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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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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L 챔피언 결정전 우승 반지
1997(선수) 2008(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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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84 시즌 1984-85 시즌 1985-86 시즌 1986-87 시즌 1987-88 시즌
이충희
현대전자 / 가드, 포워드
임정명
삼성전자 / 센터
이충희
현대전자 / 가드, 포워드
박수교
현대전자 / 가드
김현준
삼성전자 / 가드
1988-89 시즌 1989-90 시즌 1990-91 시즌 1991-92 시즌 1992-93 시즌
유재학
기아산업 / 가드
한기범
기아산업 / 센터
정덕화
기아자동차 / 포워드
허재
기아자동차 / 가드
강동희
기아자동차 / 가드
1993-94 시즌 1994-95 시즌 1995-96 시즌 1996-97 시즌 1997-98 시즌
서장훈
연세대학교 / 센터
허재
기아자동차 / 가드
김유택
기아자동차 / 센터
서장훈
연세대학교 / 센터
서장훈
연세대학교 / 센터
1998 시즌 1999-2000 시즌 2000 시즌 2001-02 시즌 2002-03 시즌
조우현
중앙대학교 / 포워드
김주성
중앙대학교 / 포워드, 센터
김주성
중앙대학교 / 포워드, 센터
현주엽
상무 / 포워드
김동우
연세대학교 / 포워드
2003 시즌 2004 시즌 2005 시즌 2006 시즌 2007 시즌
방성윤
연세대학교 / 포워드
전정규
연세대학교 / 가드, 포워드
박지현
상무 / 가드
허효진
중앙대학교 / 포워드
강병현
중앙대학교 / 가드
2008 시즌 2009 시즌 2010 시즌 2011 시즌 2012 시즌
양동근
상무 / 가드
유병재
상무 / 포워드
양희종
상무 / 포워드
함지훈
상무 / 포워드, 센터
박재현
고려대학교 / 가드
2013 시즌 2014 시즌 2015 시즌 2016 시즌 2017 시즌
윤호영
상무 / 포워드
이정현
상무 / 가드
김시래
상무 / 가드
최부경
상무 / 포워드, 센터
이승현
상무 / 포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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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국내선수 M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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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997 시즌 1997-98 시즌 1998-99 시즌 1999-2000 시즌 2000-01 시즌
강동희
기아 / 가드
이상민
현대 / 가드
이상민
현대 / 가드
서장훈
SK / 센터
조성원
LG / 포워드
<rowcolor=#ffffff> 2001-02 시즌 2002-03 시즌 2003-04 시즌 2004-05 시즌 2005-06 시즌
김승현
동양 / 가드
김병철
동양 / 가드
김주성
TG삼보 / 포워드
신기성
TG삼보 / 가드
서장훈, 양동근
삼성 / 센터, 모비스 / 가드
<rowcolor=#ffffff> 2006-07 시즌 2007-08 시즌 2008-09 시즌 2009-10 시즌 2010-11 시즌
양동근
모비스 / 가드
김주성
동부 / 포워드
주희정
KT&G / 가드
함지훈
모비스 / 포워드
박상오
kt / 포워드
<rowcolor=#ffffff> 2011-12 시즌 2012-13 시즌 2013-14 시즌 2014-15 시즌 2015-16 시즌
윤호영
동부 / 포워드
김선형
SK / 가드
문태종
LG / 포워드
양동근
모비스 / 가드
양동근
모비스 / 가드
<rowcolor=#ffffff> 2016-17 시즌 2017-18 시즌 2018-19 시즌 2019-20 시즌 2020-21 시즌
오세근
KGC / 센터
두경민
DB / 가드
이정현
KCC / 가드
허훈
kt / 가드
송교창
KCC / 포워드
<rowcolor=#ffffff> 2021-22 시즌 2022-23 시즌 2023-24 시즌 2024-25 시즌 2025-26 시즌
최준용
SK / 포워드
김선형
SK / 가드
이선 알바노
DB / 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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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M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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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f2023,#ddd
1997 시즌 1997-98 시즌 1998-99 시즌 1999-2000 시즌 2000-01 시즌
강동희
기아 / 가드
허재
기아 / 가드
조성원
현대 / 포워드
서장훈
SK / 센터
주희정
삼성 / 가드
2001-02 시즌 2002-03 시즌 2003-04 시즌 2004-05 시즌 2005-06 시즌
마르커스 힉스
동양 / 포워드
데이비드 잭슨
TG / 가드
이상민
KCC / 가드
김주성
TG삼보 / 포워드
강혁
삼성 / 가드
2006-07 시즌 2007-08 시즌 2008-09 시즌 2009-10 시즌 2010-11 시즌
양동근
모비스 / 가드
김주성
동부 / 포워드
추승균
KCC / 포워드
함지훈
모비스 / 포워드
하승진
KCC / 센터
2011-12 시즌 2012-13 시즌 2013-14 시즌 2014-15 시즌 2015-16 시즌
오세근
KGC / 센터
양동근
모비스 / 가드
문태영
모비스 / 포워드
양동근
모비스 / 가드
이승현
오리온 / 포워드
2016-17 시즌 2017-18 시즌 2018-19 시즌 2019-20 시즌* 2020-21 시즌
오세근
KGC / 센터
테리코 화이트
SK / 가드
이대성
현대모비스 / 가드
제러드 설린저
KGC / 포워드
2021-22 시즌 2022-23 시즌 2023-24 시즌 2024-25 시즌 2025-26 시즌
김선형
SK / 가드
오세근
KGC / 센터
* 2019-20 시즌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플레이오프 미개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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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M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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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f2023,#ddd
<rowcolor=#fff> 1997 시즌 1997-98 시즌 1998-99 시즌 1999-2000 시즌 2000-01 시즌
제럴드 워커
SBS / 가드
강동희
기아 / 가드
워렌 로즈그린
나산 / 포워드
워렌 로즈그린
신세기 / 포워드
아티머스 맥클래리
삼성 / 포워드
<rowcolor=#fff> 2001-02 시즌 2002-03 시즌 2003-04 시즌 2004-05 시즌 2005-06 시즌
안드레 페리
삼보 / 포워드, 센터
마르커스 힉스
동양 / 포워드
문경은
전자랜드 / 포워드
찰스 민렌드
KCC / 포워드
서장훈
삼성 / 센터
<rowcolor=#fff> 2006-07 시즌 2007-08 시즌 2008-09 시즌 2009-10 시즌 2010-11 시즌
조상현
LG / 포워드
김주성
동부 / 포워드
이동준
오리온스 / 포워드
이승준
삼성 / 포워드, 센터
김효범
SK / 가드
<rowcolor=#fff> 2011-12 시즌 2012-13 시즌 2013-14 시즌 2014-15 시즌 2015-16 시즌
문태영
LG / 포워드
후안 파틸로
KGC / 포워드
김선형
SK / 가드
김선형
SK / 가드
김선형
SK / 가드
<rowcolor=#fff> 2016-17 시즌 2017-18 시즌 2018-19 시즌 2019-20 시즌 2020-21 시즌
오세근
KGC / 센터
디온테 버튼
DB / 포워드
마커스 랜드리
kt / 포워드
김종규
DB / 센터
-[a]
<rowcolor=#fff> 2021-22 시즌 2022-23 시즌 2023-24 시즌 2024-25 시즌 2025-26 시즌
허웅
DB / 가드
하윤기
kt / 센터
자밀 워니
SK / 센터
[a]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으로 인한 미개최
}}}}}}}}}}}}}}} ||

{{{#!wiki style="margin: -5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1658><tablebgcolor=#001658> 파일:한국농구연맹 로고 화이트.svgKBL
역대 모범선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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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f2023,#ddd
<rowcolor=#fff> 1997 시즌 1997-98 시즌 1998-99 시즌 1999-2000 시즌 2000-01 시즌
김병철
동양 / 가드
조성원
현대 / 포워드
김훈
대우 / 포워드
강동희
기아 / 가드
추승균
현대 / 포워드
<rowcolor=#fff> 2001-02 시즌 2002-03 시즌 2003-04 시즌 2004-05 시즌 2005-06 시즌
임재현
SK / 가드
허재
TG / 가드
황진원
SK / 가드
강혁
삼성 / 가드
현주엽, 크리스 윌리엄스
LG / 포워드, 모비스 / 포워드
<rowcolor=#fff> 2006-07 시즌 2007-08 시즌 2008-09 시즌 2009-10 시즌 2010-11 시즌
양동근, 자밀 왓킨스
모비스 / 가드, 동부 / 센터
강대협, 키나 영
동부 / 가드, 모비스 / 포워드
주희정, 브라이언 던스톤
KT&G / 가드, 모비스 / 센터
윤호영, 브라이언 던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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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현, 허버트 힐
KCC / 가드, 전자랜드 / 센터
<rowcolor=#fff> 2011-12 시즌 2012-13 시즌 2013-14 시즌 2014-15 시즌 2015-16 시즌
김선형
SK / 가드
임재현
KCC / 가드
조성민
kt / 가드
오용준
kt / 포워드
주희정
삼성 / 가드
<rowcolor=#fff> 2016-17 시즌 2017-18 시즌 2018-19 시즌 2019-20 시즌 2020-21 시즌
김영환
LGkt / 포워드
최부경
SK / 포워드
양동근
현대모비스 / 가드
함지훈
현대모비스 / 포워드
정영삼
전자랜드 / 가드
<rowcolor=#fff> 2021-22 시즌 2022-23 시즌 2023-24 시즌 2024-25 시즌 2025-26 시즌
허훈
kt / 가드
정창영
KCC / 가드
정성우
kt / 가드
}}}}}}}}}}}}}}} ||

{{{#!wiki style="margin: -5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1658><tablebgcolor=#001658> 파일:한국농구연맹 로고 화이트.svgKBL 1997~2000
월간 M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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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bottom: -10px"
{{{#1f2023,#ddd
<rowcolor=#fff> 1월 2월
1997 시즌
강동희
기아
정재근
SBS
<rowcolor=#fff> 11월 12월 1월 2월
1997-1998 시즌
문경은
삼성
제이슨 윌리포드
나래
김영만
기아
김병철
동양
1998-1999 시즌
주희정
삼성
허재
나래
김영만
기아
이상민
현대
1999-2000 시즌
주희정
삼성
허재
나래
김영만
기아
이상민
현대
}}}}}}}}}}}}}}} ||

{{{#!wiki style="margin: -5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1658><tablebgcolor=#001658> 파일:한국농구연맹 로고 화이트.svgKBL 1997~2000
베스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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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bottom: -10px"
{{{#1f2023,#ddd
<rowcolor=#fff> 가드 가드 포워드 포워드 센터
1997 시즌
강동희
기아
제럴드 워커
SBS
정재근
SBS
전희철
동양
제이슨 윌리포드
나래
1997-1998 시즌
이상민
현대
강동희
기아
문경은
삼성
조니 맥도웰
현대
키넌 조던
동양
1998-1999 시즌
이상민
현대
강동희
기아
김영만
기아
조니 맥도웰
현대
서장훈
SK
1999-2000 시즌
강동희
기아
조성원
현대
허재
삼보
조니 맥도웰
현대
서장훈
SK
}}}}}}}}}}}}}}} ||

{{{#!wiki style="margin: -5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1658><tablebgcolor=#001658> 파일:한국농구연맹 로고 화이트.svgKBL 2000~2005
베스트 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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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bottom: -10px"
{{{#1f2023,#ddd
<rowcolor=#fff> 가드 가드 포워드 포워드 센터
2000-2001 시즌
주희정
삼성
강동희
기아
조성원
LG
아티머스 맥클래리
삼성
재키 존스
SK
2001-2002 시즌
김승현
동양
이상민
KCC
문경은
빅스
마르커스 힉스
동양
서장훈
SK
2002-2003 시즌
강동희
LG
김병철
동양
김주성
TG
마르커스 힉스
동양
서장훈
삼성
2003-2004 시즌
김승현
오리온스
이상민
KCC
김주성
TG삼보
찰스 민렌드
KCC
서장훈
삼성
2004-2005 시즌
김승현
오리온스
신기성
TG삼보
현주엽
KTF
김주성
TG삼보
서장훈
삼성
}}}}}}}}}}}}}}} ||

{{{#!wiki style="margin: -5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1658><tablebgcolor=#001658> 파일:한국농구연맹 로고 화이트.svgKBL
역대 어시스트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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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1f2023,#ddd
<rowcolor=#fff> 1997 시즌 1997-98 시즌 1998-99 시즌 1999-2000 시즌 2000-01 시즌
강동희
기아 / 7.3개
강동희
기아 / 6.8개
이상민
현대 / 7.9개
강동희
기아 / 7.7개
강동희
기아 / 8.5개
<rowcolor=#fff> 2001-02 시즌 2002-03 시즌 2003-04 시즌 2004-05 시즌 2005-06 시즌
김승현
동양 / 8개
황성인
SK / 7.9개
김승현
오리온스 / 8.1개
김승현
오리온스 / 10.5개
김승현
오리온스 / 9.4개
<rowcolor=#fff> 2006-07 시즌 2007-08 시즌 2008-09 시즌 2009-10 시즌 2010-11 시즌
주희정
KT&G / 8개
주희정
KT&G / 7.3개
주희정
KT&G / 8.3개
주희정
SK / 6.1개
양동근
모비스 / 5.5개
<rowcolor=#fff> 2011-12 시즌 2012-13 시즌 2013-14 시즌 2014-15 시즌 2015-16 시즌
크리스 윌리엄스
오리온스 / 6개
전태풍
오리온스 / 6.1개
김태술
KGC / 5.5개
이현민
오리온스 / 5.3개
양동근
모비스 / 5.6개
<rowcolor=#fff> 2016-17 시즌 2017-18 시즌 2018-19 시즌 2019-20 시즌 2020-21 시즌
박찬희
전자랜드 / 7.4개
김시래
LG / 6.5개
박찬희
전자랜드 / 5.7개
허훈
kt / 7.2개
허훈
kt / 7.5개
<rowcolor=#fff> 2021-22 시즌 2022-23 시즌 2023-24 시즌 2024-25 시즌 2025-26 시즌
김시래
삼성 / 5.8개
김선형
SK / 6.8개
이정현
소노 / 6.6개
}}}}}}}}}}}}}}} ||

{{{#!wiki style="margin: -5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1658><tablebgcolor=#001658> 파일:한국농구연맹 로고 화이트.svgKBL
역대 감독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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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1f2023,#ddd
<rowcolor=#fff> 1997 시즌 1997-98 시즌 1998-99 시즌 1999-2000 시즌 2000-01 시즌
최인선
기아
신선우
현대
신선우
현대
최종규
삼보
김동광
삼성
<rowcolor=#fff> 2001-02 시즌 2002-03 시즌 2003-04 시즌 2004-05 시즌 2005-06 시즌
김진
동양
김진
동양
전창진
TG삼보
전창진
TG삼보
유재학
모비스
<rowcolor=#fff> 2006-07 시즌 2007-08 시즌 2008-09 시즌 2009-10 시즌 2010-11 시즌
유재학
모비스
전창진
동부
유재학
모비스
전창진
kt
전창진
kt
<rowcolor=#fff> 2011-12 시즌 2012-13 시즌 2013-14 시즌 2014-15 시즌 2015-16 시즌
강동희
동부
문경은
SK
김진
LG
유재학
모비스
추승균
KCC
<rowcolor=#fff> 2016-17 시즌 2017-18 시즌 2018-19 시즌 2019-20 시즌 2020-21 시즌
김승기
KGC
이상범
DB
유재학
현대모비스
이상범
DB
전창진
KCC
<rowcolor=#fff> 2021-22 시즌 2022-23 시즌 2023-24 시즌 2024-25 시즌 2025-26 시즌
전희철
SK
김상식
KGC
김주성
DB


}}}}}}}}}}}}}}} ||

강동희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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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703c><tablebgcolor=#00703c> 파일:원주 DB 프로미 엠블럼(흰색).svg원주 DB 프로미
역대 감독
(나래-삼보-TG
TG삼보-동부 시절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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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000000,#e5e5e5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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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72C,#d3dade
<rowcolor=#ECCC2B> 초대 2대 3대
최명룡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7~1999)
최종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9~2001)
감독 대행
김동욱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1)
김동욱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1)
감독 대행
전창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1~2002)
<rowcolor=#fff>
4대
5대 6대
전창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2~2009)
강동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9~2013)
감독 대행
김영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3)
이충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3~2014)
감독 대행
김영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4)
<rowcolor=#fff> 7대 8대 9대 파일:동부화재 프로미 로고.png
김영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4~2017)
이상범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7~2023)
감독 대행
김주성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3)
김주성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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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모비스 오토몬스 등번호 5번
팀 창단 강동희
(1997~2002)
정인교
(2002~2003)
창원 LG 세이커스 등번호 5번
박규현
(2002)
강동희
(2002~2004)
황성인
(2004~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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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희
姜東熙 | Kang Dong-Hee
파일:실망한 표정의 강동희.jpg
출생 1966년[1] 12월 20일 ([age(1966-12-20)]세)
경기도 수원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진주 강씨
학력 인천송림초등학교 (졸업)
송도중학교 (졸업)
송도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학사)
병역 상무 농구단 (1990~1991)[2]
종교 개신교
포지션 포인트 가드
신체 신장 180cm|체중 95kg|혈액형 O형[3]
프로 입단 1990년 기아자동차 농구단 입단
현역 시절 등번호 5
소속 구단 기아자동차/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울산 모비스 오토몬스 (1990~2002)
창원 LG 세이커스 (2002~2004)
국가대표 올림픽 1회 (1996)
FIBA 세계선수권 3회 (1990,1994,1998)
아시안게임 3회 (1990,1994,1998)
FIBA 아시아선수권 6회 (1989[4] ~ 1999[5])
지도자 창원 LG 세이커스 코치 (2004~2005)
원주 동부 프로미 수석코치 (2005~2009)
원주 동부 프로미 감독 (2009~2013)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가족관계 보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fffff><colcolor=#000000> 배우자 이광선(1972년생, 2004년 결혼)
자녀 아들 강성욱(2004년생)[6]
아들 강민수(2006년생)
가족 부모님, 1남 2녀 중 셋째
}}}}}}}}} ||

1. 개요2. 프로 기록 및 수상기록3. 생애
3.1. 대학 시절3.2. 선수 시절3.3. 선수 생활 말년3.4. 국가대표
4. 플레이 스타일5. KBL 기록6. 지도자 생활
6.1. 코치 시절6.2. 감독 시절
6.2.1. 통산 감독 성적
7. 승부조작8. 이후
8.1.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검찰 기소8.2. 2억원대 법인 자금 횡령 혐의로 인한 피소8.3. 피트 로즈와의 비교
9. 이모저모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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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농구선수 출신이자 전 감독. 포지션은 포인트가드. 나이가 들어 프로에 와서도 베스트 5에 선정될 정도로 실업-프로 내내 좋은 활약을 펼쳤고, 감독으로도 성공적으로 커리어를 이어갔었다.

2. 프로 기록 및 수상기록[7]

정규 시즌
336경기 11.13점 2.79리바운드 6.55어시스트 1.70스틸 FG 47.22% 3P 40.50% FT 76.57% TS 60.1% eFG 58% PER 16.93

플레이오프
41경기 12.68점 2.17리바운드 4.10어시스트 1.51스틸 FG 47.87% 3P 40.10% FT 78.30% TS 60.7% eFG 57% PER 12.80

챔피언 결정전
17경기 15.71점 3.65리바운드 4.88어시스트 1.94스틸 FG 46.60% 3P 38.18% FT 73.44% TS 60.7% eFG 57% PER 15.99

3. 생애

3.1. 대학 시절

1남 2녀 중 셋째인데,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농구를 했다. 키도 농구선수가 되기엔 그리 큰 편이 아니라서 송도중학교 때는 농구부에서 밀려나서 일반 학생이 되었다. 이 때만 해도 꿈은 평범한 체육 교사였다고 한다. 그런데 송도고로 진학하고 송도고 농구부의 대부였던 전규삼 옹이 강동희의 팔 길이를 보고 농구부로 다시 부르면서 농구 선수로서의 삶을 이어가게 되었는데 이때는 '체육관에서 밤을 새면 성공한다' 는 말에 진짜 체육관에서 밤을 샜었다.

한국의 대표 가드를 모두 키운 전규삼 옹의 지도 아래 실력은 일취월장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졸업 무렵에는 모든 대학교에서 탐내는 고교 랭킹 1위의 가드가 되었다. 강동희의 진로를 두고 스카우트 전쟁이 벌어진 것은 당연했는데, 원래는 꼭 중앙대학교에 갈 마음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규삼 옹이 "호랑이(허재)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라"고 조언하는 바람에 그대로 중앙대로 입학했다고.(1986년 입학)

재학 시절에는 정봉섭 감독 밑에서 수행을 거쳐 처음에는 김유택, 강정수, 허재와 같은 선배들을 보좌하는 역할이었다. 김유택, 한기범, 강정수가 포진해했던 중앙대는 허재가 입학한 뒤부터 현대, 삼성과 삼강 구도를 이루었고 강동희가 입학하기 전에도 대학팀 최초로 농구대잔치 결승전에 진출하는 등 막강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강동희가 입학한 해에도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편파 판정과 폭력 수비 등으로 현대에게 패배. 이들이 차례차례 졸업할 무렵에는 혼자 팀을 이끌면서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혼자서 활약할 당시에는 어시스트보다는 득점에도 주력하며 득점력도 갖춘 포인트 가드임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역시 대학 졸업 무렵의 진로를 두고 고민이 컸는데, 중앙대로 처음 올 때 고민한 것처럼 기아자동차로 가는 것에 대해 고민이 심했다고 한다. 선배들이 많아서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보일 기회가 있을지 고민한 것. 현대와 삼성에서 기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스카우비를 내세웠었지만[8] 중앙대 정봉섭 감독과 기아자동차 선배들의 설득으로 기아자동차로 가게 되었다. 강동희는 현대나 삼성에 가지 않아 금전적으로 손해본 것에 속쓰려 했지만 기아로 가게 되면서 국내 농구계에 큰 획을 그은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3.2. 선수 시절

파일:attachment/500hdt_0.jpg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트리오의 사진

이미 김유택한기범이 지키는 골밑에 더해 허재가 이끄는 가드진이 강했던 기아자동차는 농구대잔치 2년 연속 우승을 하고 있었고, 센터 김유택과 포인트 가드 유재학이 불참했던 시즌에도 우승을 할만큼 막강한 전력이었다.[9] 그러다 강동희가 입단하게 되었고 중앙대 시절처럼 공격보다는 어시스트에 주력하는 포인트 가드가 되었다.[10] 처음 참가했던 대회는 1990년도 봄에 열린 코리안 리그였으며 같은 해 7월 군에 입대하여 이듬해 1월 초까지는 상무에서 뛰었다.[11] 상무에서 제대한 뒤에는 다시 기아자동차에 합류하였다.

송곳같은 패스로 팀메이트들에게 득점을 연결시켜 줬지만 게임 리딩 능력은 다소 부족해 허재와 게임 리딩을 나눠 봤었다.[12] 스포트라이트는 가장 화려했던 허재가 주로 받았지만, 강동희 역시 이에 뒤쳐지지 않는 활약을 보였다. 팀에서 가장 빛났던 세 선수의 이름을 따서 흔히 허-동-택 트리오라고 부르는 강력한 전설이 태동한 것이다.

대신 부수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워낙 전력이 막강하다 보니 노력을 대충해도 이겼다는 거. 강동희 자신도 말술로 유명하고, 허재의 술이야 뭐 사고로 너무너무 유명했다. 그런데도 이겼다. 자연히 나태해 질 수밖에 없던 것. 농구대잔치 5연패를 해버리니 자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연세대학교를 위시한 대학세의 돌풍이 불어닥친 1990년대 초반에 자연히 해결되었다. 기아자동차는 1993-94 농구대잔치에서 그들의 직속 후배 격인 중앙대학교에 8강에서 지는 수모를 당한다. 정신차린 그들은 곧바로 1994-95, 1995-96 시즌을 모두 우승하면서 위력을 과시했다. 어쨌거나 강동희는 허재, 김유택에 비해서는 사생활이 깨끗했고[13] 그래서 덜 까였다. 그리고 화려했던 농구대잔치를 기반삼아 1997년에 프로가 생길 때, 가장 영향을 안 받은 포지션은 외국인 선수에게 볼 배급을 하는 포인트 가드였다.

외국인 선수의 도입으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노쇠 기미가 보이던 김유택은 벤치멤버가 되었다. 포워드 자리에는 선배 못지 않은 김영만이 보강되었다. 허재최인선 감독과의 불화로 일부 경기에 출전을 하지 못할 때, 강동희는 팀의 주축으로 프로 원년인 1997시즌에 맹활약했다. 평균 15.6득점, 7.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고, 프로 초대 어시스트왕 및 MVP에 올랐다. 이 활약은 챔피언결정전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평균 18점을 넣으며, 역시 초대 챔피언결정전 MVP에 올랐다.

허재가 결국 팀을 떠나 원주 나래로 이적했고, 김유택이 1999-2000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뒤에도 기아의 구심점으로 계속 남아 활약했다. 1997-98 시즌 올스타전 MVP, 기아 소속으로 어시스트 1위 4회. 1998-1999 시즌 이후로 기아 엔터프라이즈는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지만 강동희는 패배를 거듭하면서도 팀 내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 이대로만 가면 누가 보더라도 기아의 전설로 은퇴할 것이 확실했다.

3.3. 선수 생활 말년

모기업 기아자동차가 부도가 난 후, 우여곡절 끝에 현대자동차로 인수되었고, 현대차 그룹은 스포츠단의 교통정리에 들어가 기아자동차 농구단을 모비스로 이관시킨다. 그래서 모비스 소속이 된 상황에서 새롭게 부임한 감독은 바로 연세대의 대부 격인 최희암이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설마 강동희를 어떻게 하겠냐는 예상은 기아 색채 빼기에 들어가면서 보기 좋게 빗나갔다.

김영만우지원과 트레이드되었고, 입지가 좁아진 강동희도 결국 트레이드 시장에 나와 오성식과 트레이드되면서 졸지에 창원 LG 세이커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원래 팀과 재계약을 맺으면서 코치 보장을 했던 조건은 휴지조각이 되었고, 강동희는 그렇게 배신감을 안고 팀을 떠나야 했다. 물론 우지원과 오성식은 최희암이 대학시절 지도했던 선수들이었다.

비록 기량은 전성기에 미치지 못했지만 LG에는 마침 중앙대 출신 선수들이 많아서 적응하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던 데다 활약도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다만 2003-04 시즌 후 구단측에서 은퇴를 종용했고, 1년 더 뛰고 싶어했던 바람과 달리 은퇴를 선언하였다.[14] 여기에 LG 구단은 그의 등번호 5번을 영구결번한다고 발표했다가 슬쩍 취소되었고, 모비스는 아예 기아자동차를 지웠기 때문에 어느 구단에도 결번되지 않았으며 몇년 뒤에는 승부조작으로 인해 구속영장이 신청됨으로서 오히려 이것이 신의 한 수가 되어버렸다.

3.4. 국가대표

중앙대학교 시절에 처음 국가대표로 발탁된 이후, 강동희는 꾸준히 주전 포인트가드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물론 강동희가 국가대표로 한국의 우승을 이끈 적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강동희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한국 농구는 중국에 가로막혀 아시아권에서 만년 2위에 머물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이 때만 해도 중국과 상대할 유일한 호적수는 한국이었고, 2000년대 후반처럼 서남아시아의 이란, 요르단, 레바논에게까지 밀리지는 않던 시기였다.

국가대표로도 강동희는 거의 비슷한 활약을 펼쳤고 이렇다 할 사고 없이 국가대표에서 꾸준히 뛰었다. 음주 파동으로 국가대표 농구팀이 제대로 욕을 얻어 먹은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도 어시스트와 스틸에서 괜찮은 활약을 보이며, 한국 대표팀을 대표해 그의 유니폼이 세계농구협회에 전시되어 있고, 1997년 아시아농구선수권 대회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며, 베스트 플레이 메이커 상을 타기도 했다. 이 때, 국가대표팀은 28년만의 우승에 성공했다.

전반적으로 딱 실업 팀에서의 모습 그대로 활약한 편이고, 포인트가드 포지션에서 부동의 주전으로 활약했지만, 아무래도 중국의 벽을 넘기에는 다소 역부족이었다고 평할 수 있다.

4. 플레이 스타일

강동희 플레이의 특징은 기본기가 탄탄했다는 점에 있다. 송도고 시절 전규삼 옹의 지도 아래 갈고 닦은 기본기는 팔이 긴 신체적인 특징과 만나면서 축복이 되었다. 긴 팔은 수비에 도움이 되었고[15], 공격에서는 한 발 더 빠른 패스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런 타고난 신체 조건 때문에 성공한 선수는 결코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강동희는 원래 농구를 못 할 뻔했던 선수다.

타고난 유연성에서 나오는 테크닉은 당대 으뜸가는 수준이었다. 그의 특기는 무빙 점프슛인데, 이는 아시아 최고라는 중국의 강력한 수비망을 무력화시켰다. 드리블, 슈팅, 패스 등 선수가 갖춰야 할 기본기에서 아직도 강동희 만한 선수를 찾기는 힘들다.

포인트 가드로서의 패싱과 경기 조율에 굉장히 능했는데 그 이상민이 최전성기 때에도 6살 많은 노장 강동희를 넘지 못해서 어시스트 1위를 매번 빼았겼을 정도다. 강동희는 기아 왕조의 몰락 이후 눈물나는 전력으로 패스를 해줘도 받아 먹지 못하는 팀을 이끌고 있었고 이상민은 현대 왕조의 전성기 였음에도 이랬다.

파워풀한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선수는 아니다.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상황에 맞춰 경기를 풀어나가는 유연성이 더 뛰어났던 선수다. 부드러운 움직임과 모르고 못 막는(알고도 못 막는 것이 아니라!) 패스와 상황을 읽어내는 능력으로 공격을 진두지휘했다. [16] 이런 유연성은 상황에 맞춰, 동료에 맞춰 딱딱 패스를 내주며 강동희를 코트 최고의 야전사령관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덤으로 상당히 강력했던 3점슛까지. 여담으로, 강동희의 3점슛은 그 궤적이 매우 높게 올라가 수비수가 블록하기 상당히 까다로웠다. 경기 중 패스할 곳이 여의치 않거나 혹은 기습적으로 8m 이상 거리에서 장거리 3점슛을 던지곤 했는데 성공률이 상당히 높았다.

특히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다리도 빨라 속공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신중한 성격으로 경기를 유연하게 풀어나가는 강동희지만, 속공을 만들어 낼 때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이를 풀어나가는 선수였다. 침착한 성격 때문에 승부사로서 어울리는 것은 아니라는 평도 있었지만, 승부사 역할은 허재가 거의 도맡았고 강동희는 아예 승부사가 필요없는 순간도 만들어 내는 선수였다.

후배 선수인 양동근이 선배인 이상민, 김승현 등과 비교해서 자기 공격에 치중하고 패스는 나중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 그 이상민도 강동희와 비교 돼서 자기 공격에 치중하고 패스는 뒷전이라는 비판을 받았을 정도.[17][18]

처음부터 어시스트에 특화된 선수는 아니였고 패스를 연마하게 된 시기를 용병제도가 들어오면서부터라고 말했다. 그 전까지는 좋은 슈팅과 가드면서도 긴팔과 힘으로 골밑도 공략하면서 내외각이 가능한 공격형 가드였다. 하지만 용병이 들어오고 난 이후부터 패스에 집중하게 되었고 타이밍을 중시하는 플레이를 하게 되었다. 패스와 드리블, 슛 등이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이루어지며 이런 플레이가 가능하도록 항상 시선이동이 플레이방향이나 패스방향과 연관되지 않게 움지였다. 상대선수는 강동희의 시선과 드리블 탬포를 보고 따라가다가는 갑자기 빠르지도 않은 강동희에게 드리블 돌파를 당한다던가 상대팀 모든 선수가 멍때리고 머리 위로 지나가는 패스를 가만히 지켜 본다던가 밀착마크를 하다 잠깐 한눈판 사이 얼굴 앞에서 3점슛을 쏘는 강동희를 보게 된다.

5. KBL 기록

역대 기록
시즌 소속팀 경기수 2점슛 3점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슛
1997 기아/모비스 21 76/125
(60.80%)
47/110
(42.73%)
34/47
(72.34%)
327 64 153 65 2
1997-98 45 126/247
(51.01%)
85/205
(41.46%)
111/142
(77.62%)
618 212 305 114 5
1998-99 34 107/188
(56.91%)
76/197
(38.58%)
100/121
(82.64%)
542 125 251 68 5
1999-00 38 87/174
(50.00%)
70/181
(38.67%)
71/91
(78.02%)
455 124 292 84 6
2000-01 45 113/213
(53.05%)
81/196
(41.33%)
57/81
(70.37%)
526 147 382 73 9
2001-02 49 147/274
(53.65%)
53/159
(33.33%)
45/64
(70.31%)
498 121 383 73 4
시즌 소속팀 경기수 2점슛 3점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슛
2002-03 LG 54 75/138
(54.35%)
98/219
(44.75%)
43/55
(78.18%)
487 89 285 66 3
2003-04 50 41/76
(53.95%)
59/138
(42.75%)
26/34
(76.47%)
286 56 150 27 1
KBL 통산
(8시즌)
336 772/1435
(53.80%)
569/1405
(40.50%)
487/635
(76.69%)
3,738 713
2,201
(7위)
570 35

6. 지도자 생활

6.1. 코치 시절

파일:창원 LG 박종천 감독과 강동희 코치.jpg
2004년 은퇴 후 곧바로 창원 LG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가 코치를 시작했을 무렵엔 이미 팀을 떠난 김태환 감독에서 새로 부임한 박종천 감독 체제였으나 6강 PO에 꾸준히 들었던 팀은 9위로 추락하면서 자진사임했고, 동시에 새로 들어온 신선우 감독이 코칭스태프 전면개편을 감행하면서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파일:전창진 감독 강동희 수석코치.jpg
그렇게 힘든 마음으로 야인 생활을 이어가다 2005-2006 시즌 동부그룹이 TG 삼보를 인수한 원주 동부 프로미에서 수석코치직으로 지도를 시작하게 된다. 제이 험프리스 코치가 전자랜드 블랙슬래머의 감독이 되면서 공석이었는데 전창진이 품게된다.

전창진과는 학벌이나 실업의 인연이 없지만 허재라는 연결고리가 있었고 전창진 감독이 가드 지휘를 이유로 부르게 된다. 강동희는 이렇게 되면서 전창진 사단에 포함하게 되며 1년뒤 LG에서 정리된 후배 김영만도 전창진 사단에 들어가게 된다.

가드 라인을 중심으로 포인트 가드 보다 슈팅 가드를 더 활용하게 유지하였다.[19]

파일:전창진 강동희 김승기.jpg
2007-2008 시즌에는 동부 프로미의 KBL 통합우승에 공헌하였으며 이후 2009-2010 시즌을 앞두고 전창진이 부산 kt 소닉붐으로 가면서 감독 자리를 물려 받았다.[20][21][22]

6.2. 감독 시절

파일:강동희 동부 감독 미소.jpg
처음으로 감독 지휘봉을 잡은 2009-2010 시즌에는 전창진 전 감독 체제의 조직력을 만들어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켰다. 트리플 타워를 이용한 드롭 존 디펜스는 역대급으로 꼽혔으며, 강호의 입지를 꾸준히 이어간 끝에 2010-11 시즌에는 챔피언 결정전까지 진출[23]했다. 비록 챔프전에서 KCC에 막혀 선수-코치-감독으로 우승하는데 실패했지만, 강동희 감독이 항상 환영만 받지는 않았던 게 외국인 선수 선발에 있어서 굳이 단신용병을 꼭 뽑았다는 것인데 첫해에는 마퀸 챈들러(197cm) & 게리 윌킨슨(202cm) 조합의 용병을 뽑았다가 골밑에서 제대로 고생하기도 했다. 챈들러는 스코얼러로 기대를 했지만 운동을 전혀안해 몸상태가 엉망인 상태로 와서 전혀 골밑에서 보탬이 못되었고 게리 윌킨슨은 식물용병이었다. 이러니 김주성이 과부하가 걸려서 고생까지 했다.

그 이후에도 2명 선발 제도일 때 꼭 한명은 190cm대 중후반의 포워드 타입의 선수를 뽑아서 까이기도 했다. 김주성은 5번보다는 4번에서 뛰어야 위력을 발휘하는 선수이니만큼 용병제도가 2명보유 1명 출전으로 바뀐 2013시즌부터는 용병을 뽑는데 있어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기도 했던 대목이었다. 장신 두 명을 뽑아야 김주성을 5번으로 썼던 걸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주성도 나이가 많이 들었으므로 5번에서 무리한 플레이를 했을 시 과부하의 위험성도 있었던지라.

신인선수를 선발했을 때는 유난히 가드를 많이 뽑았다는 특징이 있었기 때문에 가드왕국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백업센터로 쓸만한 장신 선수 지명에 소홀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벌써 몆 년째 백업센터는 김봉수 하나로 버텼다. 단점이라면, 주전 의존도가 너무 높았다가 부임 초기보다는 백업의 활용이 높아지긴 했었다. 결국 역대 최단 경기, 최고 승률로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다만 최근 국내 각종 스포츠에 불었던 승부조작의 기운 때문에 상대적으로 빛을 덜 보았다.

파일:강동희 동부 감독.jpg

파일:강동희호 동부 우승.jpg
2011-2012 시즌에는 아예 역대 최고 승률까지 노릴 기세로 감독으로도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규리그 16연승에 2007-2008 시즌 이후 4년만에 정규리그 우승을 달성한 이후 맞대결로 인해 늦게 축하를 해 주었던 전창진 감독은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했고 허재는 작정하고 애정이 섞인 말로 부러워했다. 김영만 수석코치도 선수에서 코치로 정규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4강 PO에서 모비스를 3승 1패로 누르고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했지만, 또 다시 챔피언결정전에서 안양 KGC인삼공사에 2승 4패로 패하고 준우승[24]. 선수 시절에도 허재에 가려 2인자 이미지가 강했는데[25], 어째 감독으로서도 콩라인의 기운이 엄습하였다. 그래도 정규시즌 성적이 워낙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2011-12 시즌 감독상은 탔다.

그리고 2012년 5월 7일 혼혈 드래프트에서 이승준을 얻는데 성공해서 콩라인 탈출의 청신호가 켜졌다. 신인 드래프트에서 부족한 백업센터만 보강했다면 물 샐 틈 없는 백업진을 보유할 수 있던 절호의 기회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12 ~ 2013시즌에서 제대로 대형 참사를 내고 말았다. 김주성의 노쇠화와 이승준의 특성을 감안 안하고 포워드형 용병인 브랜든 보우먼과 멸치 수준의 웨이트를 가진 저마리오 데이비슨을 뽑았다가 전부 바꾸고 고생하자 농구 관련 커뮤니티에서의 동부 팬들은 강동희 감독을 깡통감독이라고 비난했다. 더군다나 브랜든 보우먼이 삼성 이적 후 인터뷰에서 미루어볼 때 고생을 했다는 내용 때문에 또 이래저래 까일 거리가 하나 늘었다. 기본적으로 농구관 자체가 빠른 선수만 고집하는 스타일이라는게 2012 ~ 2013시즌에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고 이런 고집이 이번시즌 삽질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초반 삽질 이후 강팀답게 UTU를 시전하려고 했으나, 핵심 멤버인 김주성이 발목부상을 당하면서 또 다시 하위권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6.2.1. 통산 감독 성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시즌 플레이오프
2009-10 원주 동부 프로미 54 33 21 5위 4강 PO
2010-11 54 31 23 4위 준우승
2011-12 54 44 10 1위 준우승
2012-13 51[26] 19 32 7위 -
<rowcolor=#00a495> 통산 213 127 86 0.596 -

7. 승부조작

2013년 프로농구 승부조작 파동이 일면서, 승부조작 연루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되었다.강동희 검찰소환 만약 연루 혐의가 사실로 밝혀진다면 선수가 아닌 지도자가 승부조작에 연루된 사례인데다[27], 그가 농구계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여간 큰 게 아닌지라 상당한 파장이 예상되었다.

본인은 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했지만 2013년 3월 7일 출두하여 2011년 3월 플레이오프에서 수천만원을 받고 4차례에 걸쳐 승부조작을 한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당일 늦은 오후 강동희가 승부조작을 시인하였고 검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는 일부 매체들의 보도가 있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2차 조사까지 들어갔으며, 자정을 앞둔 시점에서도 계속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만 결국 3월 8일 새벽 2차 조사가 끝난 후 검찰에서는 강 감독이 승부조작에 개입한 사실을 확인하고 구속영장을 청구하기로 했다.

자세한 내용은 2013년 프로농구 승부조작 사건 문서 참조.

2011년 6월에 YTN에 나와 "프로축구 승부조작 사건은 가슴이 아프다."라고 이야기했는데 정작 강동희 본인은 이미 3개월전에 승부조작을 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3월 11일,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본인은 혐의를 계속해서 부인하고 있었으나 담당 판사는 도주 위험 및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였다고. 3월 12일 결국 승부조작에 대한 책임을 지고 동부 감독에서 사퇴하였다. 이후 김영만[28] 코치가 원주 동부 프로미의 감독대행이 되었으며, 2013~2014 시즌 동부는 이충희 감독을 맞이하게 되었다.[29]

강동희의 승부조작에 대한 1차 공판이 2013년 4월 22일 오전 10시에 의정부지방법원에서 실시되었다. 1차 공판에서 기소된 2011년 4700만원을 받고 4경기 조작한 혐의 중 2월 26일 경기에서 700만원을 받은 사실을 시인했으나 나머지 3월 11, 13, 19일 경기에 대한 혐의는 부인하였다.

이후 증인대질과 증거조사를 위해 2013년 5월 6일에 실시한 2차 공판 대질심문에서 브로커는 강동희가 4경기를 조작했다고 진술하는 바람에 브로커와 치열한 법정공방이 예상되었다.

3차 공판은 2013년 5월 20일에 치뤄졌으나 혐의사실만 치열하게 공방만 벌여서 공판이 무성과로 끝났다. 결국 4차 공판이 확정되었으며 2013년 6월 11일 오후 5시에 동법원 3호 법정에서 실시될 예정이다. 이 공판에는 강동희측 증인으로 강동희의 밑에서 원주 동부 프로미의 코치를 하던 김영만이 재판에 출석하여 증언을 하기로 되어 있다. 김영만 코치는 "포스트시즌 진출이 확정될 경우 주전급 선수들의 출전 시간을 줄이는 것이 관례"이고 "감독이 선수 몰래 고의적으로 패배를 유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증언했으나...

결국 8월 8일 1심에서 징역 10개월, 추징금 4700만원 판결이 내려졌으며, 강동희에 이어 검찰도 항소를 취하. 징역 10월이 확정되었다.[30] 그리고 KBL에서는 같은 달 6일 상벌위원회를 열어 이 판결을 근거로 그를 제명 조치했다. 영구제명이라는 용어는 KBL 규정 상으로만 존재하지 않을 뿐, 승부조작의 해악을 생각한다면 사실상 영구제명이나 마찬가지다.

8. 이후

2016년 KBO에서 승부조작 사건이 불거지면서, kt wiz에서 승부조작 예방을 위한 강사로 위촉되었다. 본인 인터뷰에 따르면 승부조작이 위험하고 쉽게 빠질 수 있는 유혹이며, 한번 빠져들면 절대 나올 수 없다는 본인의 경험을 알려주기 위함이라고. 반발이 많지만, 이런 식의 교육은 흔히 있는 것이다. 음주운전 범죄자나 도박중독자, 마약 중독자가 음주운전, 도박, 마약 근절 교육에 강연을 하는 게 그 사례.[31] 더구나 한때 한 종목의 전설적인 선수이자 감독이었던 그가 승부 조작으로 인해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졌는지 그 자체도 충분히 좋은 반면교사이기도 하다. 더욱이 경험자로서 승부조작 브로커들의 접근 방법, 대처 방안들을 후배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비록 본인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을 지라도 후배들을 자신과 같은 범법자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막는다는 점에서 무조건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그런 범죄를 저지른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속죄라고 할 수 있다. 실제 경험자만이 말해줄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강의에 알맞은 강사이고, 무엇보다 같은 승부조작을 근절하기 위해 하는 것이니 공로라면 공로라고 할 수 있는 경우다.

추가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당시 있었던 몇 가지 사실을 언급했다.
  • 최초 승부 조작은 "1쿼터에 주전 선수들을 빼준다면 술값을 내준다"는 말에 승부 조작에 대한 의식 자체가 없었고, 어차피 휴식을 위해 주전들을 뺄 계획이었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응한 것이 시작이었다.
  • 이후 3차례의 승부 조작을 더 해 총액 3700만 원을 받았으며, 그 시기 터진 프로 축구 승부 조작 사건을 보고 그때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 3700만 원을 브로커에게 돌려주고 없던 일로 하려고 했으나, 그 때부터 2년 간 브로커에 협박으로 시달렸다.

네티즌들은 이미 지은 죄를 돌이킬 수는 없겠지만,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고 할 만큼 고통 받았던 것도 사실이고 더 이상 자신 같은 사례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강의를 진행한 것인 만큼 더 이상은 이런 실수를 하지 말고 새로운 인생을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반응이 다수다. 조작으로 제명당했음에도 뻔뻔하게 타국 리그 팀의 입단을 시도하기까지 했으며 자기 아들을 변명삼아 감성팔이나 시전하는 최 모씨나 아예 다른 강력 범죄까지 추가로 저질러 싹수가 노랗다는 것만 증명한 김 모씨유 모씨, 사생활이 좋지 못한 것도 모자라 겁도 없이 경찰 축구팀 선수에게 조작을 제안한 장 모씨등 뻔뻔함이 넘치는 악질들과는 비교되는 진정성이 보여서 그의 행보에 비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32]

이후에도 대전 KGC인삼공사 선수단 강연에도 참석하는 등 승부조작 방지 교육 전담으로 나선 모습을 보여주었다.[33]

2019년 11월에는 춘천시장애인체육회 농구팀의 기술 고문을 맡기도 했다. 2019년 7월 24일에 실린 점프볼 기사에는 인천에서 후술할 농구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2020년 7월 28일, 강동희의 사면 공론화와 관련된 기사에서 한 농구 관계자가 사면에 대한 전, 현직 농구인들의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며 아마추어 감독과 일부 프로 구단 등은 이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니 이제 KBL에 사면 탄원서를 제출하면 된다고 말했고, 의지와 상관없이 추진하여 그동안 표면에 드러나지 못한 것이 여론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공감대 형성은 어디까지나 농구인들 사이의 분위기일 뿐 일반 대중의 부정적인 여론 우려로 KBL에 사면 탄원서를 제출한다고 해도 이뤄지는건 절대 불가능하다.

2020년 9월 10일에 방송되었으며 허재의 제안으로 출연한 SBS 인터뷰 게임에서 승부조작 사건에 대해 언급하며 사죄의 뜻을 밝혔고, 어머니와 아내, 농구 레전드였던 서장훈, 김영만, 박지현 그리고 중앙대학교 시절 은사였던 정봉섭 전 감독을 만나 용서를 구하기까지도 했다.

이후 본인의 이름을 딴 농구장학금을 한국농구 유망주들에게 지급하면서 농구 유망주들에게 꿈과 희망을 키우고 있다.

추가로 손대범 기자가 쓴 전규삼 코치 평전 <오른손을 묶어라>에 그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파일:김태술과 강동희.jpg
2020-2021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김태술을 만나기도 했다.

2021년 6월 15일에 KBL에서 강동희의 제명 처분에 대한 재심의가 열렸다. 재심의 사유는 KBL 현직 감독 10인과 전현직 농구인들의 탄원서가 제출되었다는 것인데 역겨운 온정주의, 전형적인 내로남불식 제 식구 감싸기라며 큰 비판을 받았다.[34][35][36] 게다가 탄원서를 강동희 본인이 직접 KBL을 방문해서 제출한 것으로까지 알려지면서 그동안 미디어에서 보여왔던 반성의 태도가 거짓이 아니었냐고 진정성에 대한 의심을 받았다. 게다가 강동희 본인이 각종 소송에 휘말려 있다는 것까지 드러나면서 돈이 필요해서 복귀를 원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다.

재정위원회는 강동희 본인이 출석하지 않은 상태로 KBL 센터에서 진행되었다. 심의 후 KBL에서는 '국가대표 시절 각종 국제 대회에 출전해 국위선양에 기여한 점과 징계를 받은 후에도 강사로 활동하며 후배 선수들을 위해 노력했던 점은 인정하나 공정하고 투명해야 할 스포츠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안건을 기각했으며 향후에도 이와 같은 사안에 대해 논의를 하지 않겠다'고 최종 발표하면서 KBL 복귀는 무산되었다.[37]

6월 27일에는 JTBC의 프로그램 뭉쳐야 쏜다의 다음 회에 그가 출연하는 예고편이 방영되었다. 최근의 강동희와 농구인들의 행보에 실망한 농구팬들은 당연히 반대의견을 쏟아내고 있다. "승부조작이라는 프로스포츠 사상 최악의 범죄를 저지르고 실형까지 받았는데 왜 TV에 불렀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해당 프로그램을 통해 유입되는 신규팬들에게 강동희의 승부조작 범죄 이력을 알려서 쫓아내고 싶다는" 등 제작진을 비판하는 의견이 많았다. 결국 제작진 측에서 사과와 함께 29일 강동희의 방송분량을 자른 새 예고편을 올렸고, 강동희의 분량은 최소화 하기로 했다.[38][39]

방송에서는 결국 강동희를 모른다면 얼굴의 식별이 어려울 정도로 먼 거리의 풀샷에서만 잡혔고, 토크는 모두 편집, 선수를 소개하는 카드CG 역시 기아팀 전체가 나오지 않았으며 교체시에만 나왔다. 경기중에는 강동희가 볼을 잡았을 경우 앵글을 멀리해 송출했다.[40]

그가 분명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며 유소년 선수 장학 사업과 부정방지 강사 등으로 활동해 온 것은 사실이나, 승부조작에 가담해 실형을 선고받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기에, 10여년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고 해서 프로스포츠 최악의 범죄 행위 중 하나인 승부조작을 용서하려는 것은 무리수였다는 평이 대부분이다. 그런 와중에 다시 농구로 방송 프로 등에 나오려고 하는 모습은 대다수의 농구 팬들에게 공감을 받지 못하는 행위였다는 것이 중론.[41][42] 해외나 국내의 다른 종목 사례를 봐도 30년이 넘게 복귀하지 못 하고 있는 피트 로즈 등 승부조작 범죄자는 다시는 그 판에 발을 붙이지 못 하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프로 스포츠의 근간인 공정성을 뒤흔든 인물이 다시 그 스포츠로 밥벌이를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장 스타1이 2010년 이후에 급격히 쇠퇴를 겪은 것을 생각해보자. 그 승부조작 때문에 리그의 하락세가 가속화되었다. 조작의 핵심인물 중 한명인 프로게이머 마재윤은 아프리카에서 복귀 시도를 했지만 결국 제재가 가해졌다.

8.1.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검찰 기소

2021년 10월 10일, 농구교실 단장을 지내며 1억8000만원의 운영비를 빼돌려 업무상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검찰에 송치되었다. 2021년들어 KBL 영구제명 재심 청구, 방송 출연 시도 등 매우 적극적으로 과거의 굴레를 벗기위해 활동하고 있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본인이 승부조작에 이어 또다시 범죄 혐의에 연루되었다는 사실만 대중에 각인시키고 말았다.

2023년 2월 6일 인천지검은 업무상 배임 횡령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8.2. 2억원대 법인 자금 횡령 혐의로 인한 피소

2022년 1월 18일, 2억원대 법인 자금을 빼돌린 혐의로 다시 경찰 조사를 받게 되었다.

한 고소인에 의하면 업무상 횡령 혐의로 강동희 본인을 비롯한 관계자 3명을 경찰에 고소했는데, 2019년 3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약 2억 2000만원 상당의 법인 자금을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했고, 승부조작 사건으로 영구제명된 KBL로부터 혐의를 벗어나기 위해 강동희가 회사 법인 자금에서 활동 경비나 개인적인 소송 비용 등을 지출해 체육시설 분할 소송 과정에서 위임장을 조작했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이에 대해 경찰은 강동희의 사문서위조 의혹에 대한 고소장 접수와 동시에 고소인과 피고소인을 차례로 수사했다.

8.3. 피트 로즈와의 비교

위에서 피트 로즈 얘기가 나왔는데, 승부조작 자체 시도라는 부분에서 사실 스포츠도박만 하고 승부조작 시도를 하지 않은 로즈와는 케이스가 조금 다르다. 로즈는 최초에 MLB 측에서 그가 경기결과를 두고 도박을 한다고 의심해 변호사 존 다우드(John M. Dowd)에게 조사를 의뢰했고, 초창기에 혐의를 부인하다가 경기에 도박을 한 것을 인정하고 영구제명을 받아들인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로즈는 현업자의 스포츠도박 금지 규정을 어긴 것에 의해서 메이저리그의 징계를 받아들인 것이지 승부조작을 인정한 것은 아니며, 법적으로 처벌을 받은 것도 아니다. 애초에 비교 자체가 실례다. 실제로 위에 언급된 다우드의 보고서에는 "그가 레즈를 감독하는 동안 레즈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돈을 걸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으며[43], 그는 규정을 어긴 것이지 범법자라고 확인된 것은 아니다.[44]

반면 강동희는 직접적으로 승부를 조작한 것을 인정하고 법원에서 처벌을 받은 범법자다. 즉, 이 점에서 볼 때 로즈보다 더욱 엄중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실 엄밀히 말하면 순수하게 '제명된 스포츠인의 방송 출연' 그 자체만으로 문제가 된다고 보긴 힘들다. 로즈는 영구제명된지 10년만인 99년에 메이저리그 이번 세기(All-century) 팀에 선정되어 99년 월드 시리즈 2차전 전에 소개되어 팬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또한 그는 방송에 여러번 출연한 적도 있으며, 2015년에는 폭스 스포츠에 의해 해설자로 고용되기도 했다. 지금의 강동희와는 다른 대접.

강동희의 케이스와 다른 점은 메이저리그는 로즈가 92년, 98년, 그리고 2015년까지 영구제명을 풀어달라고 했음에도 단호하게 거절해왔다는 것이다. 로즈는 역대 최대 안타 기록 보유자로서 성적 면에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것이 당연시되는 선수임에도[45] 투표 대상 자체가 아니다.

실제로 그는 1989년 영구제명된 이후 30년째 복권되지 못하고 있어 일부 팬들 사이에서 동정론이 일어날 정도지만, MLB에서 워낙 단호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복권은 요원한 상황이다. 반대로 강동희는 위에 언급된 것처럼 현직 감독들과 전현직 농구인들이 앞장서서 제명 처분을 철회하려고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즉, 피트 로즈처럼 리그 차원에서 '제명 처분 철회는 절대 안된다'고 하는데 일부 팬들이 '불쌍하니 봐주면 안되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리그가 풀어주려고 하는데 팬들의 눈치를 봐서 못 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니 대중들에게 있어서 강동희의 방송 출연 자체가 순수하게 보일리가 만무하며, 게다가 뭉쏜에 같이 출연한 사람 중 하나는 강동희와 친한 전직 농구인 허재다.

즉, KBL이 만약 MLB가 로즈에게 보인 것처럼 '복귀는 절대 없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으면 강동희가 가끔 방송 출연하는 것에 대해 팬들이 그나마 호의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농구계에서 은근슬쩍 그를 복권시키려는 움직임을 노골적으로 보이고 있는 상황이라 농구 관련 방송에 그를 출연시키는 게 여론을 간보려는 움직임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다. 게다가 위에 언급된 피트 로즈의 경우 영구제명이 된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동정 여론이 생겼고, 방송국에서 야구 관련된 일을 얻은 것도 2010년대 중반(즉, 제명 조치 20년이 훌쩍 지나서) 이후였지만 강동희는 제명 조치가 일어난지 이제 8년이 지난 시점에서 논란이 불거진 것이다.

애초에 복권을 논하고 싶어도 이는 '전현직 농구인들'이 아닌 팬들의 여론이 바탕이 되어야 그나마 스무스하게 이어질 수 있다. 강동희가 한 짓은 함께 경기를 치른 농구인들 뿐만 아니라 가장 크게는 프로농구의 고객인 팬들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 이를 용서하는 것에 팬들의 지분이 더 크게 자리잡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팬들이 '그래도 강동희 레전드인데 보고싶다'는 여론이 생기면 방송국에서 섭외할 명분이 생기는 것이고, '이제 용서해줘야 하는 게 아니냐'는 여론이 주류가 되면 KBL에서도 심사를 할 명분이 생기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영구제명 대상자에 관해선 피트 로즈에 대해 MLB가 그런 것처럼 리그 차원에서 단호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리그의 질서와 징계의 명분을 위해서도 필요한 사항이다.[46] 그런데 팬들의 여론에 힘입은것도 아니면서 농구인들이 먼저 나서서 용서해달라고 하고, 팬들이 거부하는데도 먼저 방송에 출연하고 있으니 당연하게도 역풍이 불었다.

9.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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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동희 농구교실'이라는 자기 이름을 딴 유소년 농구 육성클럽을 운영하고 있었다. 현역 때부터 이미 본인의 이름을 내걸고 시작한 것이 훗날 그가 감독이 될 때도 계속되었다. 물론 직접 지도할 수는 없었겠지만, 자기 이름을 걸고 하는 교실이니 신경을 쓰긴 썼다.[47] 하지만 정작 승부조작 사건에 휘말리자 강동희 농구교실에서는 발빠르게 대처했고 결국 KBC(Korea Basketball Club) 농구교실로 이름이 개명되었다.[48] 그래도 해당 농구교실은 승부조작 사건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았고, 현재도 있다. 강동희 본인 말로는 후배들에게 이름을 빌려주었지만 사업자 등록도 하지 않았고, 세금 등 각종 문제도 생겨서 본인이 다시 정식으로 법인 등록을 하고 직접 운영한다고 밝혔다.
  • 1997년,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했을 때 제작진들이 엉뚱한 사람을 찾아 당황했는데, 이는 프로그램 역사상 유일한 NG였다. 그리고 재연 영상에서 강동희의 어린시절을 연기했던 아역 배우가 또한 승부조작 가담으로 제명된 안재욱이었다.
  • 200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재미있는 닉네임 놀이' 에서 넌 강동희였어로 본의아니게 개그 소재가 되기도 했다. 원본은 윤종신이 작곡한 성시경넌 감동이었어[49]였다. 렉시의 곡 애송이에는 감동이 없어라는 가사도 있다.
  • 잘 알려진 내용은 아닌데 1995년 모교인 중앙대 2년 후배 여성과 결혼을 했으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모종의 이유로 불과 3개월만에 이혼한 적이 있다. 이후로 주변에서 재혼을 많이 권했는지 2004년 5월 30일 39세 나이에 재혼에 성공했다. 신부는 1년 간 교제해온 영어강사로 알려졌다. 슬하에 아들 2명이 있으며, 늦은 나이에 결혼해선지 아이들도 굉장히 어린 편이다. 두 아들은 모두 유망주 농구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장남 강성욱은 제물포고등학교 농구부에서 뛰었으며 2023년에 성균관대학교로 진학한다.
  • 전 야구선수인 김기태와 친분이 있다.
  • 2021년 10월 10일 횡령 혐의로 검찰에 송치된 기사가 보도 되었다.
  • 2021년 12월 21일 자신이 소유한 건물을 사용하는 농구교실 지도자들에게 임대료 100% 인상을 제시하는 등 갑질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지도자들이 청와대 국민청원을 제기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10. 관련 문서



[1] 1966년생이지만 초등학교를 한해 늦게 들어갔는지 86학번이다.[2] 6개월 방위[3] 중앙일보[4] 중앙대 4학년때 첫 선발[5] 대회 직후 허재와 함께 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6] 벌말초등학교 - 호계중학교 - 제물포고등학교 - 성균관대학교에서 농구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 #[7] 프로에 들어올땐 이미 한국 나이로 32이었다. 그럼에도 상당히 좋은 기록을 세우고 은퇴했다. 승부조작으로 모든 걸 망치긴 했지만 선수 시절 그가 잘했던 선수인 건 맞다.[8] 기아는 6천만원에다 집을 하나 더 사줬다고 한다.[9] 허재가 포인트 가드를 맡았었다.[10] 유재학은 1990년도에 은퇴했고 그해에 강동희가 입단하였다.[11] 6개월 방위[12] 유재학이 있었을 때에는 허재가 공격에만 집중하며 들개처럼 뛰어다닐 수 있었지만 강동희가 들어온 이후에는 게임 리딩을 나눠 하느라 들개같은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13] 허재는 음주 사고, 김유택은 불륜 문제가 있었다.[14] 내심 고향인 인천으로 가서 한 번 더 뛰어보고 싶어하기는 했지만, 이는 이뤄지지 않았다.[15] 긴 팔을 활용한 스틸에 능했다[16] 은퇴이후 살이 급격히 쪘지만 현역 시절엔 뚱뚱하지 않았다.[17] 정작 전성기 기준 평득은 강동희가 이상민 보다 더 높다. 물론 평균 어시스트도 강동희가 더 높았다. 슈팅 시도는 더 적었으나 성공률이 높아서 평균 득점은 더 높아진 케이스.[18] 다만 양동근도 이런 이미지와는 달리 리딩에 굉장히 전념하는 스타일이다. 결코 본인 득점을 우선시하는 선수가 아니다.[19] 코치 재직 당시에는 이세범, 2006-07 시즌 중반에 트레이드로 합류한 표명일, 슈팅 가드 자리를 잡지 못했던 강대협, 전창진 감독의 농구대선배로 이왕돈의 아들로 유명한 이광재 등에게도 투맨 게임을 치밀하면서도 세밀하게 가르쳤다.[20] 전창진과 강동희가 대학과 프로에서의 연결고리가 없음에도 성인완 단장이 내부승진시켰던 건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전창진 감독이 성인완 단장에게 강동희 수석코치의 내부승진을 부탁했고, 강동희의 내부승진이 확실시 되자 편한 마음으로 떠났다고 한다.[21] 참고로 전창진부산 kt 소닉붐으로 이적하면서 김승기는 동부 시절 보조코치였으나 kt에서는 수석코치로 두고 손규완도 선수에서 슈터코치로 두었다. 이후 자신은 구설수로 인해 가까스로 전주 KCC 이지스로 떠났지만 안양 KGC인삼공사로 데리고 가면서 남아있었던 김승기와 손규완은 보직이 하나씩 올라갔다.[22] 일명 전창진 사단의 수석코치 출신 감독의 성공신화로도 이어졌다. 유재학도 사실 사단보다 인맥이었는데 전창진은 달랐다. 김진도 사단의 개념이 아니었지만 김동광 또한 사단의 개념이 짙었다. 지도했던 스승인 최인선도 인맥으로 활용했다. 또한, 중앙대-기아의 색이 짙은 마지막이었던 김영만도 자신이 동부 감독 시절에 선수 마지막이었지만 은퇴를 허재가 있었던 전주 KCC 이지스에서 배려를 하면서 지도자로 숨은 헌신을 했다. 즉, 전창진 사단과 강동희 사단의 중간이 바로 김영만이다. 표명일이세범도 모두 전창진 사단과 강동희 사단에 있었다.[23] 게다가, 당시 정규리그 1위 팀이었던 kt를 제압했다.[24] 참고로 안양 KGC인삼공사의 입장에서는 첫 우승이었다.[25] 이 점은 강동희 자신도 허재와 같이 한 인터뷰에서 인정한 바 있다. 당시 강동희의 멘트. "난 이전부터 다 맞추면서 살았잖아요. 형은 누구를 위해 기분을 맞추고 상대의 감정을 읽으려 한 적이 없었어요. 왜냐고? 농구대통령이었으니까. 난 2인자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맞춰가는 데에 익숙한 편이에요."[26] 자진사퇴[27] 만약 그가 혐의를 시인할 경우, 국내 프로스포츠 감독으로선 최초로 승부조작에 가담한 사례로 남게 된다.[28] 물론 그 감독대행이 지금의 김영만 감독이다. 후임 이충희마저도 물러난 이후에 정식 감독으로 동부를 이끌게 되었다.[29] 이충희 감독은 김진의 대구 동양 오리온스-대구 오리온스의 흑역사와 심지어는 명문구단인 전창진의 동부 프로미의 흑역사라는 대굴욕을 피하지 못하게 된다. 이 모든게 구설수가 유독 많았던 최고 명장인 전창진을 만난게 아닌가라는 안타까움이 더 전해지기도 한다. 동부도 사실 김영만을 내부승진을 이후에 하게 되었지만 바로 하기전에 구단에서는 부담감을 가졌다.[30] 참고로 수감 기간에는 구속 기간이 포함되기 때문에 강동희는 10개월의 형량을 그대로 살 필요는 없고 2013년 3월에 구속되어 이미 6개월 가까이 수감됐기 때문에 나머지 4개월만 더 복역하면 된다. 2014년 초(아마도 1월말~2월초)에 만기출소했다. [31] 도박 중독자로서 나락까지 떨어졌던 개그맨 황기순 역시 강원랜드에서 도박 중독의 위험성을 알리는 강연을 하고 있고 방송에 나올 때 마다 도박의 무서움에 대해 설파한다. 마약 중독으로 감옥까지 여러 번 갔다온 가수 현진영 역시 자진해서 정신병원에 입원 후 공개 치료를 했고 끊은 후 마약 퇴치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본다면 강동희의 승부 조작 근절 강연을 나쁘게 볼 것은 아니다. 전 야구선수였던 박현준 역시 이러한 승부조작예방 강연을 뛰기도 했다.[32] 강동희는 무엇보다 한시대를 풍미했던 선수고 그에따라 팬도 많았다. 호의적인 사람들은 워낙 강동희 선수시절 이미지도 좋았고 팬서비스도 좋아서 좋게 봐주는 편이다. 주로 중년층은 강동희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편.[33] 강연하는 강동희 옆에 안준호 전 감독이 등장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이걸 볼 때 공적으로는 도움을 못 줘도 사적으로는 농구인들이 챙겨 준 듯.[34] 프로스포츠의 근간을 뒤흔드는 승부조작을 저지른 중죄인에 대한 재심의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다 정말로 KBL 리그가 망해버릴 수 있다.[35] 당장 축구연맹이 2011년 K리그 승부조작 사건에 가담하여 영구제명 조치를 받은 선수들의 징계를 감면하기로 논의했다가 여론의 엄청난 비판을 받은 걸 생각해보면 이게 얼마나 추하고 어처구니 없는 짓인지 알 수 있다.[36] 기사에 따르면 KBL 현역 감독들의 탄원서 서명은 SK의 전희철 감독이 앞장서서 주도했다고 한다. 다만 전희철은 KBL에서 막내급인 감독이라 소위 '총대'를 맨 것일 뿐, 실제 주도자는 방열 등의 농구 원로들이라고 보는 시선이 더 지배적이다.[37] 만약에 KBO에서 박현준이나 유창식을 복귀시킨다고 하면 KBO는 엄청난 비난을 먹을것이다. KBL에서 강동희급이 조작했다는 것은 KBO에선 정민철이나 구대성급이 승부조작했다는 것과 같은 범주이다. 팬들 입장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농구계 원로들과 감독들이 탄원에 동참했다는 것인데, 스포츠 세계가 선후배 관계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이런 온정주의 때문에 팬을 잃을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우려할 만한 일이다. 프로스포츠에선 선후배 관계보다도 팬이 더 중요하기 때문. 종목은 다르지만 스타크래프트 조작사건 일어나고 나서는 게이머들같은 경우 개인방송에서 조작범과 게임을 일절하지 않고 있고, 아프리카 스타리그에서도 조작범은 부르지 않고있다.[38] 그 바람에 허재현주엽의 좋지 않은 과거사가 재조명받기도 했다. 허재와 현주엽도 있긴 하지만 똑같은 농구인인 서장훈도 이러한 과거에 있어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39] 스포츠 예능의 특성 상 통편집은 불가능하고, 경기에 출전 중일 때는 모자이크로 가리거나 노출 빈도를 줄인다.[40] 특히 불낙스전에서는 경기 막판에 파울작전을 당해 자유투를 쏘는데 발끝만 나오면서 어색하게 편집되어버렸다.[41] 최소한 스타1 조작 선수들은 다른 직업을 찾아 나름대로의 삶을 살면서 스타판에는 기웃거리지 않고 있으며, 아프리카TV 등 인터넷 방송 플랫폼들에서도 그들이 스타 관련 일을 못 하게 막고 있다.[42] 차라리 농구와는 상관없는 방식으로 방송에 나왔다면 여론은 갈렸을 지 몰라도 최악까지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실제로 방송계에서 활동하는 허재, 현주엽, 서장훈 등 농구선수 출신 방송인들이 스포츠형 예능이 아닌 컨셉의 방송에서도 많이 활약하고 있다는 걸 보면…[43] 다만 그는 2002년 인터뷰를 통해 감독 시절에 레즈에게 불리한 쪽으로 돈을 걸었다고 생각한다고 인터뷰를 했다. 로즈는 2004년 자서전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이 감독으로 재직하던 시절과 선수 시절에 자신의 경기에 돈을 걸었다고 인정했지만, 레즈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돈을 건 적은 절대 없다고 주장했다.[44] 다만 로즈는 이와 별개로 탈세로 실형을 선고받은 범죄자이긴 하다. 어쨌거나 '승부조작 범죄자'로 확인된 케이스는 아니란 것.[45] 보통 커리어 3000안타를 치면 '3000 hit club'이라고 해서 명예의 전당 헌액이 거의 확실시된다. 3천 안타 클럽 중 헌액되지 못한 선수는 로즈와 약물 사용 논란에 휘말린 라파엘 팔메이로 뿐이다. 그런데 로즈는 3천 안타를 넘어 4,256개의 안타를 쳐낸 선수다. 저 짓만 안 했다면 벌써 선수로서 헌액되고도 남았다.[46] 실제로 21년 6월 이전까지는 이제 용서해줘도 되는거 아니냐는 분위기가 팬들에게 어느정도 깔려있었다.[47] 다만 인터뷰에서는 자신은 이름만 빌려줬고 1년에 송년회나 사인회에만 참여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위의 반성 논란과 후술할 복잡한 변명을 보아 이마저도 진실성을 의심받고 있는 상황이다.[48] 여기서 본래 KBC의 K는 본래는 Korea가 아니라 본인의 영문 이름에서 따왔다.[49] 라디오 스타에서 희철의 잔드립으로 한 번 더 언급된 바 있다. 이때 작곡가인 윤종신은 특유의 주워 먹기 개그로 "김유택, 한기범이 그랬다."며 너스레를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