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小田 氏治1534-1602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 칸토 오다(小田) 가 당주. 사타케 요시아키, 요시시게 부자, 우에스기 켄신 등의 강적을 상대로 패전과 부흥을 반복하는 등, 가히 불사조와 같은 인생을 산 인물로 유명하며, 거성을 수차례 빼앗기고 45전 18승 27패라는 초라한 전적으로 전국 최약의 다이묘라는 오명도 존재한다.
한자를 보면 알겠지만 오다 노부나가 등 오와리 국의 오다 가문과는 다른 가문이다.[1]
두 아들은 전사, 병사로 죽고 딸은 유키 히데야스의 첩실이 되지만 우지하루가 1602년에 사망한 뒤로는 그의 딸도 몇년 뒤에 병사하고 차남의 손자는 1638년 미노에서 병사하는 바람에 칸토 오다가는 멸문하게 된다.[2]
2018년 6월, 역사비화 히스토리아에서 오다 우지하루에 대해 다루었다.
2. 불사조의 혈통
오다 씨를 중흥시킨 오다 마사하루의 아들. 오다 씨는 우츠노미야 씨의 방계 혈족으로, 칸토에서 재지 호족으로 세력을 키웠다. 마사하루의 아버지는 아시카가 마사토모로 전해지며, 그는 무로마치 막부의 호리고에 쿠보였다. 마사토모에게는 아들이 마사하루를 빼면 셋 있었는데, 첫째는 소행 불량으로 폐적되었다가 반란을 일으켜 힘으로 쿠보직을 차지하였다가 이세 소즈이에게 토벌당하게 되는 아시카가 챠챠마루, 둘째는 아시카가 요시즈미, 셋째는 챠챠마루에게 살해당한 쥰도지였다. 이중 둘째인 아시카가 요시즈미는 메이오 정변을 일으킨 호소카와 마사모토에 의하여 무로마치 막부의 11대 쇼군으로 옹립된 자였다. 즉, 우지하루는 아시카가 요시하루의 사촌이자 아시카가 요시테루, 요시아키 형제의 당숙이 된다.3. 불사조와 같이
1548년 가독을 상속, 다이묘가 되었다. 당시 오다 가문은 카와고에 야전에서 우에스기와 고가 공방 아시카가 가문을 도왔다가 패하였고 인근의 사타케, 유키 등의 성장으로 가세가 기울어 가는 상황에 있었다.4. 말년
5. 평가
헤이안 시대부터 내려온 명문 칸토 오다 가문이 우지하루 대에 망했고 전적도 패전 수가 승전 수의 두배가 넘는 졸장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망이 두터웠고[3] 영민에게 사랑받는 인물로 좋은 결말을 맞이한 점이 높이 평가받는다.그 당시 전국 시대의 영주들은 백성들을 죽지만 못할 정도로 쥐어 짜는 것이 기본이었다. 향촌의 농민들이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도록 주의해서 쌀을 잘 바치도록 만들어야 한다.라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말했을 정도이고, 괜히 임진왜란으로 인해 의병이 일어났다는 유머가 있는 게 아니다. 일본에서 쳐들어온 사람들이 '야 그래도 너희는 봐줘서 딱 절반만 가져갈께'라고 말해서 빡친[4] 조선인들이 의병으로 일어났다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루머가 있을 정도. 그런 중에 자기 백성을 죽였다고 다른 사무라이에게 쫓아가 항의하는 영주를 모든 신민들이 사랑했다. 나가서 싸우면 지니까 자기 영주는 성에다 넣어놓고 자기들끼리 나가서 성을 탈환해 오는 신하들과, 영주에게 바칠 수 없다면 쌀을 불질러 버리는 영민들 때문에 그 무수히 많은 전국 시대의 끝까지 비록 세력은 줄어들었어도 살아남았으니 진정한 의미의 덕장이라 하겠다.
6. 기타 창작물에서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당연하지만 C급 무장. 그러나 이러한 그의 인생사가 민간에서 조명을 받고 유명해짐에 따라 노부나가의 야망 대지에서는 고유 뜻으로 "불사조와 같이"를 부여받게 되었다.[1] 오다 노부나가의 오다는 직전(織田)이라는 한자를 쓴다.[2] https://ja.wikipedia.org/wiki/%E5%B0%8F%E7%94%B0%E5%8F%8B%E9%87%8D[3] 적에게도, 아군에게도 존중받았으며 실제로 좌천당했을 당시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래도 가까운 친구' 정도의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4] 참고로 조선 중앙 정부가 가져가는 조세는 원칙적으로는 생산량의 10%였다. 물론 지방을 거쳐서 중앙에 올라가야 하므로 실제로 백성이 내는 양은 더 많았지만 그래도 당시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유독 조세가 가혹한 편이었다. 조선에도 병작반수제라는 게 있긴 했지만 이건 조세가 아니라 지대에 해당된다. 즉, 국가에서 가져가는 건 아니라는 말. 그리고 소작농이 전부 다 소작에만 의존하는 것도 아니었고(자작+소작으로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중에 가면 지대로 1/3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 일본에서는 그나마 위에서 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히려 관대한 편으로 사공육민을 내세웠고 다이묘들 중에서는 세금을 최대 70%까지 떼어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말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