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45:41

와세다대학/도몬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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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과 조직
정경학부, 창조이공학부·연구과,
국교학부 SILS
입학 후 대학 생활 정보 동문 교우회 도몬카이
[稲門会]

출신 인물
캠퍼스 관련 상세 정보
와세다-게이오 라이벌 정기전 소케이센 [早慶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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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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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와세다대학의 도몬카이 (稲門会)에 대해서 설명하는 문서다. 한국어로는 도몬회 라고도 한다. 1885년 창설되어, 2024년 기준 현역 681,975명의 정회원을 보유 중이다. # #

2. 상세

  • 도몬카이의 영향력이 큰 이유는 와세다대학이 일본에서 학생수가 두 번째로 많은 대학[1]으로, 특히 문과 계열의 학생수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
  • 와세다대학 문서에서 언급되었듯 2020년대 일본 최고의 부자인 야나이 타다시 패스트리테일링(유니클로) 사장도 와세다 출신이다. 와세다 시절 야나이 다다시는 젊은 세대를 휩쓴 히피와 록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일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일을 안하고 평생 잘 먹고 잘 살지 와세다대학에서 고민하다가 최고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 개교 2년 뒤인 1884년에 두 명의 조선인 유학생을 받아들인 것을 시작으로 여러 한국인들이 와세다대학을 거쳐갔다. 상기의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삼성 이병철 초대회장, 박태준, 롯데 신격호 회장[2], 신익희, 이광수, 송진우, 양주동, 김성수 등 많은 유명인물을 배출하였다. 그 당시 와세다대학에 한국인이 상당히 많았던 이유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제국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구제고등학교의 졸업장이 필요했는데, 당시 조선에는 구제고등학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은 조선인들은 와세다대학과 같은 사립대학에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와세다대학 출신으로 무라카미 하루키를 학교 홍보 차원에서 열심히 밀고 있다.[3] 영화 노르웨이의 숲 사전 시사회까지 열었을 정도[4]. 2021년에는 새로 개관한 국제문학관이 '무라카미하루키 라이브러리'라는 이름으로 헌정되었는데, 평소 공개 활동을 꺼리는 무라카미가 찾아 화제가 되었다.
  • 오타쿠계의 정신적 대부인 아즈마 히로키를 처음부터 문화구상학부 정교수로 받아들인 일이나, 그 외 이런저런 행보를 보더라도 현재 이슈나 화젯거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열심히 움직이는 활동적인 학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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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인원을 합친 학생 수로 와세다대학은 전국 2위를 기록하고 있다.[2] 이병철을 와세다 선배로 대했다고 한다.[3] 정작 무라카미는 자신의 수필집에서 말하길 자신이 와세다대학에서 얻은 것은 지금의 아내밖에 없다고 했으며, "우리 때 와세다대학 문학부에서 뛰어난 인재라고 할 만한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 때 와세다대학 문학부는 적당히 자기가 좋아하는 과목만 공부해도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취직을 하려고 찾아갔더니 면접위원이 안됐지만 와세다대학 문학부 가지고는 안되겠네라고 해서 당황했다." 등 대학 측에서 들으면 민망할 소리만 줄줄이 늘어놓고 있다. 그래도 학교에 대한 애증은 교차하는 모양이라기보다는 그가 대학을 다녔던 1960년대의 시대적 상황(전공투 등 운동권)을 꼬집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학생운동 시기에 와세다 대학 캠퍼스 곳곳은 지하 저항서클들이 엄청나게 활발히 움직이던 때였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소설가 나카가미 켄지는 와세다대학 재학생도 아니고 와세다대학 근처 재수학원생이었는데도, 와세다대학의 지하 서클에서 학생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4] 일본 시사회를 2군데에서 했는데 한 군데가 와세다대학, 다른 한 곳은 주일 노르웨이 대사관이었다고 한다.[5] 뭐 부정입학 의혹으로 결국엔 중퇴하여 본인에게는 흑역사.[6] 진짜로 별명이 손수건 왕자(ハンカチ王子)다.[7] 닌코 덴노에 의해 세워진 학교로, 본래 황족과 화족을 위한 관립학교였다. 패전 후 사립학교로 전환되고 평민에게도 개방되었으나, 여전히 황족들은 모두 가쿠슈인에서 공부했다.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전 과정을 다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