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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규의 감독 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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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농구감독 | |
이름 | 최종규(崔鍾圭) |
생년월일 | 1946년 4월 6일 ([age(1946-04-06)]세)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학교 | 제물포고 - 연세대 |
감독 | 연세대학교 (1993~1996)[1] 대우증권 농구단 (1996~1996) 인천 대우 제우스 (1997~1998)[2] 원주 삼보 엑써스 (1999~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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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농구인.2. 현역 선수 생활
제물포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취미 삼아서 농구에 입문했고 연세대학교 입학 후 본격적으로 농구선수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장신에 속하는 188cm의 키로 팀의 센터 역할을 했고 1966 방콕 아시안 게임과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대표 선수로 선발돼 국제대회를 뛴 경험도 있다.[3] 대학 졸업 후 당시 실업농구의 강호였던 한국은행 농구단에 입단해서 맹활약했고 1974년 봄 무릎과 발목 부상을 입고 현역 생활을 끝냈다.3. 지도자 생활
현역 선수 은퇴 이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로스앤젤레스에서 생활하다가 1993년 모교 연세대학교의 부름을 받아 총감독 역할을 했다. 실제 지휘는 최희암 감독이 맡고 본인은 행정과 훈련 지도 업무를 맡았다.1996년 창단한 대우증권 실업 농구단 초대 감독으로 취임했는데 대학 후배인 유재학을 코치로 뒀다. 프로 원년 당시에는 작전타임 때 통역을 거치지 않고 외국인 선수들에게 유창한 영어회화로 작전 지시를 하는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는데[4] 미국 이민 생활을 통해 체득한 영어 실력 덕분이었다. 다만 경기 중 실질적인 작전 지시는 후배 지도자인 유재학이 도맡았다. 1980년대를 호령하던 초특급 포인트가드 출신으로 전술·전략에 능한 유재학 코치가 작전판에 펜으로 그어가며 전략을 설명해주면 최종규 감독이 이를 외국인 선수들에게 설명해주는 일이 잦았다. 뭔가 거꾸로 된 것 같은 느낌이지만 애초에 최종규 감독은 유재학에게 작전 지시를 전담하도록 후방 지원에 나섰다.
1997-1998 시즌 후 감독직을 유재학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총감독으로 보직을 옮겼다.
1999-2000 시즌부터 두 시즌 동안은 최명룡의 뒤를 이어 원주 나래 해커스-삼보 엑써스 감독으로 부임했는데 이 때는 전창진을 코치로 뒀다.
1999-2000 시즌 현재 KBL에서 유일하게 정규리그 3위 이하의 감독 중에서 KBL 감독상을 수상했다.
본인이 감독으로 있던 시절 소속팀의 성적이 아주 두드러지게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5] 리그 역사에서 손꼽히는 신사 감독이자 덕장 중 한 명이며 오늘날 KBL의 대표적 명장으로 성장한 유재학과 전창진을 명장으로 만든 멘토였다.[6]
4. 감독 은퇴 이후
감독으로서 은퇴한 후 다시 미국으로 떠나게 됐다.한 때 전창진 감독이 2010-2011 시즌 부산 kt 소닉붐의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 이후 한국에서 만나기도 했다.
2014-2015 시즌 미국에서 KBL 외국인 트라이아웃 때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등장하셨다.
5. 여담
- 연세대학교에서 뛰었던 최종규와 이름이 같지만 "종"자가 다르다.
6. 관련 문서
[1] 총감독을 맡았다. 실제 경기를 지휘했던 감독은 최희암.[2] 총감독을 맡았다. 실제 경기를 지휘했던 감독은 유재학.[3] 같은 시대에 뛰었던 선수로는 2년 선배인 김인건이 있다.[4] 비슷한 시기 같은 이유로 주목을 받았던 사람이 당시 안양 SBS 스타즈 감독이었던 김동광. 김동광 감독은 현역 은퇴 후 바레인에서 국가대표 농구팀 감독을 오랫동안 역임하면서 영어 실력이 늘었고 그 덕에 외국인 선수들과 격의없이 영어로 소통했다.[5] 프로팀 감독을 맡은 4시즌 중 3시즌에서 소속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끌었지만 정작 봄농구에 올라가서는 첫 스테이지인 6강 플레이오프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다.[6] 참고로 유재학과 전창진은 용산중학교를 함께 졸업한 오랜 친구 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