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마사오 吉田 昌郎 | よしだ まさお Yoshida Masao | |
국적 | 일본 |
출생 | 1955년 2월 17일 |
일본 오사카부 | |
사망 | 2013년 7월 9일 |
도쿄도 신주쿠구 | |
사망 원인 | 식도암 |
직책 |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소장 |
학력 | 도쿄공업대학 대학원 원자핵공학 |
신체 | 180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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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원자력 기술자이며, 도쿄전력주식회사 집행 임원이자 2011년 3월 11일에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났을 무렵에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소장으로 재임하고 있었다.2. 그의 일생
2.1.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전
오사카교육대학 부속 텐노지중학교 21기이고, 오사카교육대학 교육학부 부속 고등학교 텐노지 교사 15기를 거쳐 1977년에 도쿄공업대학 공학부를 졸업했다. 고교 시절은 검도부와 사진부 활동을 했으며, 대학 시절은 보트부에서 활동했다. 1979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원자핵 공학을 전공했고, 통상산업성으로부터도 내정을 받고 있었지만, 대학 선배의 권유로 도쿄전력에 입사했다. 회사 내부 평가는 호쾌, 두목, 부하 생각을 위한 현장의 신망은 두껍게, 성격은 너글너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양 원전의 발전 부 유지 보수 부문과 단위 관리과 등을 거쳐 2007년부터 본사 임원으로 원자력 시설 관리 부장이 되었다.
2009년에는 니가타 현 츄에츠 해역 지진에 대한 도쿄전력의 대응에 관하여 이치로 부사장과 무토 사카에 전무 등과 함께 임원으로 1개월 5%의 감봉 조치가 되었다.
2010년 6월부터 집행 임원, 원자력 시설 관리 부장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소장이 되었다.
2.2.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경과 항목 참조.2.3. 소장 퇴임과 그 이후
2011년 12월 1일자로 병치료(식도암) 혹은 요양을 위해 소장직을 퇴임하고 본점의 원자력 입지 본부 사무국 위촉 집행 임원으로 변경되었다. 도쿄전력에 따르면 "그의 피폭 선량은 누계 약 70mSv이며, 피폭에 관련된 질병의 발생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말했다. 이는 연간 허용 피폭량의 70배로 "이 정도 양으로는 암이 생기려면 3 ~ 5년은 걸린다."고 한다.2012년 7월 30일 도쿄전력은 26일 요시다가 뇌출혈로 응급 수술을 실시했다고 발표했다.
2013년 7월 9일, 진단의 예상대로 단 2년만에 식도암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게이오기주쿠대학 병원에서 58세에 나이에 사망했다.
위에 2번은 틀린답안이다 그리고 누계가 연간인지 정보도 없고 국제표준 방사선 작업종사자의 연간 최대 허용 피폭량은 50mSv/y이며 5년간 100mSv/y이다
3. 평가
도호쿠 대지진 당시 뛰어난 리더십으로 후쿠시마 제2원전을 무사히 지켜낸 마스다 소장과 달리 후쿠시마 제1원전은 가동 중지에 실패하고 3개의 원자로가 멜트다운을 일으켰으며, 21세기 최악의 원자력 사고에는 당시 제1원전의 소장이었던 요시다 마사오가 저지른 실책들이 컸다. 다만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소장으로 선임된 지 1년도 채 안된 시점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났으며 정부의 대피 명령 및 해수주입 정지[1]를 가뿐히 무시하며 후속대응을 위해 현장에 있었기에 실책이 컸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2][3]체르노빌 사태의 책임자들이나 기타 다른 도쿄전력 임원들이 인간쓰레기로 비난을 받는 것과 달리 요시다 소장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자기 목숨걸고 끝까지 1호기 사고 사태를 수습했으며, 호통치는 간 총리 앞에서 답변도 제대로 못 하던 무토 부사장과는 달리 현재 상황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했으며, 자신의 잘못을 양심적으로 고백하였다는 점은 그나마 정상참작되고 있다. 무엇보다 당시 정부나 회사의 지시를 어기고 해수를 계속해서 주입한 것과 폭발을 막기 위해 벤팅 작업을 지시한 것도 요시다 소장의 판단이었다. 훗날 해수주입을 독단적으로 넣은 판단은 옳은 결정으로 판명되면서 최악은 막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즉 자신의 실책으로 사고는 터졌지만 끝까지 책임지고 최악의 상황은 피해가게 만든 사람.
4. 관련 링크
[1] 담수 외의 해수를 넣는다는 의미는 곧 원자로를 폐기하겠다는 의미이며 폐기하더라도 사고만은 막겠다는 의미.[2] 설계 자체에 대한 문제도 있었다. 설계 당시 비상전력을 공급하는 전력장치 지하에 있어 사고가 발생해 침수될 경우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라는 걸 중간기술자들이 알고 있었고 운영비용을 절감한다는 이유로 부지의 해발고도를 35m에서 25m로 낮춰 공사를 강행했다. 이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졌고 당시 첫 쓰나미 높이는 37.9m로 넘어와 해발고도를 기존설계대로만 맞춰서 건설했다면 최소한 침수는 되지 않았을 거란 평이 지배적이다. 또한 여진으로 올 수 있는 쓰나미의 최대높이를 5m로 설계했으나 당시 쓰나미는 이보다 훨씬 높게 오는 바람에 비상전력 및 원전 전체가 침수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요시다 소장이 아니더라도 막을 수 없는 재해로 보고 있다.[3] 오죽하면 후속대응으로 방사능 피폭에 대표적인 질병인 갑상선암과 백혈병에 대한 추적조사에 후쿠시마현과 미야기현 일부에서 백혈병 조사대상에서 제외했고 이에 캐나다 의사협회에서 '일본 지진으로 인한 대중보건의료 붕괴'라는 발언과 함께 "체르노빌 사고 당시의 소련 정부가 당시 일본 정부보다 훨씬 책임감 있다."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