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01 00:01:39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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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기아 엔터프라이즈 시절 정통성 논쟁3. 연고지 정착 미흡: 용인 현대모비스?4. 판정과 관련된 팬덤간의 시비

1. 개요

전신인 기아 엔터프라이즈 시절의 색깔 지우기와 관련되어 생긴 구설수들이 메인이다.

2. 기아 엔터프라이즈 시절 정통성 논쟁

모비스 농구단의 역사는 2001년 현대모비스가 기아자동차 농구단의 새 주인이 되면서 시작된다. 사실 모비스로 바뀌기 전에 이미 부산을 떠나 새 연고지인 울산으로 이전한 상태였다. 게다가 본래 단장이었던 김익환 이사와 부단장이었던 정재공 부단장이 KIA 타이거즈 창단 과정에서 전부 유출되는 바람에 프런트도 통째로 교체된 상황.

모비스로 바뀌고 맞이한 첫 해에는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의 마지막 멤버였던 강동희, 김영만 등 원래 기아의 주축 선수들과 박수교 감독을 그대로 안고 가며 시즌을 맞이했으나, 10위로 추락하고 말았다. 결국 프런트 고위층이 통째로 바뀐 상태였던 모비스 농구단은 2년간 부진했던 박수교 감독을 해임하고 새로운 감독을 물색했는데, 하필이면 데려온 감독이 프로에선 전혀 검증되지 않은 최희암이었다. 최희암은 연세대학교 감독 시절에는 꽤나 명성을 날렸으나 프로에서는 한번도 시험대에 오르지 않았던 것. 최희암은 모비스와 계약하면서 코치 선임은 자신이 결정한다는 조건을 고집했고, 이는 엄청난 평지풍파를 예고하게 된다.

최희암은 부임하자마자 자신의 입맛에 맞는 농구 지향과 리빌딩을 위해 프런트와 짝짜꿍하며 자신의 인맥 심기 및 기존 기아 왕조의 주축 선수들을 대폭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작업의 시작으로 KCC 농구단에서 기술 고문을 하던 72세의 고령인 이우재를 코치로 영입했고,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신의 대학 제자인 박승일을 전격적으로 코치로 임명했다. 그 후 1999-2000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여 전년도까지 모비스에서 코치를 하고 있던 김유택과는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사실상 내쫓은 셈)[1]

강동희, 김영만 역시 최희암과 프런트의 살생부를 피해갈 수 없었는데, 김영만의 경우는 "나 연봉 자진해서 삭감할 테니 팀에만 좀 남게 해주세요" 이라는 입장을 밝혔으나 구단은 이를 외면했고, 강동희 역시 최희암과 편먹고 자신을 퇴물 취급하는 구단 프런트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특히 강동희의 경우 기존에 기아 농구단과 FA 계약을 맺을 때 은퇴 후 유학+코치직 보장이라는 2가지 옵션을 제시받았고, 강동희는 이를 기분 좋게 수락하며 새로운 계약을 맺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팀이 바뀌어 버리고 새로 부임한 프런트는 "유학+코치진 보장? 그딴게 어딨어? 기아는 기아고 모비스는 모비스거든?" 라고 기존의 계약을 부정하며 대폭 삭감된 연봉을 제시했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역시나 감독이 최희암으로 바뀐 것도 있지만, 하필이면 그 밀약을 약속했던 기아 농구단 프런트 수뇌부들[2]이 기아자동차가 새로 인수한 KIA 타이거즈의 프런트로 옮겨가버렸던 것이었다.

결국 김영만은 훈련 불참을 선언했고 강동희 역시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뉴스기사

기아 왕조의 상징이었던 강동희, 김영만을 사실상 전력 외 취급해버린 최희암은 자신의 직속 제자들로 이 공백을 메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우-신세기 농구단을 거쳐 삼성의 문경은과 맞트레이드된 이후 문제가 되었던 수비와 더불어 공격에서도 제 몫을 하지 못했던 우지원과 SBS와 LG에서 리딩 가드 역할을 하던 오성식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던 것. 최희암은 구단에 이 둘의 영입을 강력히 요청하였고, 모비스 구단은 결국 강동희창원 LG 세이커스로 보내면서 오성식을 받았다. 그리고 당시 서울 SK 나이츠 소속이었던 서장훈이 FA 권리를 행사하여 서울 삼성 썬더스로 이적하게 되자 SK 구단은 보상선수로 우지원을 고른 다음 여기에다 1억을 추가하여 김영만과 맞교환하는 트레이드를 단행하게 된다.

그런데 자신의 제자들을 잔뜩 데려온 것만으로는 어째 불안했는지, 이번에는 전주 KCC 이지스와 3:3 트레이드를 하게 된다. 아무래도 오성식이건 우지원이건 2% 부족한 선수들이라고 생각하여 군 제대후 얼마 지나지 않았던 표명일, 프로 3년차 포워드 송태영, 기아 시절부터 뛰었던 공격력은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몸빵은 되었던 센터 김동언을 내주고 단신가드 김태진, 센터 구본근, 이상영을 데려온 것. 여담으로 구본근의 경우는 부상으로 조기 은퇴,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박승일 코치의 대타로 갑자기 코치로 선임되었다가[3] 현재는 매니저와 주무를 거쳐 모비스 농구단의 프런트 직원(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당연히 올드 기아 팬들이 주축이었던 모비스 팬들은 난리가 났다. 하루아침에 팀의 기둥이 뽑힌 격이었다.[4] 한마디로 새출발한답시고 "전통? 그게 뭐임? 개나 줘버리세여" 라는 태도로 일관하며 그 파급효과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 심지어 "그럼 관중도 연대 출신만 받지 그러냐" 라는 비아냥이 나왔을 정도였다. 그래도 최희암은 첫 해에 6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원주 TG에게 발리며 광탈, 그 다음 시즌에는 10위로 떨어지면서 사퇴하게 되었고 이는 대학농구 지도자들의 KBL 수난사의 시작이 된다.[5]

결국 농구대잔치 시절 7회 우승과 더불어 프로농구 원년 우승과 초창기 강호로 군림했던 기아 농구단은 사실상 맥이 끊기고 말았다. 2000년 은퇴와 동시에 영구결번 처리된 김유택의 등번호 14번은 지금도 영구결번으로 이어져 오고 있지만 정작 김유택은 단 한번도 모비스 소속으로 경기를 뛴 적이 없다. 그리고 모비스에서 팽 당한 강동희와 김영만의 등번호인 5번과 11번은 현재 아무나 막 쓰고 있다.[6] 게다가 우지원이 은퇴하면서 그의 등번호 10번이 모비스에서 영구결번이 되었다.[7]

그 때문에 과거 기아자동차 팬이었던 사람들 중 상당수는 모비스 농구단과 기아 농구단이 엮이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 한 마디로 후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8] 그 예로 인터넷 상에서 모비스와 기아를 엮는 기사가 나올 경우 "지랄하네..." 라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과거 기아자동차 팬이었던 사람들은 아예 농구를 보지 않거나, 다른 팀[9]을 응원하는 경우가 대부분. 가끔 위에 서술된 모비스와 기아를 엮는 기사에서 기아자동차 팬이었던 사람들과 우지원, 양동근이 스타로 발돋움한 뒤 유입된 팬들끼리 키배가 붙긴 하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농구 인기 자체가 워낙 시들한 탓에 그다지 크게 번지거나 주목 받지는 않고 있다.

어찌보면 이런 처사가 현재 한국의 프로농구 인기 하락에 가장 큰 공헌을 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농구팬들이 가장 불만인 것 중 하나가 팀의 이름과 연고지가 자주 바뀌는 것이었다. 덧붙이자면 2000년대 이후 모비스 팬의 대부분은 크리스 윌리엄스 - 양동근 조합이 완성되고 팀이 성적을 내기 시작하면서 유입된 경우가 많다.[10]

물론 공식적으로는 기아자동차 농구단을 계승한 팀이기에, 모비스의 홈 구장인 울산동천체육관에는 기아 엔터프라이즈의 첫 우승 엠블럼이 달려 있다.#

전형적인 감탄고토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구단 공홈의 연혁에 과거 팀의 이력을 싹 지워버린 팀들을 생각하면 모비스에게만 돌을 던지는 것이 과연 합당한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거기에 울산 현대모비스의 역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우승 시즌 유니폼 전시에서 (현재팀인 현대모비스의 엠블럼이 아닌) 우승 당시 팀이자 전신인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의 엠블럼을 박아넣은 성의가 보인다.(유니폼 6개중 제일 왼쪽) 하지만 인수 초기의 행보가 너무 거침 없었기에 올드팬들의 입장에서는 가슴앓이로 이어지고 만다.

3. 연고지 정착 미흡: 용인 현대모비스?

울산광역시로 연고지를 옮긴 지도 어느덧 20년이나 지났지만, 현대모비스는 클럽하우스를 비롯한 선수들의 숙식 및 비시즌 훈련을 모두 용인시에 있는 현대모비스 용인체육관에서 해결한다. '시즌 중'에는 울산 북구 양정동에 위치한 숙소에 머물기도 하지만, 이는 울산과 가까운 대구, 부산, 창원 지역 팀과 경기가 잡혀있을 때만 사용되고 있다. 즉, 비시즌에는 울산에 없고 용인에서 머무는 것이다. 이 팀의 연고지가 울산인 걸 생각해보면 용인 숙소와 완전히 주객전도가 되어버린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사실상 용인 현대모비스가 울산에 순회경기 뛰러 오는 거라는 소리가 나온다.[11]

이는 비단 현대모비스만의 문제는 아닌, 4대 프로 스포츠 리그 중 연고 이전이 밥 먹듯 일어나는 한국프로농구 자체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대모비스는 그 중에서도 가장 연고지 정착이 미흡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울산 지역 팬들 입장에서는 홈 경기를 제외하면 "이게 울산 팀/선수들이 맞는 건가?" 싶을 정도로 울산 내에서 현대모비스 선수들을 보기가 정말 힘들다. 실제로 울산에서 경기를 마치면 현대모비스 선수단은 곧바로 단체 버스를 타고 용인 클럽하우스로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듯 구단과 지역 팬들의 유대감이 없는 상태에서 그나마 관중을 불러 모을 수 있었던 성적마저 곤두박질치고, 비시즌에 울산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던 마케팅도 성적 부진 이후로 줄어들자, 지역 팬들은 미련 없이 떠나게 된 것이다.

울산 지역의 또다른 프로 스포츠 구단인 울산 현대와 비교되면서 더욱 비판받는다. 울산 현대는 연고지 밀착을 위해 흥행과 성적 모두 시원찮았던 시절부터 마케팅에 상당히 오랜 기간 공들여왔고, 클럽하우스도 당연히 울산에 있고, 선수단 전원이 울산에 거주하며, 현대중/현대고/울산대 등 지역 유소년 육성 시스템을 확립하여 시민들로부터 '울산 축구팀'이라는 인식이 확실하게 박혀 있다. 거기에 모기업인 HD현대 역시 국가대표급 선수 및 감독 영입에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구단의 높은 성적에 기여하고 있다. 이렇듯 모든 것이 선순환되니 어느덧 평균 유료관중이 1만 명은 가볍게 넘기는 상황에 이르렀다.

현대모비스와 울산시는 뒤늦게라도 연고지 정착을 위해 클럽하우스 이전 등을 논의하고 있지만 협의가 잘 이뤄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와중 KCC 이지스전주시와의 갈등 끝에 연고지를 부산광역시로 이전하자, 현대모비스와 울산시의 관계에 더욱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4. 판정과 관련된 팬덤간의 시비

2010년대 초반 당대 최고의 선수들이 3-peat를 구축하면서 현대모비스 팬들이 많이 늘었다. 팬덤이 커지다보니 그 부작용도 무시할 수 없었는데, 최근 문제로 거론되는 것이 유재학, 양동근에 대한 신격화 내지는 무차별적 찬양 및 과도한 실드로, 이것 때문에 안티팬을 늘리는 수준을 뛰어넘어 거의 공공의 적으로까지 몰리는 경우가 심심찮게 발생한다. 뭐 유재학의 경우는 KBL이나 국제 대회에서도 좋은 커리어를 보여준 것도 있고, 모래반지 빵야빵야라던지 전준범이나 민국이 관련 개그짤의 비중도 커서 안티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덜하고 농담조 선에서 끝나기는 한다.[12] 사실 이 극성팬들이 일으키는 더한 문제는 선수들에 대한 맹목적인 실드다. 물론 현대 프로스포츠의 특성상 좋은 성적을 내는 클럽의 팬들이 어그로를 끄는 건 국가, 리그, 종목을 불문하고 자주 볼 수 있는 일이다.

대표적인 예로 함지훈의 모빙스크린, 함꿈치 논란, 양동근의 티타임[13] 논란, 꼰대질 사건을 비롯하여 현대모비스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14] 등이 있다. 이런 플레이가 나올 경우 대부분 상대팀에게 불리한 판정이 수반되는 이른바 몹판 논란과 이 행위에 대하여 현대모비스 팬들이 하는 육탄방어 수준의 맹목적인 실드 탓에 타팀팬들의 불만이 매우 크다. 이런 악성 팬덤들을 가리키는 모원파라는 별명이 몇 년 전부터 고착화되었다는 것은 팀 이미지 측면에서도 좋은 현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1] 이후 김유택은 모교인 명지고등학교에서 감독을 맡게 된다.[2] 김익환 단장 및 정재공 부단장 겸 사무국장. 이들은 KIA 타이거즈의 초대 대표이사와 단장으로 부임했다.[3] 둘은 초,중,고,대학까지 선후배다.[4] 야구로 예를 들자면 해태 타이거즈의 선동열, 이종범, 이대진같은 선수들이 하루아침에 다른 팀으로 쫓겨나고 그 자리를 다른 팀 프랜차이즈 선수들이 메꾼다고 생각하면 된다.[5]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하위로 떨어진 2003-04 시즌 전주 KCC 이지스와의 트레이드에서 외국인 선수 R.F. 바셋과 바꾼 1순위 지명권으로 양동근을 지명한 것. 여기에 전자랜드를 4강에 올린 유재학 감독을 영입하면서 재건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6] 다만 강동희의 경우는 2013년 3월 7일부로 2010-11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4차례 승부조작을 한 것이 드러나 구속영장이 신청되었으므로 오히려 신의 한 수가 되어버렸다. 자세한 내용은 강동희 혹은 2013년 프로농구 승부조작 사건 참조.[7] 후일 이상민이 삼성에서 영구결번을 받으면서 비슷한 풍경이 나오고 만다.[8] 어찌보면 해태 타이거즈와 KIA 타이거즈의 정통성 논쟁과 비슷할 수도 있다. 그래도 KIA는 양반인게, 팀 명칭과 연고지, 상징 색깔, 프런트, 코치진 등이 해태 타이거즈 시절에서 큰 변화가 없었다. 또한 이종범(해태 출신이지만 일본에 있다가 KIA로 컴백한 케이스), 이대진, 김종국, 장성호 같은 선수들이 오래 있어서 해태의 후신이라는 느낌이 있지만 이쪽은 아예 전통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심각한 예로 기아 농구단 말년에 신인급 선수였던 하상윤이 유일하게 2011년까지 살아남아 모비스 선수로 은퇴했다는 이유로 팬들은 반 농담삼아 하상윤이 기아-모비스의 프랜차이즈 선수라고 얘기한다.[9] 부산 kt 소닉붐으로 넘어간 예가 가장 많다. 전신팀인 기아 엔터프라이즈부터가 부산 연고기도 해서 그 외엔 허재 이적 이후로 실업 시절 기아자동차의 주축이기도 했던 중앙대 라인이 재결성된 원주 DB 프로미 정도.[10] 그런데 아주 가끔 과거 기아자동차 시절부터 현재의 모비스까지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현 감독인 유재학이 기아자동차의 초기 황금시대를 이끌기도 했었다.[11] 아닌 게 아니라 현대모비스 구단 측에서 비시즌 기간 중 울산에서 훈련한 영상을 올리며 울산 전지훈련이란 표현을 썼다. # 연고지에 개의치 않는 모비스 팬들이라면 별 감흥이 없겠지만, '울산' 모비스 팬들에겐 씁쓸한 장면.[12] 함지훈 테이프 사건, 김수찬 꿀밤 사건, 미디어데이의 노잼벗 등 비판이 있긴 있다.[13] 승부가 갈린 4쿼터 막판 시점에 더 이상 경기를 진행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 사실 이건 모비스 팬들 사이에서도 약간 논란이 있다.[14] 최근 몇 시즌 동안 이런 부상 유발 위험이 큰 플레이들을 주전급 선수들도 자행한다는 점에서 안티팬들 증가에 큰 영향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