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문트 코넨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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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 ||||
6대 |
에드문트 코넨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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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FIFA 월드컵 실버슈 1934[1] | ||||
베스트팀 | ||||
독일의 前 축구감독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에드문트 코넨 Edmund Conen | |
출생 | 1914년 11월 10일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라인란트주 위르치히 | |
사망 | 1990년 3월 5일 (향년 75세) 서독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레버쿠젠 | |
국적 | 독일 | |
신체 | 178cm / 76kg | |
직업 | 축구선수(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FV 03 자르브뤼켄 (1931~1935) 슈투트가르트 키커스 (1938~1943) FC 뮐루즈 (1943~1944) HSV 그로스 본 (1944) SG 헤름스도르프 (1945) 슈투트가르트 키커스 (1945~1950) FC 영 펠로우스 취리히 (1950~1952) |
감독 | 슈투트가르트 키커스 (1950) FC 영 펠로우스 취리히 (1950~1952)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 (1952~1956) 부퍼탈 SV (1956-1957) 바이어 04 레버쿠젠 (1957~1959) SV 슐레부쉬 (1964) BV 오플라덴 (1970~1973) | |
국가대표 | 28경기 27골 (독일 / 1934~19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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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드문트의 애칭인 에드 또는 롤리라는 별명으로 불린 독일의 센터 포워드. 펠레와 더불어 10대의 나이에 FIFA 월드컵에서 해트 트릭을 기록한 두 명 중 한 명이다.[2]2. 생애[3]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코넨은 1931년부터 FV 자르브뤼켄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소속팀의 전력이 별 볼 일 없었지만 코넨의 기량은 어릴 때부터 출중해서 19살의 나이로 국가대표팀에도 발탁되었고, 1934-35 시즌에는 팀을 남서부 가울리가[4]에까지 진출시켰다. 하지만 1934년 SV 베르더 브레멘으로의 이적 과정에서 독일 축구 연맹의 개입으로 이적이 무산되었다. 사유는 금전 거래. 당시 독일 축구계는 철저히 아마추어리즘을 신봉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다코스타 증후군[5] 증상으로 선수 생명에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다.결국 3년반이 지난 1938년에서야 옛 코치인 오시 뮐러에 의해 슈투트가르트 키커스에 복귀할 수 있었고 슈투트가르트 키커스에서 골잡이로서 팀을 이끌었다. 이 기간 키커스는 가울리가 뷔르템베르크에서는 4년 연속 우승을 했지만 본선에서는 유독 약한 모습을 보였다. 단 한 번도 1라운드 통과를 하지 못한 것. 코넨은 키커스 소속으로 가울리가 등 중요 13경기에서 13골을 넣었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래도 자르브뤼켄 시절 주들 간의 올스타전과 같은 캄프스필-포칼에서는 남서부 지역 대표로 참가하여 우승한 기록은 있다.
2차 대전 중에는 FC 뮐루즈[6], HSV 그로스 본, 헤름스도르프에 잠시 머무르기도 하였고 전후에 다시 키커스에 복귀하였다. 키커스에서는 1950년까지 활동하였으며 전후 5년간 129경기 57골의 기록으로 노장의 힘을 보여주었고 특히 48년에는 18골을 넣어 팀 내 득점 2위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2.1.2. 국가대표
코넨은 1934년 1월 헝가리를 상대로 국가대표팀에 데뷔하였고 데뷔골도 기록하였다. 그는 이 활약을 바탕으로 월드컵에도 모습을 보였다. 슈타니슬라우스 코비에르스키, 에른스트 레너, 카를 호만, 오토 지플링과 유럽 수위급의 공격 편대를 대표팀에서 구축하였고 독일은 3위의 성적을 거두었다.코넨의 활약 중 백미는 1라운드에서 벨기에를 상대로 기록한 해트 트릭이었다. 후반 21분까지 2대2로 맞선 상황에서 단 21분만에 코넨이 3골을 넣어 승부의 추를 순식간에 독일로 기울였는데 월드컵 통산 5번째 해트 트릭이었고 10대 선수가 기록한 최초의 해트 트릭이었다. 하지만 상술했듯 다코스타 증후군으로 인해 국가대표 커리어 역시 중단되었고 1939년에서야 덴마크를 상대로 복귀전을 치렀다. 여기서도 득점을 기록한 코넨의 활약으로 독일은 2대0의 승리를 챙겼다.
코넨의 마지막 경기는 1942년의 헝가리전이었고, 프리츠 발터와 함께 1대3의 패배 위기에서 5대3의 역전극을 써내 감독 제프 헤어베어거를 경질 위기에서 구해냈다. 코넨은 8년간의 국가대표 생활 동안 28경기에 출전하여 27골을 기록하였다.
2.2. 감독 생활
1950년 슈투트가르트 키커스의 선수 겸 감독이 된 코넨은 그 해 키커스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스위스의 영 펠로우스 취리히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선수 커리어의 마지막을 보냈다.그 이후 감독 생활에서의 주요 이력은 부퍼탈과 레버쿠젠의 감독으로 부퍼탈 시절에는 호어스트 시마니아크같은 재능 있는 선수들이 많았지만 더 높은 곳으로 팀을 이끌지는 못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2009년에 발간된 잡지 11 Freunde(11명의 친구들)에서는 그를 그레이하운드처럼 유연하고 가치 있는 선수이며, 빠르고 강력했다고 평가했다.코넨이 독일 국가대표팀에서 남긴 28경기 출전 27골의 기록은 게르트 뮐러를 제외하면 25골 이상 득점자 중에서는 가장 높은 경기당 득점 기록이다.
4. 뒷이야기
- 코넨은 A매치에서 총 5회 해트 트릭을 기록하였다. 4골을 넣은 경기도 2번 있었다.
5. 수상
5.1. 클럽
- 가울리가 뷔르템베르크 우승 4회: 1938-39, 1939-40, 1940-41, 1941-42(슈투트가르트 키커스)
5.2. 국가대표
5.3. 개인
5.4. 감독
- 니더작센리가 아마추어 리그 우승 1회: 1952-53(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
[1] 안젤로 스키아비오와 공동 득점 2위. 골든슈, 실버슈, 브론즈슈는 1982년부터 수여했으므로 비공식 상.[2] 월드컵에서 10대 유망주면 웬만큼 대단한 실력이 아닌 한 큰 무대 경험을 시켜주기 위해 명단에만 올려놓는 경우에 그치지 주전으로 쓰는 경우는 매우 희귀하다. 비록 월드컵의 초창기라곤 해도 10대 시절부터 국가대표팀의 주전 자리를 차지하고 월드컵에서 해트 트릭까지 할 수준이였다면 그의 재능과 실력이 엄청난 수준이였다고 추측할수 있다.[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4] 가울리가는 나치 독일 시대의 독일 최상위 축구 리그로 각지의 지역 리그에서 우승한 팀들을 모아 다시 리그전을 치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5] 일종의 신경증으로 심장병과 증세가 비슷하다고 한다.[6] 아스날 FC의 명감독 아르센 벵거가 선수 생활을 시작한 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