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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강글

<colbgcolor=#666><colcolor=#fff> 독일 국방군 육군 소령
요제프 강글
Josef "Sepp" Gangl
파일:Josef_Gangl.jpg
출생 1910년 9월 12일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오버트라우블링
(現 독일 바이에른주 오버트라우블링)
사망 1945년 5월 5일 (향년 34세)
나치 독일 티롤주 이터 성
(現 오스트리아 티롤주 이터 성)
군사 경력
복무 국가방위군
1928년 ~ 1935년
독일 국방군
1935년 ~ 1945년
최종 계급 소령 (독일 국방군 육군)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주요 서훈 독일십자장 금장
1급 철십자장
2급 철십자장

1. 개요2. 일생
2.1. 출생2.2. 국가방위군 시절2.3. 독일 국방군 시절
2.3.1. 프랑스 침공2.3.2. 동부전선2.3.3. 서부전선과 팔레즈 포위전2.3.4. 아르덴 대공세2.3.5. 오스트리아 전선과 이터 성 전투, 그리고 죽음
2.4. 사후
3. 수훈 내역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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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제프 "제프" 강글(Josef "Sepp" Gangl, 1910~1945)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활약한 독일 국방군의 장교이다. 또한 이터 성 전투 당시 미군 편에서 싸운 독일군 장교로 유명한 인물이다. 최종 계급은 소령.

2. 일생

2.1. 출생

1910년 9월 12일, 요제프 강글은 독일 제국의 제후국 바이에른 왕국의 오버트라우블링(Obertraubling)에서 철도직원인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그가 아직 젖먹이 아기였던 시절 북부 바이에른 파이센베르크(Peißenberg)로 이주하였고, 요제프 강글의 동생들은 거기서 태어났다.

2.2. 국가방위군 시절

1928년, 강글은 18살의 나이로 국가방위군에 입대, 직업군인으로서의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그는 1929년까지 뉘른베르크에 주둔한 제7포병연대에 배치되었고, 이후에는 울름에 주둔한 제5포병연대로 배치되었다.

2.3. 독일 국방군 시절

2.3.1. 프랑스 침공

1935년, 강글은 루드위그스베르크에 주둔한 새롭게 창설된 제25포병연대로 배치된다. 같은 해, 강글은 그곳에서 발부르카 렌츠(Walburga Renz)라는 여성과 결혼했고,[1] 또한 1933년 바이마르 공화국과 국가방위군이 해체되면서 강글은 자연스럽게 독일 국방군 소속의 군인이 된다. 1938년 11월, 그는 원사로 진급하였고, 1939년부터 장교 학교에서 교육을 받기로 되어 있었으나, 가짜 전쟁으로 인해 그의 부대가 갑작스럽게 프랑스와의 국경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무산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강글은 첫번재 실전을 치르게 되는데, 1939년 9월 7일, 11개의 프랑스군 사단이 독일군 국경을 약 8km 정도 넘어서 침공해온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곧 모리스 가믈랭[2]의 명령을 받고 다시 프랑스 영토로 철수한다. 한편 이 과정에서 부상을 당한 강글은 무려 6개월 동안이나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1940년 5월 14일, 강글은 다시 전장에 복귀했다. 그는 즉시 프랑스 침공에 투입되었고, 제25보병사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프랑스 침공이 성공적으로 종료된 이후, 그는 1940년 8월부터 잠시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의 한 군 기지에 배치되었다. 1940년 11월 25일, 그는 위터보그(Jüterbog)의 포병 학교에 입학하였고 거기서 8개월 간 교육을 받았다.

2.3.2. 동부전선

1941년, 8개월에 걸친 교육이 종료된 직후 강글은 남부집단군 휘하의 제25포병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그가 지휘하던 제25포병연대는 105mm 구경의 화포들을 운용했고, 키예프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 전투에서의 공적으로 1941년 8월 20일 2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는다. 1942년 2월 12일, 그는 1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음과 동시에 일등상사로 진급하였다. 1942년 4월 24일, 강글은 당시로서는 신무기였던 네벨베르퍼 다연장로켓을 운용하는 부대로 재배치되었다. 이후 그는 1944년 초까지 동부전선에서 소련군과 전투를 벌였고, 1944년 1월, 후방의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44년 2월까지 안트베르펀에 있는 장교 학교에서 대대장과 사단장을 육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2.3.3. 서부전선과 팔레즈 포위전

1944년 3월 4일, 그는 첼레에서 제 7 포병여단 휘하인 제 83 다연장로켓포병여단에 배치되었고, 1944년 5월에는 그의 부대를 이끌고 프랑스로 이동했다.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벌어졌고, 강글과 그의 휘하 부대는 으로 이동해서 방어전을 벌였다. 이곳에서 그와 그의 부대는 제 12 SS 기갑사단 "히틀러 유겐트"의 휘하에 배속되었다. 캉이 연합군에게 넘어간 이후, 강글과 그의 휘하 부대는 팔레즈로 넘어갔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연합군의 무시무시한 항공기들과 기갑장비들이었다. 마침내 1944년 8월, 그와 제 7 포병여단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간신히 팔레즈 포위망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2.3.4. 아르덴 대공세

1944년 11월, 강글은 프룸으로 이동했고 이곳에서 새롭게 편성된 제7국민다연장로켓포병여단을 이끌게 된다. 그는 휘하 부대를 이끌고 아르덴 대공세에 참전했으나, 1945년 2월 자르브뤼켄 방어전에서 패함과 동시에 후퇴했다. 1945년 3월 8일 그는 독일 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강글은 소령으로 진급했고, 동시에 제 2사단 휘하 제 83 다연장로켓여단의 이끌게 되었다. 한편 이 시점에서 그의 원 부대인 제7포병여단은 심각한 손실을 입은 상태였다.[3]

2.3.5. 오스트리아 전선과 이터 성 전투, 그리고 죽음

전쟁이 막바지로 다다르던 1945년 4월 중순 강글은 예하부대를 이끌고 상부의 명령에 따라 오스트리아 티롤주 뵈겔로 이동했다. 그의 상관이었던 요한 기헬은 강글에게 뵈겔로 향하는 모든 다리를 끊고 도로를 봉쇄하여 미군의 진격을 최대한 정체시키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전술했듯이 그의 부대는 이미 거의 전멸 직전이었고[4], 또한 나치 독일의 패망이 임박했던 시점에서 그는 미군에게 저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최후까지 연합군에 저항하라는 명령에 대해서 반감을 품고 있었다. 한편 이 와중에 강글은 이터 성 근처 뵈길 마을에 주둔하고 있는 무장친위대 부대가 이터 성에 갇혀있는 쓸모가 없어진 포로들을 처형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즉시 오스트리아 저항군 세력 지도자와 접선해 합류를 요청함과 동시에 포로들이 붙잡혀 있는 이터 성을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강글의 부대와 오스트리아 저항군이 합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들만으로는 이터 성을 공격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강글과 그의 휘하 독일군은 연합군인 미 육군 제12사단에 항복했고 제23기갑대대의 존 잭 리 육군 기갑 대위와 함께 이터 성으로 향한다. 그러나 가는 길에 있던 다리의 상태가 영 아니었던 관계로 최종적으로 성에 도달한 병력은 미군 14명, 강글 그리고 독일군 10명과 트럭 1대, 셔면 전차 1대가 다였다.

그런데 당시 이터 성에 무장친위대 병력은 한 명도 없었다. 그 이유는즉슨 이터 성 인근의 다하우 수용소가 해방되었다는 걸 들은 무장친위대가 이터 성을 버리고 야반도주했기 때문이었다(...)[5] 따라서 강글과 연합군은 손쉽게 무장친위대가 버리고 간 이터 성을 접수하고 포로들을 확보했다. 하지만, 곧이어 무장친위대들이 8,8cm 대공포와 150명 정도의 병력을 앞세워 이터 성을 공격해 왔다. 독일군과 미군에 투항한 항복파 무장친위대원들, 그리고 오스트리아 저항군 세력까지 가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장친위대의 공세가 강렬했던 탓에 전투는 굉장히 치열했고, 이 과정에서 배신자가 발생하거나 무전기가 파괴되고 8,8cm 포에 고정포대로 쓰고 있던 셔먼 전차가 격파당하는 등 강글과 연합군에게는 큰 위기가 닥쳐왔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강글은 이 과정에서 폴 레노 총리를 무장친위대로부터 보호하다가[6] 저격당해 전사했다. 강글이 전사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34세였다.

비록 요제프 강글은 전투 도중 전사했지만, 독일-연합군 부대의 항전과 망가진 무전기를 대신해서 테니스 선수이자 성에 갇혀있던 프랑스인 포로들 중 하나였던 장 보로트라가 자진해서 인근 마을로 몰래 이동[7], 미군 제142 보병연대에 구원을 요청하는데 성공하였고, 이후 미군 제142 보병연대의 공격을 받은 무장친위대가 패배함으로서 이터 성 전투는 독일군과 연합군의 승리로 종료되었다.

2.4. 사후

강글은 사후 미국 정부로부터 이터 성 전투의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수여받았다. 또한 그는 아직도 오스트리아에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지금도 이터 성 전투가 벌어졌던 뵈길 마을에 가면 요제프 강글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있다고 한다.

강글의 평가는 현재도 상당히 괜찮은 편이다. 그는 독일군 장교였으며 동부전선에 참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고, 무엇보다 마지막에는 인도주의적인 목적으로[8] 미군과 연합군에 합류하여 나치를 상대로 싸웠다는 점에서 참군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3. 수훈 내역

2급 철십자 훈장
1급 철십자 훈장
독일 십자훈장

4. 기타


[1] 그녀와 강글은 슬하에 두 명의 아이를 두었다.[2] 훗날 이터 성 전투에서 강글이 그와 다른 포로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싸운 걸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하다.[3] 이 시점에서 제7포병여단은 부대 인원의 절반이 전사했고, 보유한 모든 네벨베르퍼 다연장로켓을 손실했다.[4] 포병여단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보유한 모든 화포는 진작에 손실했을 분만 아니라 그가 지휘하던 병력들은 겨우 소대/중대급밖에 되지 않았다.[5] 하지만 성에만 없었을 뿐이지 근처에 무장친위대 병력들이 잔뜩 진을 치고 있던 관계로 프랑스인 포로들은 성을 탈출하지는 못했고 무장친위대가 버리고 간 무기들을 들고 자체적으로 성을 지키고 있었다.[6] VIP인 전 총리가 도대체 왜 저격당할 거리에 있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터 성 전투 당시 성에 갇혀있던 프랑스 포로들은 모두 무기를 들고 싸우기를 자처해서 최전방에서 무장친위대에 맞서 싸웠다. 사실 그게 아니어도 당시 병력차가 워낙 컸기에 프랑스인들까지 동원해야 했던 것도 있지만.[7] 이 과정에서 몇 명의 무장친위대 대원이 그와 마주치기도 하였으나, 보로트라는 인근지역 농부로 변장한 상태였기에 무장친위대들은 별 의심없이 그를 보내주었다.[8] 그가 연합군과 함께 이터 성으로 가 성을 수성한 이유가 무장친위대의 포로 학살을 막기 위해서였다.[9] 이는 바이틀링도 마찬기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