사 사정이 안 좋아져서 결국 기동전사 Z건담을 내고 시리즈물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1987년 선라이즈의 3대 사장으로 취임하고 프로듀서 작품을 줄이게 된다. 그러다 선라이즈가 반다이에 먹히면서 야마우라 에이지는 활동에 곤란함을 겪었고 1993년 기동전사 V건담 제작 중에 사장에서 물러나 선라이즈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타카마츠 신지 등 여러 크리에이터는 "이때부터 선라이즈는 선라이즈가 아니게 되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러난 뒤로도 여전히 뒤에서 아이디어는 종종 제공했다고 한다. 모빌슈트 건담 디 오리진도 야마우라의 제안으로 나왔다고 한다.
2010년에 사망했다. 급사였다고 한다.
3. 특징
기획력이 뛰어나 선라이즈의 아이디어 뱅크, 기획부장이라 불렸다고 한다. 선라이즈 초창기부터 제로 테스터, 용자 라이딘 등의 작품을 기획했으며 무적초인 점보트3, 무적강인 다이탄3, 기동전사 건담, 전설거신 이데온, 태양의 엄니 다그람, 전투메카 자붕글, 성전사 단바인, 은하표류 바이팜, 더티페어, 크러셔 죠,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 등 많은 명작에 관여했다. 거대로봇물 황금기를 만든 프로듀서로 꼽힌다. 흔히 리얼로봇물이라는 개념은 토미노 요시유키가 만든 걸로 알려져 있으나 넓은 폭으로 보면 야마우라 에이지도 공헌자이다. 사장이 되기 전에는 대부분의 선라이즈 작품에 관여하고 있었다.로봇의 디자인에도 아이디어를 많이 냈었다고 한다. 파칭코를 하다가 기계의 구조가 변하는 것을 보고 용자 라이딘 때 변신 로봇이란 것을 처음 생각해냈다고 한다. [3] 기동전사 건담에서는 로봇에 격추 마크나 엠블럼을 다는 것을 구상했다. 또한 다리가 굵은 것이 멋지다고 생각해 메카 디자이너에게 다리가 굵은 디자인을 요구했다고 한다. 초전자로보 컴배틀러V의 수많은 무기들도 그의 아이디어가 활용된 것이 많았는데, 특히 상징적인 무기인 초전자 요요를 스텝들의 치열한 회의를 통해 만들어내자 "이걸 토에이의 이름으로 내기 아깝다."리고 술회하기도 했다.
선라이즈의 기획, 저작권자 명의인 야타테 하지메는 여러 사람의 공동 명의이지만 1980년대까지는 야마우라 에이지의 비중이 컸다고 한다. 야스히코 요시카즈는 1980년대 초반까지 야타테 하지메는 사실상 야마우라 에이지였다고 하기도 했다. 야타테 하지메 명의만 대고 스태프롤에 프로듀서로 안 나온 작품도 있고 야타테 하지메는 있는데 야마우라는 참여 안 한 작품도 있어 그가 참가한 정확한 작품 리스트는 찾기 힘들지만 1970 ~ 1980년대 까지 선라이즈 작품은 대부분은 야마우라 에이지가 기획에 손을 댄 작품이라고 봐도 좋다.
당시 애니메이션 프로듀서 들이 스태프를 알리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야마우라는 "스태프가 곧 스타가 되어야 작품도 잘 팔린다." 라는 생각으로 애니메이션 잡지와 연계해 선라이즈 크리에이터의 전용 코너를 마련하였고 TV방송을 통해 애니메이션 제작 현장을 적극 공개해 여러 스태프의 이름을 알렸다. 토미노와 타카하시가 애니메이션 잡지에 계속 인터뷰하러 나갔던 것도 야마우라가 시켜서 나간 것이라고 한다. 타카치호 하루카(高千穂遙)[4], 오오카와라 쿠니오는 야마우라 에이지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유명해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야마우라 에이지를 은인이라고 부른다. 반대로 이렇게 자신의 작품의 공을 대부분 스태프에게 넘겨서 야마우라 에이지 본인은 유명해지지 못했다.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라 전쟁에 반대하는 작품을 많이 만들었으며 소년병을 주제로 다룬 작품이 많았다. 이것은 어린 시절 군국주의 교육을 받아 병기를 좋아하고 파일럿이 되고 싶었다는 꿈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전쟁이 위험한 건 알아서 그것을 긍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한 내면의 모순이 작품에 나온 것이라고 한다.
'드라마는 높게, 아이템은 낮게'가 좌우명이었다. 작품을 만들 때는 무엇보다 드라마를 중시했으며 아이템은 완구 회사가 주로 스폰서니까 내긴 내는데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고 한다. 드라마를 잘 만들면 완구는 팔리게 되고 완구 이외의 다른 것도 팔려서 이득이 난다고 한다. 하이타겟의 시청자만 몇 십만 명 잡으면 시청률이 낮아도 이득은 무조건 나게 되며 그런 사람들을 확보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스토리와 세계관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어린이들은 유치한 것은 좋아하지 않고 어른을 동경한다는 걸 알았기에 어린이 작품이라고 해서 단순하고 표현 수위가 낮은 작품을 만들지는 않았다고 한다. [5] # 처음엔 이런 생각에 의구심이 있었으나 니시자키 요시노부 프로듀서의 우주전함 야마토가 성공한 것을 보고 확신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6] 그 이후로 니시자키는 야마우라의 프로듀스의 롤모델이 되었다고 한다.[7] 용자 라이딘 때는 방송국과 타협해서 어린이용으로 노선 변경을 하기도 했으나 노선 변경 이후 시청률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자신이 옳다는 확신을 얻어 이후로는 절대 방송국과 타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야마우라의 작품은 나이먹고 봐도 괜찮게 볼 수 있다. 오히려 묘사 수위와 타겟 연령층이 굉장히 높아서 이런 걸 어떻게 애들 보라고 틀었냐고 놀랄 수 있다.
등장인물 전원이 살아있으면 긴장감이 없다면서 중간에 꼭 누군가를 죽일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주연 캐릭터라고 해도 예외가 없었다. 타카하시 료스케 말로는 작품이 중반 쯤 되면 야마우라가 찾아와서 "한 명 정도는 죽여라." 라고 요구한다고 한다.
4. 인맥
토미노 요시유키, 타카하시 료스케, 칸다 타케유키, 나가하마 다다오, 야스히코 요시카즈, 호시야마 히로유키, 스즈키 요시타케를 적극 기용했다.특히 토미노 요시유키를 신뢰해 토미노 작품은 무조건 적극 지원해줬다고 한다. 기동전사 건담은 점보트3와 다이탄3 때 토미노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아 토미노에게 모든 결정권을 주고 100% 폭주시키는 컨셉으로 기획한 작품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토미노의 성공을 밀어줘서 토미노가 고개를 들지 못하는 몇 안 되는 인물이라고 한다. 다만 토미노는 야마우라가 방송국 말을 듣고 용자 라이딘의 감독을 자신에서 나가하마 다다오로 교체한 것과, 야마우라가 건담 시리즈의 저작권과 선라이즈를 반다이에 넘기고 튄 것에 대해서는 죽여버리겠다고 화를 내기도 했다. 토미노 입장에선 애증에 가까운 관계이다.
타카하시 료스케는 야마우라 에이지를 스승으로 부른다. 자존감도 없고 게으른 자신에게 계속 넌 천재라고 하면서 일거리를 준 분이라고 하며 그러다 태양의 엄니 다그람으로 자신감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푸른 유성 SPT 레이즈너의 주인공 알바트로 나르 에이지 아스카의 이름 '에이지'도 야마우라 에이지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디자이너는 오오카와라 쿠니오, 타카치호 하루카(高千穂遙)를 자주 기용했다.
5. 작품
- 선라이즈 항목의 1970년대, 1980년대 작품 참조.
[1] 그래서 선라이즈에서는 이 7명을 7인의 사무라이라고 부른다고 한다.[2] 선라이즈가 최초로 한 것은 아니고 이러한 방식은 월트 디즈니가 시작한 것이었으며 당시 토에이 애니메이션에서도 사내 애니메이터와 별개로 프리랜서 애니메이터를 이런 식으로 굴렸다.[3] 다만 실제로는 겟타로보가 더 먼저 나왔다. 대신 야마우라는 완구로 재현 가능한 변신 로봇을 처음 만든 사람이 된다.[4] 더티 페어, 크러셔 죠 원작자. 디자이너[5] 이것은 야마우라와 같이 일했던 토미노 요시유키, 미나미 마사히코 같은 사람들도 늘 하는 소리이다.[6] 타카하시 료스케에 따르면 야마토를 야마우라와 같이 봤는데 야마우라는 "이건 너무 우울한데. 망할 것 같아." 라고 했다고 한다. 야마우라는 나중에 야마토가 성공하자 놀랐다고 한다. 타카하시는 처음부터 성공할 것 같았다고 한다.[7] 니시자키와 야마우라는 친분이 없다고 한다. 그저 성공하는 작품을 만드는 힌트를 제공해줘서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