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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빅토르 안드리요비치 유셴코 Ві́ктор Андрі́йович Ю́щенко Viktor Andriyovych Yushchenko | ||
출생 | 1954년 2월 23일 ([age(1954-02-23)]세) | ||
소련 우크라이나 SSR 수미주 네드리가일로프군 호루지옙카 (現 우크라이나 수미주 네드리하일리우군 호루지우카) | |||
재임기간 | 제3대 대통령 | ||
2005년 1월 23일 ~ 2010년 2월 25일 | |||
서명 | |||
SN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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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테르노폴 금융경제연구소 | ||
신체 | 183cm | ||
가족 | 스비틀라나 콜리스니크 (1977–1998) 카테리나 추마첸코 (1998–) | ||
자녀 비탈리나·안드리 자녀 소피야·흐리스티나·타라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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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크라이나의 제3대 대통령.상당한 미남 정치인이었으나, 2004년 대선 당시 다이옥신 테러를 당해서 전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후 목숨은 건졌지만 얼굴이 크게 상했다.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가 둘 다 유창하고 우크라이나어를 말할 때 러시아어 단어와 같이 말하기도 했다.[1]
1.1. 인명 표기
본래 국립국어원의 표기용례는 '유시첸코'였지만 2005년에 러시아어 표기법이 제정되기 전인 2004년에 우크라이나어의 현지 발음을 확인한 뒤 '유셴코'로 정정됐다. 이때 러시아어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어를 기준으로 심의했다(러시아어의 shch는 '시ㅊ-' 또는 '시치'로 적도록 하여 우크라이나 대통령 Yushchenko를 '유시첸코'로 적었으나 현지 발음이 '유셴코'에 가깝다는 것이 확인되어 표준 표기형을 다시 '유셴코'로 번복하는 일도 있었다). 우크라이나어로는 Щ, щ가 들어간 발음을 확실하게 sh-ch를 구분해서 발음하는 사람도 있으나, 합쳐서 sh에 가깝게 발음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당시의 관련 글. 그런데 국립국어원에서는 유사한 자음군을 지닌 폴란드어 지명 Szczecin([ʂt͡ʂɛt͡ɕin])을 '슈체친'으로 표기한 바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어 지명 Щастя(Shchastia, [ˈʃt͡ʃɑsʲtʲɐ])에 대해서는 '시차스탸'로 규정 용례를 제시하고 있어 기존의 '유셴코'와 상충되고 있다.[2]2. 약력
- 1993.1. 제3대 우크라이나 국립은행 총재 (1993.1.26.~1999.12.22)
- 1999.12. 제7대 총리 (1999.12.22.~2001.4.28.)
- 제3대 우크라이나 대통령
3. 생애
1954년 2월 23일 우크라이나 SSR 북부 수미주 네드리하일리우군에 위치한 호루지우카(Хоружівк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안드리 유셴코(Андрій Андрійович Ющенко, 1919–1992)는 영어교사로, 2차대전에 참전했으나 독일군에게 포로로 생포돼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수용된 적이 있었으며, 어머니인 바르바라 유셴코(Варвара Тимофіївна Ющенко, 1918–2005)[3]는 물리, 수학 교사로 부부가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다.3.1. 은행가
1975년 유셴코는 테르노필 재정 및 경제연구소를 졸업한 뒤 회계사로 일을 시작했으며, 1983년에는 소련국립은행 우크라이나 사무소에서 농업융자 부관리자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은행가로서 재능을 드러냈다. 1990년부터 1993년까지 농업산업은행 부지배인 및 수석부지배인을 역임했으며, 1993년부터 우크라이나 국립은행 총재를 역임하기 시작했다.유셴코는 우크라이나 중앙은행 총재로 역임하면서 독립 이후 새로운 화폐인 흐리우냐의 도입을 주도했다. 또한 우크라이나 내 상업은행용 관리시스템을 개발했다. 특히 우크라이나가 겪고 있던 초인플레이션을 1996년 무렵에 해결하여 경제 관료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이었던 레오니드 쿠치마는 이러한 점에 주목해 1999년 그를 총리로 발탁했다.
3.2. 총리
총리로 재임하면서 우크라이나의 경제성장률이 본격적으로 플러스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2000년부터 시작한 우크라이나의 호황은 2008년 위기까지 이어지며 이 기간 우크라이나는 등락이 있으나 연평균 7% 성장률을 기록했다.[4] 유셴코는 1999년 12월부터 2001년 5월까지 총리로 재임하면서 우크라이나 경제발전의 구조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예를 들어 유셴코는 우크라이나 정부 내에 정형화된 의사결정 절차를 도입하고, 최초의 균형재정을 달성하며, 토지개혁과 대기업 민영화 등 굵직한 경제개혁이 이루었다. 그러나 유셴코는 그의 개혁적인 경제정책으로 당시 우크라이나 의회 과반수를 점유하던 우크라이나 공산당[5]과 올리가르히 세력과 마찰을 빚었고,[6] 결국 2001년 불신임 투표를 통해 사임되었다. 이후 2002년 우리의 우크라이나에 입당했고, 정치인으로서 율리야 티모셴코 블록의 율리야 티모셴코, 우크라이나 사회당의 올렉산드르 모로즈와 협력하면서 야권 정치인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헤오르히 곤가제(Георгій Ґонґадзе, 1969–2000) 사건[7] 등 당시 대통령이었던 레오니드 쿠치마를 지지율에서 앞지르면서 차기 대통령 후보로서 언급되기 시작했고, 2002년 총선에서 우리 우크라이나가 득표율 1위를 기록하는 선전을 거두웠다.이렇게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가 되었고, 200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 유세 도중이던 2004년 9월 5일 빅토르 유셴코는 인생 최대의 위기를 겪는다. 이 날 키이우 근교에서 우크라이나 보안원 간부들과의 식사 직후 갑자기 쓰러지게 되고 여러 차례 치료 과정에도 불구하고 차도가 보이지 않자 며칠 후 오스트리아 빈으로 긴급 후송된다. 이후 혈액 검사 결과 무려 기준치의 5만배가 넘는 다이옥신이 검출되니 이것이 바로 소위 다이옥신 수프 사건이었다. 그러나 얼굴이 완전히 망가지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여러차례에 걸친 치료 과정 끝에 유셴코는 암살 위기에서 극적으로 살아나게 된다.
그리하여 1차 투표에서 39.9%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하였고 결선투표에서도 우세가 점쳐졌으며 실제 출구조사에서도 11%나 앞서는 여유있는 승리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실제 개표에서는 예상과 다르게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유셴코 진영은 선거 부정 사례를 입수,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키예프에서만 50만 시민들이 독립광장(마이단 네잘레즈노스티, 유로마이단이 일어난 그 광장이다.)에 모여 정부가 재선거할 것을 요구하며 시위했다. 처음에 정부는 유셴코와 협상하면서 결과를 승복시키려 했다. 하지만 11월 24일 우크라이나 중앙선거위원회가 야누코비치가 당선되었다고 발표하자 이에 키예프, 리비우 지방의회 등에서 선거결과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나서고, 이에 동부지역에서 크게 반발하면서 우크라이나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이 와중에 우크라이나 대법원에서 침묵을 깨고 현 대통령 선거에서 대규모 부정 사례가 발견되었으며, 이에 재선거를 요구하자 상황은 급격히 반전되었다. 결국 12월 26일 재투표가 진행되어 유셴코가 51.99%로 승리했다. 이에 야누코비치는 부정 의혹을 제기했으나 우크라이나 중앙선거위원회와 대법원 모두 야누코비치의 청을 기각했다. 그렇게 유셴코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3.3. 대통령
이렇게 아슬아슬한 과정을 겪으며 대통령에 당선된 유셴코는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권력을 행사해도 이를 견제할 수 없던 쿠츠마 시절의 교훈을 활용해[8] 헌법을 전면적으로 개정했다. 그가 개정한 새로운 우크라이나 헌법은 대통령의 국정운영 권한을 축소시키고 총리에게 실질적인 행정부 수반으로서 내각을 구성하는 권한을 부여하는 이원집정부제의 요소를 골자로 했다. 이는 대통령에 의한 독단적인 국정운영을 막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총리가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다른 성향을 보일 경우 마찰을 일으켜 국정 운영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었다.이러한 장점과 단점을 포함한 헌법개정안은 이후 우크라이나를 위기에 빠트리기도 했고, 위기에서 구하기도 했다. 당장 유셴코와 정치적 동지 관계였던 티모셴코가 총리에 임명된 이후, 총리의 권한을 이용해 개혁적인 내각을 구성하자 처음에는 친러세력과, 나중에는 친러세력과 친서방세력을 중재하려던 대통령과도 마찰을 일으켰다. 하지만 2014년 유로마이단 당시 야누코비치가 러시아로 망명했을 때, 우크라이나 정부는 올렉산드르 투르치노우 대통령 대행과 함께 아르세니 야체뉴크 총리를 수반으로 한 내각이 지도력을 발휘, 우크라이나는 정국혼란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빠르게 새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동부 지역에서는 유셴코의 당선 당시 분리독립을 언급할 정도로 친러 세력은 그에게 노골적으로 적대적이었다. 친러 세력뿐만 아니라 그의 지지세력들 역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과 NATO 가입을 요구하면서 우크라이나를 급진적으로 서방식으로 개혁하길 원했다. 즉, 한 마디로 두 세력 중 어느 한 곳을 고르자니 나머지 세력과 척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유셴코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우크라이나군을 이라크에 파병하면서 NATO와 가까워졌다. 하지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서방으로 향하려 하자 거의 경기를 일으키다시피 반응했고, 우리에게는 잠가라 밸브로 알려진 천연가스 거래 제한 및 채권 압박 등을 통해 우크라이나 경제에 압박을 주었다. 당연히 유셴코 입장에서는 이러한 러시아의 압력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티모셴코 현 총리, 모로즈 전 라다 의장을 비롯한 오렌지 혁명 지지세력이 마찰을 빚었고, 이것이 2005년 성장률 급감과 함께 유셴코의 지지율이 빠르게 추락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의 우크라이나와 티모셴코 블록, 사회당이 따로 후보를 내며 척을 졌고, 2006년 총선에서 우리의 우크라이나는 참패했다. 그래도 친서방 3당(우리의 우크라이나, 율리야 티모셴코 블록, 우크라이나 사회당)의 의석 수를 합치면 과반에 겨우 턱걸이했다. 그러나 우리의 우크라이나 측에서 고작 33석을 가진 우크라이나 사회당의 올렉산드르 모로즈가 최고 라다 의장 직을 가져간 것에 반발함에 따라 사회당이 오렌지 연합에서 이탈해 친서방 과반이 무너졌다. 설상가상으로 사회당은 이후 지역당, 우크라이나 공산당과 반위기연합을 구성해 친러 과반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율리야 티모셴코가 총리 직을 얻는 데 실패하고 유셴코의 정적인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총리로 임명되었다. 결국 유셴코는 의회를 해산하고 2007년 재선거를 치러 친서방 세력이 과반 의석을 가져갔고, 티모셴코가 총리로 임명되었다.
2006년 미군과 함께 우크라이나에서 진행한 시 브리즈(Sea Breeze) 합동 훈련으로 친러 세력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고, 거기에다가 2004년 12%를 기록하던 경제 성장률이 2005년에 2.4%로 추락했고, 이후 2006년과 2007년에 경제성장률이 회복되었기는 했지만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가 터지는 바람에 우크라이나의 1인당 GDP가 2009년에 2500달러로 추락하여 경제 정책 면에서 실패하는 바람에 리더십은 더더욱 추락했다.
2009년 3월 율리야 티모셴코 총리까지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손을 잡는 등 완전한 반 유셴코로 돌아섰고 정치적 혼란이 심해졌다. 유셴코는 이후 티모셴코를 총리로 임명한 것이 5년 집권 기간 중 가장 큰 실패였다고 연설하며 복수했고, 대통령이 된 야누코비치도 티모센코는 감옥으로 보내면서도 유셴코는 그대로 냅두는 보은(?)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2010년 1월 17일에 치러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이미 유셴코의 지지율은 10%대 바닥이었기 때문에 단 5% 득표에 그치며 재선에 실패했고, 결국 단임으로 끝났다.
3.4. 은퇴 이후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일어나자 빅토르 유셴코는 러시아를 비판하고 우크라이나에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다만 민병대를 조직해서 키이우 전투에 참전한 페트로 포로셴코와 달리 민병대를 조직하지는 않았다. 2022년을 기준으로 68세의 고령이고 독살 시도로 건강에 악영향이 남아있을 가능성과 재임기간 동안 강경파인 율리야 티모셴코 총리와 갈등을 빚을 정도로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점진적인 성향이 민병대를 조직하지 않은 이유로 보인다.2022년 3월 2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푸틴 정부를 모스크바 군사정권, 전염병(plague), 우크라이나인의 처형자(executioner)로 비유하며 러시아 파시스트 정권을 강하게 비판했다.#
4. 평가
대통령 임기 기간 내내 자신의 반대세력뿐만 아니라 지지세력의 견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오렌지 혁명 동지였던 페트로 시모넨코, 올렉산드르 모로즈, 율리야 티모셴코가 차례대로 유셴코의 곁을 떠나갔고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친러 세력의 간섭과 정치적 급진파였던 티모셴코에 휘둘리면서 민심을 잃었다. 이는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 균형을 강조하면서 얻은 정치적 안정으로 경제 발전에 힘쓴 레오니드 쿠치마 전 대통령에 비교하면 여러모로 정치적인 소통 역량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많이 아쉬운 점이었다. 2004년 12%에 달하던 경제 성장률을 2005년 집권 1년만에 2%대로 추락시키는 등 과거 쿠치마 정부에서 총리로 재임하던 시절 보여준 경제 전문가의 위엄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고 오렌지 혁명으로 얻은 민심을 금세 잃었고, 경제가 어려워진 말년에는 우크라이나의 옐친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도 붙었다.하지만 유셴코는 적어도 헌법 개정을 통해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쏠려있던 권력을 총리와 의회에 배분해 옛 소련 국가의 취약점 중 하나인 권력 집중을 막았다는 점[9]에서 평가할 부분이 적지 않은 인물이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집권기간 동안 많은 혼란기와 어려움을 보냈다는 점에서 평가가 엇갈리긴 하나, 우크라이나가 어느 정도 민주 국가로서 기능할 수 있게 한 바탕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유셴코에게는 인정 받을 만한 업적이 분명히 있다.
또한 유로마이단의 목표 중 하나가 야누코비치가 2010년 취소시킨 2004년 헌법개정안을 다시 되돌리는 것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결과적으로 그가 만든 헌법이 나라를 권위적으로 운영하던 야누코비치를 막아낼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유셴코는 우크라이나 민주주의에 나름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5. 다이옥신 중독 사건 관련
5.1. 친러, 러시아측의 테러라는 입장
러시아 혹은 친러 세력으로부터 다이옥신 테러를 당했다는 측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우선 친러세력은 유셴코의 독살을 시도했을 정도로 그를 미워했다.
독살 기도 사건 이후 11년이 지난 2015년에 사건 당시를 회상하는 유셴코.
또한 본 동영상에서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우크라이나 의료진은 유셴코 측과의 어떠한 검사 결과, 치료 과정 자료 공유도 거부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로의 긴급 후송은 단순히 우크라이나 의료진의 의술 실력이나 장비에 대한 불신 때문이 아니라 이미 우크라이나 의료진이 정부의 협박, 혹은 회유에 넘어가 유셴코를 일부러 방치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 측근들의 판단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우크라이나 의료진의 석연찮은 태도는 본 독살 기도 사건의 배후에 한때 정치적인 스승이었지만 정적으로 돌변한 레오니드 쿠치마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 혹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자리잡고 있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준다.
5.2. 반박측
(출처: 중앙일보)'유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 중독설 거짓 논란(출처: 한국경제) 우크라 前검찰총장 "유셴코 중독설은 거짓"
(출처: 연합뉴스) <초점> 우크라 오렌지혁명 1주년
(출처: 경향) 유셴코 前대통령 독극물 중독은 조작?
유센코측의 다이옥신 테러 의혹 주장측에서 제기하는 주장들이 석연치 않다며 의혹들을 제기하는 측의 반박들은 다음과 같다.
유셴코 대통령은 다이옥신 중독에 따른 자신의 얼굴 변형 사건에 대해서도 진상 규명 의사를 누차 밝혔지만 여전히 미궁에 처해있는 상태다. 유셴코 대통령은 지난달 오스트리아 병원에서 또한차례 검진 테스트를 받았을 뿐이며 일각에서는 다이옥신 중독설이 유셴코가 당시 야누코비치 후보 진영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흘린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병원 루돌피너하우스의 로타르 비케(64) 박사가 최근 유셴코의 혈액에서 독극물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며 보도에 따르면 특히 비케 박사는 유셴코의 중독 사실을 부인했다는 이유로 병원에서 해고당했으며, 유셴코 후보 측으로부터 살해 협박까지 받았다.
비케 박사는 지난해 12월 초 루돌피너하우스 병원이 유셴코 당시 대통령 후보의 중독설을 공식 발표하기 하루 전 해고당했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3월11일자에서 미국 의료진이 유셴코 당시 야당 후보 치료에 가세했다고 폭로한 바 있다
이후 빅토르 유셴코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사건 수사를 주장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독극물 중독 사건을 재수사하기 위한 혈액 채취를 거부하기까지 했다.
[1] 출처는 영어 위키백과.[2] 아마 '유셴코' 표기는 우크라이나 동부 주민의 발음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서부와 중부의 우크라이나어 화자는 Щ를 확실히 [ʃt͡ʃ\]로 발음하나, 동부의 우크라이나어 화자는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어처럼 [ɕː\]로 발음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3] 혼전성은 '체르넨코(Черненко)'.[4] 다만 우크라이나의 경제성장률에 관한 통계를 그대로 믿기는 힘든데, 1990년대 우크라이나는 도저히 제대로 된 통계를 내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90년대 말까지 GDP 감소가 60%에 달했지만 공식 통계에 포함되지 않은 그림자 경제를 합산하면 GDP 감소는 30%로 추정된다. Daniel Kaufmann과 Aleksander Kaliberda에 따르면 1989년 12%였던 그림자 경제의 비중은 1995년 46%로 급격히 증가했다. 이것은 10%를 약간 넘긴 폴란드에 비해 그 비중이 유난히 큰 것이었다. 즉 2000년대 초 공식통계에 나타난 급격한 경제성장은 그림자 자금이 어느정도 양성화된 것이 통계에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5] 1990년대 경제난의 여파로 소련시절에 대한 향수가 증가하면서 쿠치마 정권 초중기 동안 원내 1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물론 서부에서 소련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기 때문에 결국 대통령직을 배출해내는데 실패했지만 그래도 무시할만한 세력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2000년대 이후로 지역당에게 지지기반이 흡수당하고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야당이 세를 얻기 시작하며 중견정당으로 전락했고, 이후로 연립정당으로 연명하다가, 2014년 유로마이단 이후로 금지판결이 내려지면서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6] 특히 올리가르히 세력의 경우에는 쿠치마 정권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무시하기가 힘들었다.[7] 조지아 출신의 우크라이나 언론인으로, 2000년 인터넷 뉴스였던 《우크라이나의 진실(Українська правда)》을 창설하면서 정부 내 부패나 우크라이나 보안원(СБУ)의 고문 사건 등을 중점적으로 보도했다. 2000년 9월 16일 집으로 귀가 도중 납치된 뒤 두 달 뒤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다.[8] 유셴코 자신이 쿠치마 정권기에 총리직을 역임하기도 했으니 이러한 한계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9] 당장 대통령제가 가진 취약점을 이용해 권위주의적 정치를 펼친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과 블라디미르 푸틴,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카자흐스탄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롬 카리모프, 타지키스탄의 에모말리 라흐몬, 투르크메니스탄의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와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 아제르바이잔의 헤이다르 알리예프와 일함 알리예프 부자(父子), 그리고 옛 소련권 국가는 아니지만 1950~1980년대 대한민국의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등을 생각해보자. 발트 3국과 조지아, 아르메니아, 몰도바, 키르기스스탄 정도를 제외한 옛 소련권 국가 대부분이 독재로 흘러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우크라이나는 지금까지도 민주주의 공화정이 견제와 균형이라는 권력분립의 원리 하에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