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31 17:26:03

우크라이나 공산당

파일:우크라이나 공산당 당기.svg
Комуністична партія України (КПУ)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ca0000> 영문 명칭 Communist Party of Ukraine (KPU)
한글 명칭 우크라이나 공산당
창당일 1993년 6월 19일
금지일 2015년 12월 16일
해산일 2022년 7월 6일[1]
전신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공산당
우크라이나 사회당
서기장 페트로 시모넨코
이념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좌익 대중주의
소련 애국주의
사회보수주의
친러
정치적 스펙트럼 극좌
당원 수 약 115,000명 (2012)
당 색
빨간색 (#CA0000)
하얀색 (#FFF)
최고 라다
0석 / 450석
지방의회
0석 / 43,122석
국제조직

청년조직 우크라이나 콤소몰 (Ленінська Комуністична Спілка Молоді України (ЛКСМУ))
기관지 공산주의자 (Комуніст)
홈페이지 파일:우크라이나 공산당 당기.svg

1. 개요2. 역사
2.1. 독립 직후2.2. 오렌지 혁명 이후2.3. 유로마이단 이후
3. 강제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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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크라이나 공산당우크라이나친러 성향 공산주의 정당이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공산당의 후신이라고 자처하지만 법적으로는 무관하다. 정확히는 소련 붕괴 후 우크라이나 SSR 공산당이 금지되자 우크라이나 사회당 등에 입당한 인물들이 창당한 정당이다.

2. 역사

2.1. 독립 직후

1993년 3월 6일 우크라이나 전역의 공산주의자들이 전우크라이나 공산주의자 대회를 개최했고 1991년 8월 30일 금지된 우크라이나 SSR 공산당의 재건을 시도했으며 두 달 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는 공산주의 정당들의 재창당을 승인했다. 1993년 6월 19일 제1차 우크라이나 공산당대회[2]가 개최되었고 페트로 시모넨코를 제1서기로 선출했다.

창당 당시 일부 인원들이 우크라이나 사회당 출신이었기 때문에 1990년대에는 사회당과 긴밀한 관계였으므로 공산당은 199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올렉산드르 모로즈 우크라이나 사회당 대표를 지지했고 모로즈 대표는 1999년에 개최된 제22차 우크라이나 공산당대회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1994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선거에서 지역구 86석을 획득했고 단숨에 원내 제1당이 되었다.

1998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선거에서 우크라이나 사회당과 연합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독자적으로 참여했다. 6,550,353표(24.65%)를 득표해 비례대표 84석, 지역구 38석을 획득해 원내 제1당이 되었다.

1999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페트로 시모넨코 후보가 5,849,077표(22.24%)를 득표하면서 2위로 결선에 진출했지만 결선에서는 친러 성향 유권자들의 표 중 100만 표 이상이 이탈하면서[3] 10,665,420표(38.77%)를 득표해 2위로 낙선했다.

2000년 신 우크라이나 공산당과 노농공산당이 분당해 나갔는데 우크라이나 공산당은 이를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이 표 분산을 목적으로 관제야당을 창당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

2001년, 우크라이나 공산당에 대한 금지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왔다. #

2002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선거에서 5,178,074표(19.99%)를 득표해 비례대표 59석, 지역구 6석을 획득했다. 이후 빅토르 유셴코우리의 우크라이나, 율리야 티모셴코율리야 티모셴코 블록, 올렉산드르 모로즈우크라이나 사회당과 연합을 구성했으나 200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의 단일 후보 추대 방침에 반발하며 탈퇴했다.

2.2. 오렌지 혁명 이후

200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페트로 시모넨코 후보가 1,396,135표(4.97%)를 득표하며 4위로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빅토르 유셴코를 지지하고 친서방 성향으로 돌아선 우크라이나 사회당(3위)에 밀린 것이다.

2006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선거에서 929,591표(3.67%)를 득표해 21석을 획득했다. 33석을 획득하고 라다 의장 직도 가져간 우크라이나 사회당에 완전히 좌파 정당의 지위를 빼앗긴 모습을 보여주었다.

2007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선거에서 1,257,291표(5.39%)를 득표하면서 27석을 획득했다. 우크라이나 사회당우리의 우크라이나와 의장 직으로 다투면서 지지율이 급속도로 하락했고 0석에 그치는 참패를 당하면서 원내 유일한 좌파 대안 정당이 되었다.

2010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페트로 시모넨코 후보가 872,877표(3.54%)를 득표하며 6위로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0%대를 기록한 우크라이나 사회당에 비해 지역당에 지지 기반을 빼앗기지 않은 게 그나마 위안이다.

2012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선거에서 2,687,246표(13.18%)를 득표하면서 33석을 획득했다. 당시는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지지율이 꽤 나오던 시절이라 사표심리 없이 친러 좌파 성향 유권자들을 흡수한 것으로 보이지만 동부 지역구는 모조리 지역당에 뺏기면서 단 하나의 지역구도 탈환하지 못했다.

2.3. 유로마이단 이후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을 친서방 세력의 쿠데타로 규정하고 전 세계의 좌익 세력에게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지지하는 것을 촉구하는 악수를 두고 발았다.[4][5] 그런데 즉각적인 지지율 하락을 직감했는지 정작 야누코비치 탄핵에는 찬성표를 던졌다. #

그 결과 201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페트로 시모넨코 후보는 이전 선거의 반도 안 되는 272,723표(1.51%)를 득표하면서 9위로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야누코비치 탄핵과 러시아의 위협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거듭된 지지율 하락으로 인해 7월 1일에 6명의 의원이 의회에서 공산당을 탈당해 의원 수가 23명으로 줄었다. 7월 22일 최고 라다 의장에게 처음 구성 시보다 구성원이 적은 교섭단체를 해산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결국 7월 24일 최고 라다 내 공산당 교섭단체가 해산되었으며 당원 일부가 공개적으로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자칭 도네츠크 인민공화국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의 내란을 지원하는 트롤링을 벌이면서 관련된 형사소송이 308건 진행됐다고 발표되었다. 당시 당 지도부는 우크라이나 영토 보전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으며 분리주의 성향 당원들을 제명하면서 코렁탕은 피했다. #

그러나 지지율은 그대로 곤두박칠쳐서 2014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선거 결과 지역구 0석, 611,923표(3.88%)로 비례대표 0석을 기록해 원외정당으로 전락했다.
파일:우크라이나 공산당 로고(2015).png
공산주의 상징을 없앤 로고 (2015~)

분리주의 친러 반군과의 진압작전이 전쟁 수준으로 확대되고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탈공산화, 탈러시아 정책이 진행된 2015년부터는 그야말로 인민의 적이 되어 버렸다. 결국 2015년 5월 공산주의 상징을 전면 금지하는 법률이 우크라이나에서 발효되었고 이에 따라 2015년 7월 24일에 피선거권을 박탈당하면서 사실상 죽어 버렸다. #

2015년 9월 30일, 키이우 지방행정법원은 노농공산당과 신 우크라이나 공산당을 금지했다. 우크라이나 공산당은 항소했으나## 2015년 12월 16일 키이우 지방행정법원은 우크라이나 내에서 공산당의 활동을 금지하는 법무부의 주장을 완전히 승인했다. ### 공산당은 이러한 조치에 대해 유럽인권재판소에 항소했다. ####

다만 2017년 1월, 국가부패방지청은 공산당이 정식적으로 해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법무부에 재정을 보고해야 한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탈공산화법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2019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페트로 시모넨코 공산당 전 대표의 입후보를 금지했다.

3. 강제 해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 당대표 시모넨코는 침공 위기를 서방의 루소포비아 조장이라고 주장했다. # 그러나 침공 위기가 서방의 반러 공포 조장이라고 주장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정말 침공이 벌어지면서 당장 돌이나 맞지 않을지를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결국 2022년 7월 6일에 법적으로는 완전히 해산됐지만 실질적으로는 해산되지 않았으며 서기장 페트로 시모넨코는 이미 3월 키이우 전투 도중 러시아군의 도움을 받아 벨라루스로 탈출했다.

10월 27일부터 쿠바 아바나에서 열린 22차 공산당-노동자당 대회에 우크라이나 공산당과 페트로 시모넨코 서기장이 참석해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페드로 시모넨코 서기장은 대회에서 젤렌스키 정권을 파시스트 정권으로 간주하고 비난했으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그리스 공산당이 중립 입장을 취하는 것을 비판하고 나토에 맞서 러시아돈바스가 승리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1] 강제해산[2] 공식적으로는 우크라이나 SSR 공산당의 직접적인 후계자임을 어필하기 위해 제29차 우크라이나 공산당대회로 명명되었다.[3] 다른 군소 친러 후보들을 차치하더라도 3, 4위를 차지한 우크라이나 사회당올렉산드르 모로즈 후보는 약 300만표를, 우크라이나 진보사회당나탈리야 비트렌코 후보는 약 200만 표를 득표했음에도 이들 표를 완전히 흡수하지 못한 것으로 풀이된다.[4] 2013년이면 몰라도 2014년부터는 친러 세력도 야누코비치를 버린 상황이였다.[5] 다만 대부분의 공산당이 이러한 입장이다. 러시아를 제국주의 국가로 보는 그리스 공산당도 유로마이단을 쿠데타로, 현 우크라이나 정권을 파시스트 정권으로 간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