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2010호 얼굴무늬 수막새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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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지(梁志 또는 良志, ? ~ ?)는 신라 선덕여왕 시대 불교 진흥 사업에 활약했던 승려이자 건축가, 불교 예술가로, 본관은 제주이다. 분황사, 서장사, 사천왕사, 영묘사, 법림사를 창건했으며, 시서화에 능했고, 불상과 불화 제작의 장인이었다.
불상 조각과 글씨에 뛰어난 예술가로 영묘사의 장륙삼존상과 천왕상 및 경내 전각과 탑의 기와, 천왕사 탑 아래의 팔부신중[2], 법림사의 주불 삼존상과 좌우 금강신상 등을 만들었고,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을 썼다고 한다. 사천왕사가 세워진 것은 문무왕 때의 일이므로 선덕여왕 사후 문무왕 시절까지 신라에서 활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천왕사지 소조 조각과 시기와 양식이 매우 비슷한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와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 또한 그의 작품이라는 견해도 있다. 역사스페셜에서도 이를 다룬 바 있다.
2. 꽃피는 불교 문화
영묘사 장륙존상을 만들 때 서라벌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날라 오면서 풍요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 노래는 삼국유사에 실렸는데, 일연이 살던 시대까지도 경주 주민들이 방아를 찧거나 다른 일을 하면서 불렀다고 한다. 노동요의 원조인 셈.
원문 | 해독 | 해석 |
來如來如來如 來如哀反多羅 哀反多矣徒良 功德修叱如良來如 |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셔럽다라 셔럽다 의내여 功德 닷ᄀᆞ라 오다 | 오라 오라 오라 오라, 슬프구나. 서럽구나, 우리들은! 공덕 닦으러 오라. |
삼국유사에 따르면 양지는 불상 제작 작업을 하면서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처럼 잡념 없는 상태로 작업에 몰두했다. 시주가 필요할 때는 자신의 석장(지팡이) 끝에 포대를 걸어 두면 석장이 저절로 날아서 시주하는 집으로 가서 소리를 내고 그 집에서 쌀이나 돈을 포대에 담아두면 석장이 다시 알아서 양지에게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양지가 살았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석장사는 조선 시대까지도 존속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