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오오카와 케이지로 ([ruby(大川慶次郎, ruby=おおかわ けいじろう)]) | |
출생 | 1929년 2월 6일 | |
사망 | 1999년 12월 21일 (향년 70세) | |
출생지 | 일본 도쿄부 키타토시마군[1] | |
국적 | 일본 | |
학력 |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 심리학과 졸업 | |
직업 | 경마 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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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경마 평론가. 예상가로서 통산 4회의 퍼펙트 예상(1일의 모든 레이스 연승복식을 맞추는 것)을 달성하고 경마의 신(競馬の神様)이란 별명으로 불렸다.2. 생애
아오모리 현 타이헤이 목장(大平牧場)을 소유한 오너브리더였던 오오카와 요시오(타카치호 제지 사장)의 2남으로 태어났다. 오오카와 케이지로의 친조부 오오카와 헤이사부로는 일본의 제지왕이라 불리며 오오카와 재벌을 만든 사업가이고 친조모는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린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서녀, 외조부도 사업가인 금수저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목장이나 도쿄의 (타이헤이 목장의) 외장에서 경주마들을 보면서 자랐고 10살이던 1938년 도쿄 우준이 실제로 관람한 가장 오래된 경주라고 한다. 자연스럽게 경주마에 관심이 깊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너브리더가 되고자 했지만 2차 대전 후 GHQ에 의한 농지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타이헤이 목장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게 되었다.금수저 답게 일본 최고 명문학교인 도쿄 고등사범학교 부속중학교(현 쓰쿠바대학 부속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에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에 입학했다. 다음 해에 경마 서클 이나나키[2]회를 만들었고 회원의 아버지 친구였던 고노 이치로가 고문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공직 추방중이었던 고노 이치로와 종종 경마장에 다니게 되며 친분을 쌓았고 고노 이치로가 정계 복귀 이후에도 마주, 경주마 생산자로 활동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3]
1952년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의 회사인 타카치호 제지에 입사했지만 직장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매주 토요일이 되면 영업에 나가는 척 하면서 회사 뒤의 장외 마권 발매소에 가서 마권을 사러갔다고 한다. 결국 3년 만에 퇴사하고 주식회사 메이지자(明治座) 사장인 닛타 신사쿠의 경마 담당 비서로 취직했다. 주 업무는 닛타가 경주마를 예탁하는 조교사 후지모토 토미요시[4]와 연락하는 일이었다. 마침 그해 닛타의 소유마 메이지 히카리는 클래식 최유력 후보였는데 사츠키상을 앞두고 부상이 판명되어 조교사 후지모토는 메이지 히카리의 휴식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7전 6승을 기록하며 압도적인 성적을 내고 있던 말을 클래식 눈앞에서 포기하기란 마주입장에서 쉽게 할 수 없는 선택이었고 닛타 역시 무리해서라도 출전 시키고자 하는 입장이었다. 오오카와 케이지로는 이를 설득하면서 "미래가 있는 말이니 출주시키지 말아주십시오. 게다가 큰 돈을 걸고 마권을 사는 팬들에게 폐가 됩니다."라며 도게자를 했다고 한다. 닛타도 결국 조언을 따랐고 메이지 히카리는 휴양 복귀 후 킷카상에서 우승, 다음 해에는 연도대표마에 뽑혔으며 1990년에는 현창마에 선정되었다.
1956년 닛타 신사쿠가 사망하고 같은 시기 다른 마주의 부탁으로 맡고 있던 도호쿠 목장 목장장도 그만 두면서 무직이 되었고 경마 잡지, 경마 신문의 경마 예상가 활동을 시작했다. 1957년에는 고노 이치로의 빽으로 닛케이 라디오의 경마 해설자가 되었고 라디오에서 인지도를 쌓아 경마 전문지 호스 뉴스 · 말의 경마 예상가가 되었다. 여기서 1961년 9월 3일 경마 예상가 최초로 퍼펙트 예상을 달성했고 우연히 동석했던 주간 요미우리 기자가 "경마의 신의 청탁"이란 제목의 기사를 쓰면서 경마의 신(競馬の神様)이란 별명이 붙게 되었다. 그러나 덕분에 너무 주목받게 되면서 집에 협박 전화가 오기 시작하고 이 후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다. 1969년에서 1994년까지 케이슈 뉴스에서 경마 예상가 활동을 하고 프리랜서가 되어 후지 TV 슈퍼 경마의 해설자, 일간스포츠 전속 평론가로 활동했다. 또 1981년에 설립한 경마예상회사 호스 멘 회의(ホースメン会議)의 총감독도 죽을 때까지 맡았다.
“21세기 첫 경마를 보는 것이 목표”라고 자주 말하고 있었지만 1999년 12월 15일 쓰러져 12월 21일에 뇌출혈로 사망했다. 쓰러진 후 의식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가족이 경마 중계나 GI 팡파레 소리를 들려주면 뇌파가 강하게 반응했다고 한다. 죽기 2주전 잡지 취재에서 "오오카와에게 경마란?" 이란 질문에 "그건 내 '천직'입니다. 운명론자가 아닌 엄청난 현실주의자인 내가… 경마는 처음부터 (내 앞에) 천직으로 준비되어 있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라고 답변했다. 또 이 취재에서 1999년 아리마 기념 우승마로 그래스 원더를 예상했었다. 사망 5일 후 열린 아리마 기념에서 그래스 원더가 우승하면서 생전 마지막 예상이 적중했고 오오카와의 장례식에 그래스 원더가 보낸 사람으로 쓰인 조화가 보내졌다고 한다.
2.1. 경마 평론가로서의 오오카와 케이지로
오오카와 케이지로는 경마 예상가 보단 경마 평론가로 불리기를 원했다고 한다. 예상가라고 한다면 경기 전부터 예상은 무리지만 평론가는 경기 후 처음으로 입술을 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경마평론가로서 이후에도 활동을 계속하겠다고 결의한 계기는 말 미츠하타(ミツハタ)다. 1951년 토키노 미노루가 급사하면서 동세대 최강은 당연히 잇세이(イツセイ)가 될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잇세이는 더비 직후 까지 11전 7승 2착 4회(사츠키상, 더비 2착)를 기록했는데 2착 4회는 바로 토키노 미노루에게 패한 것으로 토키노 미노루 하나에게만 졌던 말이었기 때문에 이런 평가가 당연했다. 그러나 오오카와 케이지로는 잇세이가 혈통상 장거리는 무리라고 판단했고 당시 13전 4승(사츠키상, 더비 3착)에 잇세이가 나오면 2착, 토키노 미노루와 잇세이가 다 나오면 3착을 기록하던 미츠하타가 장거리에서 더 강할 것이라 예상했다. 미츠하타가 나가지 않은 킷카상에서 잇세이는 3착을 기록했고 2500m 경주인 세인트 라이트 기념에서 잇세이와 미츠하타가 맞붙어 미츠하타가 승리를 하게 된다. 이후 미츠하타는 다음 해 천황상 봄을 우승하고 레코드 승리를 4회 기록하며 세대 최강의 스테이어의 칭호를 얻게 되고, 잇세이가 승리한 경기는 2000미터까지 레이스로 한정되었다.
예상이라고 하면 말 그 자체와 관계자로부터 가져온 정보만이 대상이었던 시대에 레이스의 「전개」를 팩터로서 도입해 시대를 앞선 것으로 평가받는다. 도박으로서의 경마가 아니라 말을 좋아해 이 업계에 들어갔기 때문인지 말의 체형을 보고 다른 예상가나 경마 기자가 알지 못한 컨디션 이나 부상, 선천적 장애를 말하기도 했다. 자신의 예상을 바탕으로 마권을 사는 팬에 대한 예의로 언제나 기사에 올린대로 마권을 샀으며 패덕에서 말을 보고 예상이 잘못되었다고 직감했을 때에도 바꾸지 않았다.
자신의 예상이 틀렸을 경우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성격으로 오구리 캡의 라스트 런에서 오구리 캡은 이미 한계라고 예상했지만 경기 후 슈퍼 경마의 해설석에서는 "제가 제일 먼저 오구리에게 사과해야합니다" 라 했고 라이스 샤워가 1995년 초 부진했을 때에는 "결국, 더비에서 16번 인기였던 말"이라고 발언했지만 천황상 봄 우승 후에는 "이 말, 오늘은 장거리라 신문도 읽을 수 있겠네요, 장거리에 강한 말이라는 것이군요" 라 평가했다.
2.2. 경마계에 대한 비판
JRA에 대해 "말 덕분에 먹고 살면서 말에 대한 감사의 생각을 볼 수 없다"고 비판한 바 있다. 중앙 경마의 경주명의 대부분이 지명이나 식물명으로부터 붙여져 있고 말 이름으로부터 온 것이 적다는 불쾌감을 저서에서 비판하고 있다. 천황상(가을) 의 거리가 3200 미터 에서 2000미터로 단축되었을 때에는 끝까지 반대하고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당시의) 도쿄 경마장의 2000m는 스타트 안쪽과 바깥쪽에 의한 유, 불리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오카상을 교토경마장, 킷카상을 한신경마장에서 개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조교 대신 경주를 이용하는 진영에 반발도 있어 신잔에 한번도 본명표를 치지 않았다. 미스터 시비에 대해서는 삼관 마지막 킷카상에서 본명표를 쳤다.
조교사 오쿠보 마사아키에 대해서는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나리타 타이신을 킷카상에 출주 시킨 것과 단거리 경주인 타카마츠노미야배에 나리타 브라이언을 출주 시킨 것등을 꼽으며 "실수는 오쿠보 마사아키 조교사 자신의 식견에 있다" 라고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사쿠라 커머스 전속 조교사였던 사카이 카츠타로도 현역 시절 자주 비판했고 사쿠라 로렐이 해외원정에서 부상당했을 때에는 "로렐을 잘 아는 사카이 카츠타로 원 조교사와 장제사를 동행시키지 않은 인재" 라며 조교사 코지마 후토시를 비판했다.
사쿠라 바쿠신 오에 대한 코멘트를 요구 받았을 때에는 "(사쿠라 바쿠신 오같은)단거리 말도 가치가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고 답했다.
동물로서의 말을 모르고 예상하는 예상가나 경마 기자에게 불쾌감을 가져 "동물학을 공부하라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 어떤 동물인지는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조교사 후지모토 토미요시는 오오카와에 대해 "경마를 좋아한다기보다 말을 좋아하는 쪽이다" 라고 평가했다.
2.3. 경마 중계 에피소드
TV 중계에서 경마 해설가는 경기 전, 후에서만 해설 하고 경주 중에는 실황 아나운서가 혼자 중계하지만 오오카와 케이지로가 경주에 난입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쿄에이 프로미스가 천황상 가을에서 우승한 후 외국 말과 호각으로 싸울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경주에서 스타네라와 쿄에이 프로미스가 나란히 맞붙게 되자 흥분한 나머지 실황으로 프로미스! 프로미스! 라고 연호했다. 상위 말 다섯 중 넷이 외국 말인 상황에서 일본 말이 선전한 터라 논란이 되진 않았다.오구리 캡의 라스트 런으로 유명한 경기. 마지막 직선에서 메지로 라이언이 올라오는 걸 보고 라이언을 외쳤으나 아나운서 오오카와 카즈히코가 언급이 없자 다시 라이언을 외쳤고 그제서야 아나운서도 "라이언 왔다"고 언급했다. 이 사건에 대해 오오카와 케이지로는 아나운서가 오구리 캡만 외치고 있어서 방송하고 있는 이상 2착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외쳤다고 한다.[5] 이 에피소드 외에도 메지로 라이언은 오오카와 케이지로에게 있어 특별한 말이었다. 체격이 별로였지만 최일선에서 활약한 앰버 샤다이를 눈여겨 보았었고 그 자마이면서 훌륭한 마체를 타고 난 라이언을 앰버 샤다이의 이상형이라 보고 있었다. 게다가 1989년 신장적출 수술을 받고 건강이 나빠졌을 때 야요이상에서 우승한 라이언을 보고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1996년 타카마츠노미야배에서는 스프린트 적성이 없는 나리타 브라이언이 출주한 것에 반대를 주장했다. 경기 후에는 "(나리타 브라이언은)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칭찬해 주세요. 안전하다고 하지만 말은 무리시킨 것만으로 부상 당할 수 있어 조금 걱정"이라고 발언했고 실제로 나리타 브라이언은 레이스 후에 부상이 판명되어 은퇴했다.
1998년 하코다테 3세 스테이크스의 우승마 리저브 유어 하트(リザーブユアハート)에 대해 장래성을 부정하는 발언을 했다가 사과하고 이후에는 말의 장래성에 대해 일절 말하지 않았다. 이 말은 그 후 약 1년 반 동안 중앙 경마 13번의 경주에서 3,4,5착에 각각 1회, 6착 밖 10회의 성적으로 지방 경마(우라와)에 이적하고 이적 후에도 24전 1승에 머물렀다.
1999년 모리오카 경마장에서 열린 마일 챔피언십 남부배 이벤트에 출연해 경마 평론가 이사키 슈고로와 논쟁을 벌여 TV 방송국 측이 방송을 중단하는 사태까지 발전했다.
3. 여담
- 예전에는 예상이 벗어나면 협박 전화가 집에 걸려 오는 등 팬들과는 살벌한 관계가 있어 기차를 탈 때는 결코 역 플랫폼 맨 앞에 서지 않는 등 신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만년은 젊은 팬들로부터 마스코트 적인 인기를 얻게 되어 시대의 변화를 통감했다고 한다. 오오카와를 모델로 한 인형도 제작되었다.
- "경주마는 마주의 것이지만 경주에 등록했을 때는 마권을 산 팬의 것이 된다" 라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 후지 TV의 토크쇼 "언제봐도 파란만장"에 출연했을 때 "저는 경마로 3억을 승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4억을 지고 있습니다" 고 말했다.
- 오오카와 케이지로와 이사키 슈고로, 스기모토 키요시의 예상이 모두 일치하면 결과가 빗나간다고 한다.
- 만년에는 에어 그루브를 좋아해 에어 그루브가 천황상 가을에서 우승했을 때에는 “이 말은 보통의 암말이 아니에요. 와다 아키코씨예요”라고 극찬했다.
- 아이 앰(I am)관명을 사용하는 마주 호리 코우이치의 말 중에 '아이앰 카미노마고(나는 신의 손자다)'란 https://db.sp.netkeiba.com/horse/2006102871란 말이 있는데, 말 이름의 카미(신)이 바로 오오카와 케이지로다. 이 말의 어미말을 오오카와 케이지로의 추천에 의해 구입했던지라 "경마의 신인 오오카와씨에게는 손자같은 말"이란 의미에서 붙였다고 한다.
- 말의 훈련 방식 중 수영장 (풀) 에서의 훈련방식에 대해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해설 때 이를 너무 자주 어필하다보니 중계 아나운서도 건성으로 응대하는 경우가 있었다. 일례로 1991년 아리마 기념 때 우승마 다이유우사쿠가 파란을 일으키며 메지로 맥퀸을 꺾고 승리를 한 요인 중 하나로 수영장 훈련을 강조했을 때, 중계 아나운서는 이를 관심있게 받았지만 2년 후, 1993년 아리마 기념 토카이 테이오의 기적의 부활 우승 때, 중계 아나운서가 승리 요인을 이야기 해달라 했을 때도 수영장 드립을 하자 건성으로 응대했다. 심지어 이후에도 계속 수영장 드립을 하자 대꾸도 하지않고 그냥 타바라 세이키 기수 인터뷰로 넘겨버린 에피소드가 있었다.
[1] 현 도쿄도 키타구[2] いななき- 말의 울음소리[3] 나스노 목장을 소유했고 1966년 킷카상 우승마 나스노 코토부키(ナスノコトブキ)등의 나스노 군단으로 유명했다. 고노 이치로의 장남이 정계에 진출할 때 목장을 처분했지만 손자인 고노 지로 때에 다시 사들였다. 고노 지로는 목장을 운영하는 에비스 흥업과 마주 등록 법인 그린 팜의 대표다.[4] 오오카와 케이지로의 아버지 소유마를 전담 관리하기도 했었다. 2004년 조교사 현창자로 선정되었다.[5] 이 사건으로 오오카와 케이지로가 오구리 캡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경마팬들에 대해 부정하며 오구리 캡은 현창마 중에서도 톱 클래스, 전후 다섯손가락에 들 만한 매력적인 말로 평가했다. 애초에 오오카와 해설은 레이스 종료 직후에, 오구리를 칭찬하는 오오카와 아나운서의 말에 적극 동의하며, '오늘 레이스는 완벽했어요. 이야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경주였습니다.'라고 칭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