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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드 스트렐초프

파일:external/www.sombrero.gr/Eduard-Streltsov-bold.jpg
이름 에두아르드 아나톨리예비치 스트렐초프
Эдуа́рд Анато́льевич Стрельцо́в
Eduard Anatolyevich Streltsov
출생 1937년 6월 21일
사망 1990년 6월 22일
국적
[[소련|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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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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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출생지 페로보[1]
신체 조건 182cm
포지션 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
유스팀 프레이저 (1950~1953)
소속 클럽 FC 토르페도 모스크바 (1953~1958)
FC 토르페도 모스크바 (1965~1970)
국가대표 38경기 25골 (소련 / 1955~1968)
1. 소개2. 클럽
2.1. 토르페도의 천재2.2. 강간 혐의, 그리고 굴라크 수용2.3. 축구계 복귀
3. 국가대표4. 은퇴 이후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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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1950년대 소련을 대표하는 선수 중 하나. 어린 나이에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악명높은 굴라크에서 7년이나 수용되었으나 이를 딛고 복귀해 활약했다. 20대 중반을 굴라크 수감으로 날려먹었음에도 러시아 축구 사상 최고의 필드 플레이어로 종종 꼽힌다.

2. 클럽

2.1. 토르페도의 천재

열렬한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의 서포터였던 스트렐초프는 1950년 13세의 나이에 프레이저의 팀에 입단하며 축구를 시작했다. 프레이저는 그의 어머니가 근무하던 공장이었고 공장 축구팀의 가장 어린 선수가 된 것이다. 3년 뒤인 1953년 토르페도 모스크바 유스팀과 프레이저 팀의 경기에서 스트렐초프는 토르페도 모스크바 관계자들의 이목을 끌어당겼고 16세의 나이에 토르페도 모스크바에 입단, 1954년부터 주전 선수로 뛰기 시작한다.

첫 시즌 팀의 모든 경기에 출장하며 4골을 득점하며 프로 무대를 경험한 스트렐초프는 2년차 징크스를 깨버리고 22경기 15골을 성공시키며 만 17세의 나이로 득점왕을 차지하며 지난 시즌 9위였던 토르페도를 4위로 끌어올리는 마법을 보여주었다.

이 토르페도의 마법사는 꾸준하게 득점을 올려주었고 그는 토르페도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는 이 시기 국가대표팀에도 데뷔했는데, 그 활약 역시 폭발적이었다. 그는 전 소련이 주목하는 유망주였으며 미래 소련의 황금기를 대변할 인물임을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2.2. 강간 혐의, 그리고 굴라크 수용

스트렐초프는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했고 술을 즐겼으며 경기장 외에서는 무절제한 삶을 살았다. 특히 소련과 클럽의 스타 플레이어였던 그의 '테디 보이'[2] 헤어 스타일은 소련 당국이 그를 예의주시하게 만들었다.

스트렐초프 강간 혐의의 전말은 스베틀라나 후르체바라는 여성과의 만남에서 시작한다. 스베틀라나 후르체바는 여성으로는 두번째로 소련 정보부 직원이었던 예카테리나 후르체바[3]의 딸이었다. 둘은 1957년 크렘린에서 열린 1956년 멜버른 올림픽 금메달 획득을 축하하는 파티에서 처음 만난 사이였다. 예카테리나는 스트렐초프에게 자신의 딸과 결혼할 것을 요구했으나 스트렐초프는 이를 거절했다. 후에 만취 상태의 스트렐초프는 스베틀라나를 향해 그런 원숭이와 결혼하지 않겠다느니의 폭언을 퍼부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스트렐초프의 발언은 후르체바 모녀에게 굴욕감을 안겼고 스트렐초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라 데멘코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문제는 이 시기가 한창 리그를 준비해야하는 시기였다는 것이다. 소련 축구부는 스트렐초프의 행위를 비난했고 소련 공산당마저 스트렐초프를 불신하며 프랑스와 스웨덴과 같은 국가로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는 인물로 지목했다. 특히 1957년 4월 오데사에서 열린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퇴장당한 것을 빌미로 정부의 공식 신문인 소베츠키 스포르트는 스트렐초프에 대해 '그는 영웅이 아니다'라는 기사를 실었고 서방 제국주의 악마의 예시라는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을 앞두고 가진 잉글랜드와의 경기 이후 1주일 뒤, 스트렐초프는 소련군 장교 카라카노프의 초대를 받았다. 스트렐초프는 대표팀 동료들과 함께 타라소프카의 월드컵 준비 캠프에 있었는데 초청받은 날은 마침 휴가일이었다. 선수들은 4시 30분까지 자신들이 있음을 보고해야 했으나 스트렐초프는 미하일 오곤코프, 보리스 타투쉰 두 동료들과 함께 카라카노프의 파티에 참여했다.

카라카노프의 파티에는 20세의 마리나 레베데바라는 여자도 참석했는데, 다음날 아침, 스트렐초프와 두명의 동료들은 이 여자를 강간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스트렐초프는 자백하는 것이 그를 대표팀에 남게해 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백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12년간 굴라크에서 강제 복역할 것을 명령받았다. 아내와 이혼하고 축구계에서 영구제명당한 것은 덤.[4][5]

그는 어린 간수에게 감금당했으며 엄청난 폭력을 당했다. 특히 철봉이나 발굽으로 그를 가격해 4개월이나 병원 신세를 지게 한 일도 있었다. 소련의 스타 플레이어였던 그였기에 굴라크의 관계자들은 그를 축구팀 라인업에 포함시켰고 이는 다른 죄수들의 스트렐초프에 대한 태도를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했다.[6]

이렇게만 보면 위의 후르체바 모녀가 왜 강간 사건의 시작인지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이는 스트렐초프가 죽은 뒤 전말이 밝혀진다. 당시 소련 대표팀 감독이었던 가브릴 카찰린은 공산당 위에서의 명령이 그를 어쩔 수 없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카찰린은 경찰이 자신에게 니키타 흐루쇼프와 친분이 있던 예카테리나 후르체바의 사적인 원한이 스트렐초프의 사건에 불을 지폈다고 말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또한 당시 대표팀 동료였던 니키타 시몬얀은 2006년 스트렐초프가 그의 어머니에게 자신이 다른 사람 때문에 누명을 쓰고 있다고 편지를 보냈다고 말했다. 시몬얀은 이렇게 증언하기도 했다. "스트렐초프와 레베데바가 동침한 것은 맞다. 하지만 나는 그가 그녀를 강간했다는 것에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시몬얀은 두 사람이 상호협의 하에 맺은 성관계가 '체제'에 의해 강간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다.

시몬얀은 이 인터뷰에서 스트렐초프가 그녀를 강간했다는 것에 증거로 사용된 사진의 조작 가능성이 있다고도 말했다. 사진에는 강간에 대항 저항으로 레베데바가 스트렐초프의 얼굴에 낸 상처가 있었는데, 이 사진이 후에 합성되거나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2.3. 축구계 복귀

굴라크에 수감된 지 7년 뒤인 1963년 스트렐초프는 석방됐다. 그는 프로로 복귀하기 위해 ZiL[7]의 공장에서 일함과 동시에 기술 대학교에서 자동차 공업을 공부해야 했다. 전처인 알라와의 재결합을 시도했으나 차이를 좁히지 못했고 얼마 지나지 않나 라이사 미하일로브나라는 여자와 결혼했다.

그는 ZiL 공장의 축구팀에서 아마추어 선수로 활약하기 시작했는데, 스트렐초프의 명성이 어디 가지는 않았는지 그는 출전할 때마다 많은 관중을 몰고 다녔다. 일화로 ZiL 축구팀이 고르키(現 노브고르드)로 원정을 갔을때 팀의 코치들은 스트렐초프를 출전시키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전반전이 끝나고 관중들은 스트렐초프의 이름을 연호하며 그를 출전시키라며 폭동을 일으켰다. 고르키 공장 팀의 사장은 스트렐초프를 출전시킬 것을 부탁했고 결국 스트렐초프는 후반전에 나섰다.

스트렐초프가 뛰는 동안 ZiL 공장팀은 공장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는 공식 경기에 뛰지는 못했으나 친정팀 토르페도의 경기에 참석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1964년 10월 소련의 최고 권력자는 니키타 흐루쇼프에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로 교체되었는데, 이는 스트렐초프가 프로로 복귀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브레즈네프는 죄수들을 사면했는데 이 중에는 스트렐초프의 이름도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일부 공산당 간부들을 토르페도 모스크바가 정기적으로 서유럽 원정을 나간다는 점에서 스트렐초프가 토르페도로 복귀하는 것에 반대했으나 브레즈네프는 그를 사면했다.

1965년 스트렐초프는 토르페도 모스크바로 복귀했다. 20대 초반 보여줬던 힘과 민첩성은 떨어졌지만 그의 축구 지능은 여전했다. 그는 복귀 첫 시즌 리그 26경기 12골을 넣으며 토르페도 모스크바의 2번째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이 시즌 스트렐초프는 리그 최고의 선수로 뽑혔다. 1966년에는 인터 밀란을 상대로 유럽 대항전 데뷔전을 치렀고 국가대표팀에도 복귀했다. 1968년에는 리그에서만 21골을 몰아치며 득점 2위를 기록했고 2번째로 리그 최고의 선수에 뽑혔다.

그러나 이후 시즌 스트렐초프의 기량은 급락했고 그는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했으나 2시즌간 득점을 올리지 못했다. 결국 1970년 스트렐초프는 현역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3. 국가대표

프로 데뷔 2년차에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며 리그를 개박살낸 스트렐초프는 이듬해인 1955년 소련 대표팀에 콜업되었다. 스웨덴과의 데뷔전에서 스트렐초프는 해트트릭을 꽂아버렸고 이어지는 인도와의 2번째 경기에서도 해트트릭을 하며 소련의 미래를 책임질 선수로 급부상했다.

1956년 맬버른 올림픽에도 참가했으나[8] 정작 결승전에서는 공격수 파트너는 항상 같은 클럽 소속이어야 한다는 감독의 원칙하에 니키타 시몬얀에 밀려 출전하지 못했다.[9] 소련은 유고슬라비아를 1-0으로 격파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긴했다.

이후 스트렐초프는 1958년 월드컵 출전을 목표로 했으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축구계에서 제명당했다. 축구계에서 복귀하고 1년이 지난 1966년 스트렐초프는 국가대표팀에 복귀했다. 초반에는 주전 자리를 찾지 못했으나 이후 주전 자리를 차지하는데 성공했고 1967년 12경기에 나서 6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1968년부터 다시 주전 자리를 잃었고 유로 대회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이후에도 스트렐초프는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했다.

4. 은퇴 이후

은퇴 이후에는 토르페도의 지원을 받으며 코칭 라이센스를 획득, 팀의 유소년 팀을 지도했다. 이후 1990년 53세에 후두암으로 인해 사망했다.[10]

5. 여담

그가 죽은 지 1년이 지난 날 강간 혐의에 연루되었던 마리나 레베데바는 그의 묘소에 방문했다. 죽은 사람은 보복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스트렐초프의 사망 시점으로 보아 죽은 지 1년이라면 소련의 붕괴 시기와 맞물린다는 점에서 스트렐초프가 정치적인 이유로 굴라크에 수용되었다는 의혹이 매우 짙어지는 부분.

1956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나 정작 메달을 받은건 2006년이다. 이는 결승전 출전 선수들에게만 메달을 수여했기 때문. 그를 대체해서 뛴 니키타 시몬얀은 경기 후 그에게 금메달을 권유하기도 했다.

토르페도 모스크바의 홈 경기장의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딴 에두아르드 스트렐초프 스타디움이다.

1998년 루즈니키 스타디움에 스트렐초프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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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러시아 중앙 은행에서 러시아의 위대한 스포츠맨이라하고 축구 선수라 읽는 3명의 초상이 담긴 2루블짜리 주화를 발행한 바 있는데, 여기에 스트렐초프가 포함되었다. 나머지 둘은 레프 야신콘스탄틴 베스코프.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도 만들어졌다. 국내에는 2021년 '레전드 스트라이커'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1] 현재는 모스크바에 흡수되었다.[2] 2차대전 이후 영국에서 유행했던 스타일. 소위 리젠트라고 불리는 헤어 스타일이 바로 테디 보이 스타일의 일종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Eduard_Streltsov_c._1955-58.jpg[3] 소련 정치사상 가장 영향력 있던 여인으로 평가되기도 한다.[4] 이 때문에 소련은 1958 월드컵을 앞두고 여러 외신들이 지목한 출전국 중 전력이 약해진 두 국가 중에 포함되었다. 다른 한 국가는 뮌헨 비행기 참사로 핵심 선수들이 사망한 잉글랜드였다. 소련은 1958년 월드컵에서 한 수 아래의 상대로 여겨졌던 개최국 스웨덴에게 0-2로 패배하며 8강에서 탈락했다.[5] 참고로 오곤코프와 타투쉰은 3년간 축구계에서 제명당했다가 다시 복귀했다.[6] 굴라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죄수들끼리도 갈궜다.[7] 러시아 최대의 자동차 회사[8] 과거 올림픽에 프로 선수들은 참가할 수 없었으나 소련, 헝가리, 폴란드 등 일부 공산권 국가들은 성인 대표팀을 아마추어라 우기며 올림픽에 출전시켰다. 올림픽 축구 금메달을 획득한 국가에 동구권 국가들이 많이 포진된 이유가 바로 그것.[9] 시몬얀은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소속이었으며 이전까지 스트렐초프와 호흡을 맞춘 공격수는 같은 토르페도 소속의 발렌틴 이바노프였다.[10] 이 후두암에 대해 그의 첫번째 아내인 알라는 그가 굴라크에 있었을 때 방사능에 노출된 음식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