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9 10:08:13

오유라 소동



1. 개요2. 배경3. 사건의 발단4. 오유라의 저주 의혹5. 사건의 전개, 결과6. 그 외7. 오유라 사건을 다룬 대중매체

1. 개요

오유라 소동(お由羅騒動)은 일본에도 시대 말기에 시마즈 가문에서 일어난 가독세습분쟁(お家騒動:오이에 소동)이다. 이명인 카에이 붕당 사건(嘉永朋党事件), 타카사키 붕괴(高崎崩れ)라고도 부른다.

2. 배경

원래라면 정실의 아들이 폐적되지 않는 한 다른 이가 가독을 이어받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시마즈 가문의 번주 시마즈 나리오키(島津斉興)는 할아버지 시마즈 시게히데(島津重豪)의 영향을 받아 난벽[1]이 있는 시마즈 나리아키라를 싫어하였으며 간신히 번의 재정을 흑자로 돌려놨더니 나리아키라가 다시 서양의 굿즈를 사모으느라 번의 재정을 악화시킬까 두려워하였으며 나리오키의 애첩 오유라(お由羅)는 (정실부인의 아들이었던 나리아키라 대신) 자신의 아들인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가 가독을 상속받기를 원하였고 가로(家老) 즈쇼 히로사토(調所広郷)와 같은 사츠마 번의 중신들도 이를 원하였다.

하지만 모든 중신들이 히사미츠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에도 막부의 로주(老中)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2]와 사츠마의 하급 무사들은 사츠마의 지리적 위치와 류큐의 지배 문제 등으로 인해 (시마즈 문중의 높으신 분들이나 다른 번에 비해) 외국과의 접점이 잦았으며 이에 따라 서양의 사정에 밝은 서양덕후 나리아키라를 지지하였다.

3. 사건의 발단

적통 후계자가 성인식을 치르면 전임 번주는 은퇴를 핑계로 골치아픈 번정은 아들에게 떠넘기고, 상왕질을 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사츠마 번주 나리오키는 적남 나리아키라가 40살이 넘을 때까지 은거에 들어가지 않았고 나리오키 시대의 가로이자 핵심 측근인 즈쇼 히로사토는 측실의 아들인 히사미츠를 다음 번주로 밀었다.

이 소식을 들은 나리아키라 파벌의 하급무사들은 나리오키의 은거와 즈쇼 제거를 목표로 결속하고 가에이 원년(1848년) 가이에키의 위험을 감수하고 류큐의 밀무역을 막부 로주 아베 마사히로에게 밀고하였다. 이에 즈쇼 히로사토는 아베 마사히로에게 심문을 받았지만 주군 나리오키의 은거를 막기 위해 죄를 혼자 뒤집어쓰고 음독자살했다. 이로 인해 시마즈 나리오키는 자신의 보좌역을 죽게 만든 나리아키라를 더욱 더 싫어하게 되고 히사미츠에게 가독을 이어줄 생각을 굳혔다.

4. 오유라의 저주 의혹

한편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다수의 자녀를 보았지만 이 중 3명의 여자아이 외엔 모두 죽어 버렸으며 동생인 이케다 나리토시(池田 斉敏)마저 요절하였다.[3] 하지만 시마즈 히사미츠의 자녀들은 잘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나리아키라 파의 가신들은 오유라가 나리아키라와 그의 자녀들을 저주한다고 생각하였다.

5. 사건의 전개, 결과

나리아키라는 아카야마 유키에(赤山靱負), 니카이도 카즈에(二階堂主計) 등 개혁파에게 지지를 받았고 히사미츠는 시마즈 히사타카(島津久宝), 시마즈 히사노리(島津久徳), 이쥬인 타이라(伊集院平) 등의 나리오키파에게 지지를 받아 이들은 점점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가에이 2년(1849년) 나리아키라의 4남 토쿠노스케(篤之助)가 사망하면서 나리아키라파와 히사미츠파는 일촉즉발의 상태가 되었고 젊은 번사들이 많은 나리아키라파에서 히사미츠파의 중신들을 참살하는 사건들이 잦아지고 즈쇼파의 악명을 열거한 밀서가 나리오키의 손에 들어오자 1849년 12월 3일 나리아키라파의 중신(타카사키 하루타카, 아카야마 유키에)들과 번사들을 체포하여 할복을 명하였으며 50명의 번사들을 칩거, 원도[4]하였다.[5]

나리오키의 체포명령에 불복하고 달아난 나리아키라파의 몇 번사들은 쿠로다 가의 치쿠젠 후쿠오카번으로 탈번했다. 후쿠오카 번주 쿠로다 나가히로(黒田長溥)는 본디 시마즈 가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나리아키라와 함께 자란 친인척[6]이기도 했고 나리아키라 못지 않게 난벽성향이 심해서[7] 본가의 나리아키라와도 친근한 사이였다.친한 걸 넘어서 사실상 소꿉친구이자 정치적 동지 나리아키라파의 탈번 낭인들은 시마즈 문중 내에서 나리아키라파의 좌장격이었던 나가히로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나가히로도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이들의 체포 및 반송을 요구한 족보상 나가히로의 조카뻘이었던 나리오키의 요구를 거절한다. 나가히로는 더 나아가 이복동생인 난부 노부유키(南部信順)[8]와 손잡고 에도성의 로주 아베 마사히로를 찾아가 사태의 수습을 호소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외교전을 벌여 우와지마(宇和島) 번주 다테 무네나리(伊達宗城), 후쿠이(福井) 번주 마츠다이라 요시나가(松平慶永)[9] 등에게 사태의 수습을 요청해 친나리아키라 파벌의 다이묘 군단이 집안의 상속 문제에 압력을 가하게 되었다.[10]

나리아키라를 이전부터 지지했던 아베 마사히로는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요시에게 시마즈 나리오키를 은거시킬 것을 명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이에요시는 나리오키에게 다기를 내리면서 은거를 촉구하였다.[11] 쇼군의 명을 거절할 수 없는 나리오키는 결국 가에이 4년 2월 2일(1851년 3월 4일) 나리아키라에게 가독을 넘겨주고 은거하게 되었다.

이 사건의 계기가 된 오유라는 큰 처벌 없이 넘어갔으며 게이오 2년(1866년) 가고시마에서 사망한다. 아마 후사가 없는 나리아키라가 죽으면 히사미츠가 대를 이을 것이었기 때문에 건드리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오유라가 죽기 훨씬 전인 1858년 나리아키라가 죽고 히사미츠의 아들 타다요시가 대를 이으면서 히사미츠가 번의 실권자인 국부대원군에 올랐기 때문에 히사미츠의 어머니인 오유라도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은 것으로 보인다.

6. 그 외

사츠마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가고시마의 홈페이지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일역덕 한국인들조차 관심이 없는 사건이다... 물론 막말 4현후로 명성이 높은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승계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은 꽤 많다.

7. 오유라 사건을 다룬 대중매체


[1] 오란다(네덜란드) 문물을 좋아하는 병에 걸렸다는 뜻이다. 보통의 경우 개화성향을 의미하기 때문에 존황양이 사상이 유행하던 19세기 동아시아에서는 구설수에 오르는 성향이기도 했다.[2] 빈고노쿠니 후쿠야마 번주이기도 했지만 에도에서 태어나 일생의 대부분을 에도에서 보냈다. 영지인 후쿠야마를 방문한 것은 1837년 가독을 상속할 때 딱 한 번이라고 한다.[3] 이 시기의 시마즈 문중에서는 콜레라가 대규모로 유행해서 많은 아이들이 죽어나갔다.[4] 遠島.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 귀양 보내는 에도시대의 형벌이다.[5]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그냥 할복한 번사들도 있었다고 한다.[6] 위에서 언급된 선대 난벽 당주 시게히데의 13남이다. 항렬로는 나리아키라의 작은 할아버지로 훨씬 위지만 나이는 나리아키라보다 2살 어렸다.[7] 나가히로의 아버지 시게히데가 번의 재정을 말아먹을 정도로 난벽 다이묘였고 입양으로 들어간 쿠로다 가문의 양아버지도 난벽 성향이 짙었다. 그리고 나가히로는 친/양아버지의 난벽-개화 노선을 한 단계 더 높게 끌어올린 인물이었다.[8] 시게히데의 14남이다. 아들 한번 많다(...) 동북 지방 하치노헤번의 8대 당주 난부 노부마사(南部信真)의 양자로 들어가 9대 당주에 오른다.[9] 본명보다 호(별명)인 슌가쿠(春嶽)로 더 알려진 인물. NHK 대하드라마 등에서는 에치젠노카미 슌가쿠 등으로 불리며 당장 한국어 위키백과 문서명도 마츠다이라 슌가쿠다.[10] 이들은 익년 카에이 4년(1851년)이 되어서는 그 중개에 참가해 나리아키라의 가독상속에 공을 세우기도 했다. 라인업을 보면 알겠지만 친나리아키라 파벌은 훗날 안세이 5년(1858년) 히토츠바시 요시노부를 쇼군으로 밀던 히토츠바시파의 원년 멤버들이다. 사츠마의 나리아키라, 우와지마의 무네나리, 에치젠의 슌가쿠, 여기에 토사번주 야마우치 토요시게를 넣어 막말 사현후(막부 말기 네 명의 현명한 다이묘들)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훗날 쇼군가문 후계자 문제를 놓고 고산케 키슈번주 이에모치를 미는 이이 나오스케 파벌과 정면으로 충돌해 안세이 5년의 대옥사 때 직격탄을 맞기도 했다.[11] 다기를 내리는 것은 은거하고 차를 즐기라는 뜻이다.[12] 오유라 사건 당시 개명 이전이라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가 아닌 시마즈 타다유키(島津忠教)로 나온다. 의외로 헷갈리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