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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코치) | 2006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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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 | ||
KOREA NATIONAL BASKETBALL TEAM | ||
안준호 安俊濩[1] | ||
출생 | 1956년 3월 13일[2] ([age(1956-03-13)]세) | |
전라남도 담양군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
학력 | 담양봉산남초등학교 (졸업) 조선대학교부속중학교 (졸업) 광신상업고등학교 (졸업) 경희대학교 (학사) | |
가족 | 배우자, 장남(1989년생), 차남(1995년생) | |
포지션 | 센터 | |
신체 사이즈 | 188cm, 85kg | |
소속팀 | 삼성전자 농구단 (1979~1986) | |
지도자 | 코오롱 여자 농구단 코치 (1986~1995) 코오롱 여자 농구단 감독 (1995~1996) 진로 농구단 감독 (1996~1997) 청주 SK 나이츠 감독 (1997~1998) 수원-서울 삼성 썬더스 코치 (2000~2003)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코치 (2003) 서울 삼성 썬더스 감독 (2004~2011)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 (2023~ ) | |
행정 | 한국농구연맹 경기이사 (2011~2013) 한국농구연맹 전무이사 (2013~2014) | |
종교 | 개신교(장로교)[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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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농구인.
現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
前 한국농구연맹 경기이사 및 전무이사이자 前 경희대학교 스포츠지도학과 겸임 교수.
강을준 감독과 함께 KBL 양대 개그 감독으로 유명했다. 별명은 안간지, 안어벙, 가가멜(...) 등등. 하지만 알고 보면 단순히 개그에만 능한 감독이 절대로 아니고 사자성어를 잘 쓰는 감독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2. 경력
2.1. 선수 시절
전남 담양 출신으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4] 서울로 유학을 가서 고등학교 1학년 때 비로소 농구를 시작했다. 늦게 시작한 탓에 어려움도 많았지만, 경희대에 진학하면서 실력이 늘고, 결국 국가대표가 되어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이런 유명세 때문에 은퇴 후에 비교적 쉽게 코치 자리를 얻을 수 있어서 공백 없이 계속 농구계에 남았다.2.2. 지도자 시절
1986년 은퇴하자마자 코오롱 여자농구단 코치를 맡아 정주현 농구부장 겸 감독[5]을 보좌하며 1995년까지 계속 재직했다. 재직 기간 동안 여자 선수 조련에 명성을 얻으며 1994년 여자농구 부분 지도자 상을 수상하는 등, 이미 여자농구계에서는 인정받는 코치였다. 여자농구에 한손 슛을 도입하고, 패턴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선구자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안준호였다. 즉, 절대 개그로 코치, 감독을 유지한 인물이 아니다. 그 결과 1995년 10년간의 코치 생활을 끝내고 감독으로 승진했다.여자 농구계에서 인정받는 그를 마침 폭발적인 인기로 팀 창단이 이어지던 남자 농구계에서 그냥 보고 있지 않았고, 결국 그 당시 새로 창단한 진로 팀에서 그를 전격적으로 감독으로 영입했다. 그 대신 막 내정된 대한민국 여자농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에서는 물러나야 했다. 남자농구로 옮기는 사람에게 맡길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진로 농구단을 인수한 청주 SK 나이츠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청주 SK 나이츠에서는 이렇다 할 성적을 못 내면서 중도 경질되었다. 1997-98 시즌에는 누구나 예상 가능한 최하위 전력이라 팀의 기반을 어떻게든 만드는 과정에서 이 당시 KBL 1위 기록인 11연패도 당해가며[6] 시즌을 진행했지만, 바로 다음 시즌에 10경기도 안 되어서 짤리고 만다. 창단 최대어로 영입한 서장훈과 1998 드래프트 1 순위 현주엽을 가지고도 하위권으로 쳐졌다는 게 이유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짤린 시점에 서장훈과 현주엽은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대표로 차출된 상태였었다(...). 후임으로 기아 엔터프라이즈의 명장이었던 최인선 감독이 맡게 된다. 이후 1999-2000 KBL 플레이오프 우승을 달성하게 된다. 여담으로 현주엽은 조상현과 맞트레이드 되었다.
여자농구계에서 능력을 인정받던 인물이라 여자농구계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이 당시 여자농구는 13개 팀이 5개로 줄어드는 내리막으로 돌입한 탓에 한국스포츠TV 해설가로 잠시 살아야 했다. 이후 2000년 친정인 수원 삼성 썬더스의 코치로 잠시 부임했다. 2000-2001 시즌에는 김동광 감독을 보좌하면서 KBL 통합우승을 달성했다. 하지만, 2002-2003 시즌을 끝으로 갑자기 팀에서 떠나게 된다. 그 자리는 임정명 수석코치가 맡게 된다.
2.2.1. 서울 삼성 썬더스 감독 시절
그런데, 2004년에 결국 김동광 감독의 성적부진으로 인한 사퇴로 인해 친정인 서울 삼성 썬더스의 제3대 감독으로 다시 복귀했다. 자신의 밑은 같은 삼성 출신의 나이차가 큰 후배이며 여자농구이자 같은 남매인 수원 삼성생명 비추미에서 정태균 감독 밑을 보좌했던 서동철 수석코치가 맡게 된다.
당시 삼성은 2000-2001 KBL 통합우승 이후 김동광 감독과 갈등이 컸던 문경은을 우지원과 맞트레이드를 했는데 다음해 디펜딩 챔피언 사상 첫 플레이오프 탈락의 굴욕을 당했다. 추가로 우지원 또한 트레이드 되었고 본인이 몸담았던 서울 SK 나이츠의 서장훈을 대형 FA로 영입했다. 그 시기가 2002 한일 월드컵 축구였는데 당시 월드컵 신드롬으로 인해 매스컴에 묻혔다. 하지만, 서장훈을 영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주희정과의 조화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결국 김동광 감독은 6년만에 삼성의 지휘봉을 내려놓게 된다. 이후 김동광 감독은 안양 SBS 스타즈-안양 KT&G 카이츠 감독직을 맡게 된다. 여담으로 김동광 감독은 친정 복귀였다. 기존의 강혁과 이규섭의 상무 전역과 주희정과 서장훈과의 조화가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첫해는 4강에 그쳤지만 1년뒤 높이와 속도를 바탕으로 완벽한 조화에 성공하게 된다. 외국인으로 대구 오리온스의 득점왕이었던 포워드 네이트 존슨와 나이지리아 국가대표 센터인 올루미데 오예데지를 영입하며 높이와 속도 모두 최강삼성이 된다. 가드 또한 주희정을 은사인 김동광 감독이 있는 안양 KT&G 카이츠로 이적시키는 대신 이정석을 영입했다. 이로인해 강혁의 입지가 더 탄탄하게 다져지게 된다. 2005-2006 시즌 울산 모비스 피버스와 정규리그 공동 1위였으나 공방율에 뒤지면서 2위로 마감했다. 플레이오프에서 2위로 4강 직행 이후 절친 후배인 김진 감독이 이끌고 있었으며 간판이었던 김병철과 김승현이 있는 대구 오리온스를 상대로 3대0 스윕을 거두었다. 마침내 2005-2006 KBL 파이널에서 유재학 감독이 이끄는 우지원과 양동근이 있는 울산 모비스 피버스를 상대로 리버스 스윕과 함께 플레이오프 우승으로 삼성 썬더스의 V2를 달성했다.
2년뒤 서장훈이 FA로 전주 KCC 이지스로 이적했으나 반대로 라이벌팀의 핵심이었던 이상민을 보상으로 선택하면서 가드 왕국을 만들게 된다. 기존의 강혁과 이정석 그리고 벤치의 2년차가 된 이원수와 함께 삼성 가드 왕국이 되었다. 추가로 외국인 또한 테런스 레더를 영입하며 골밑을 장악했다.
하지만, 서장훈이 이적한 공백으로 인해 높이에 열세를 드러내며 2년 연속 플레이오프 준우승에 그치게 된다. 2007-2008 시즌 4강 플레이오프에서 라이벌인 전주 KCC 이지스에 스윕승을 거두었으나 2007-2008 KBL 챔피언결정전에서 원주 동부 프로미에 막히면서 준우승에 그치게 된다. 차기 시즌에도 마찬가지였다. 2008-2009 시즌은 4위로 마감해서 당시 정규리그 우승팀이었던 울산 모비스 피버스를 상대로 리버스 스윕을 했으나 2008-2009 KBL 챔피언결정전에서 당시 3위였던 라이벌인 전주 KCC 이지스와의 명승부 중의 명승부를 펼쳤으나 3승 4패에 그치면서 우승에 실패했다. 특히 2008-2009 시즌 대처 외국인으로 애런 헤인즈를 영입했으나 또 높이와 골밑에 문제점을 드러냈다.
이후 귀화 혼혈로 이승준을 영입했으나 골밑에 문제가 생기면서 2년 연속 6위에 그치게 된다.
재임기간 7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의 대업과 함께 절친인 서동철 수석코치와 함께 7년만에 삼성 썬더스에서 떠나게 되었다.
후임으로 김상준 감독과 이상민 감독이 맡았으나 모두 몰락하게 된다. 중간에 전임감독이자 스승인 김동광 감독이 재부임해서 한해 비밀번호를 끊었으나 다시 1년뒤 성적부진으로 사퇴했다.
2.2.2.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
자세한 내용은 안준호호 문서 참고하십시오.서울 삼성 썬더스 감독을 끝으로 야인으로 10년 넘게 있었던데다, 나이도 있어서 더 이상 감독직이고 행정직이고 해설직이고 어느 곳에도 전혀 생각이 없는 줄 알았으나 무려 13년 만에 감독으로 돌아오게 된다.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 대표팀 감독직을 맡았던 추일승 감독과 이훈재 코치가 역대 한국 농구 아시안 게임 두 번째 노메달 및 역대 최악의 성적인 7위에 그치며 계약 만료로 인해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이후 2023년 12월에 진행된 국가대표팀 감독 모집에 지원한 사실이 알려졌다. 과거 삼성 감독 시절 자신의 사단이었던 서동철 전 수원 KT 소닉붐 감독을 코치로 하여 함께 한 조를 구성해 같이 지원했다. 강을준 전 오리온 감독과 이상윤 전 상명대 감독과 면접을 보았다.
이후 12월 19일자로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는데, 프로팀 감독 시절 KBL 최고의 명장인 만수 유재학을 상대로 PO 연승을 거둘 정도로 훌륭했던 판짜기 능력과 서장훈, 이상민 등 개성 있는 선수들을 상대로도 분란 없이 팀을 안정적으로 운영한 부분이 재조명되며 기대를 받는 한편 현장에서 너무 오래 떠나있었고, 당시에 임기응변이 약점으로 손꼽혔던 부분이 우려를 받고 있다. 추가로 60대 후반 고령이라는 점 또한 최대 약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대표팀이 지난 9월에 열렸던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수비에서 큰 문제점을 드러냈기 때문인지 엔트리에 수비에 강점이 있는 오재현, 한희원을 넣어 더욱 탄탄해진 앞선을 기대케 만들었다. 특히 최준용의 대표팀 재선발과 관련해 기자들의 질문에 본인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공유하면서 소통하는 모습이 호평받았다.#
이후 2025 FIBA 농구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호주에게 고전 끝에 역전패를 당했지만 경기력이 좋았고, 이후 원주에서 태국과의 홈 경기에서 완승을 거두며 태극전사들의 첫 항해는 순항하고 있다.
이어서 2024년 7월에 열린 일본과의 원정 평가전에서 첫 경기를 잡는 대이변을 일으켰다. 비록 일본이 NBA 리거 2명을 빼고 하긴 했어도 귀화 선수를 투입시키고 올림픽 본선 진출 선수들을 다수 투입시킬 만큼 정예 멤버로 임했던 반면 한국은 라건아와의 계약 만료로 인해 귀화 선수가 없었고, 토종 선수들은 베테랑들이 다 빠진 채 젊은 선수들로만 구성할 만큼 1.8군 수준으로 상대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이겨버린 것이다.
승리와 함께 더 긍정적인 부분은 외곽 농구를 통해 일본을 두들겼는데, 불과 10개월 전 아시안 게임에서 일본의 2군 내지 3군 수준의 선수들이 펼친 외곽 농구에 처절하게 당해버리면서 낡은 농구를 한다는 비아냥까지 들었던 대표팀이 다시금 외곽 농구를 통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2.2.3. 통산 감독 성적
시즌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정규시즌 | 플레이오프 | |
1997-98 | 청주 SK 나이츠 | 45 | 13 | 32 | 10위 | - | |
1998-99 | 6 | 1 | 5 | [중도경질] | - | ||
<rowcolor=#0000CD> 통산 | 51 | 14 | 37 | 0.274 | - | ||
시즌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정규시즌 | 플레이오프 | |
2004-05 | 서울 삼성 썬더스 | 54 | 27 | 27 | 5위 | 4강 PO | |
2005-06 | 54 | 32 | 22 | 2위 | 우승 | ||
2006-07 | 54 | 29 | 25 | 5위 | 6강 PO | ||
2007-08 | 54 | 32 | 22 | 3위 | 준우승 | ||
2008-09 | 54 | 30 | 24 | 4위 | 준우승 | ||
2009-10 | 54 | 26 | 28 | 6위 | 6강 PO | ||
2010-11 | 54 | 27 | 27 | 6위 | 6강 PO | ||
<rowcolor=#074ca1> 통산 | 378 | 203 | 175 | 0.537 | V1 | ||
<rowcolor=#373a3c> 총계 | 429 | 217 | 212 | 0.506 | V1 |
2.3. 100승 단위 달성 경기
소속팀 | 시즌 | 승리 | 상대팀 | 일자 | 경기장 |
서울 삼성 썬더스 | 2006-07 | 100승 | 부산 KTF 매직윙스 | 2007년 3월 14일 | 사직실내체육관 |
2010-11 | 200승 |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 | 2010년 11월 30일 | 잠실실내체육관 |
2.4. 행정가 시절
삼성 감독을 그만둔 후 2011년 9월 1일 KBL 경기이사에 임명되고, 2년 뒤인 2013년 6월에는 전무이사직이 신설되자 해당직에 임명된다. 2014년에 미국 뉴욕의 세인트 존스 대학교의 객원코치로 1년간 연수를 갔다.3. 코칭 스타일
3.1. 장점
최대 능력은 단연 판짜기에 능하다는 것. 대표적으로 2005-06 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서장훈과 올루미데 오예데지의 더블 포스트를 상대할 준비를 하던 모비스에게 전혀 예상 외의 강혁 - 네이트 존슨의 2 대 2 플레이를 주력으로 삼아 허를 찔러버린 것이 대표적인 사례. 이 시즌에 삼성은 4강 플레이오프부터 챔피언결정전까지 7전 전승으로 모두 이기며 KBL 역사상 최초의 전승 우승의 위업을 달성한다.선수들의 기량 파악에 능하고,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시즌을 잘 꾸려간다는 장점이 있다. 포워드진이 부족할 때는 아예 3가드 시스템을 구사해서 상대를 누르기도 했는데, KBL에서 본격적으로 3가드 2센터 시스템을 쓴 것은 안준호 감독이 처음. 그 외에도 선수들이 개겨도 대충 받아주면서 팀 내의 분란의 요소를 잘 막아낸 것도 높이 살 부분이다.
작전 타임의 경우, 안준호 감독 자신은 이미 정해진 패턴을 이름 부르면서 확인만 하는 거라고 했다. 다만, 말이 영 개그화되는 것이 문제일 뿐. 그리고 정해진 패턴과 시즌 운용에 있어서는 탁월한 감독이다. 다만, 순간적인 전략과 임기응변에 있어서 다소 아쉬운 점이 드러났을 뿐이지, 선수들에 맞춰서 판을 짜오는 것은 KBL에서 손꼽히는 감독이다.
무엇보다 서울 삼성은 안준호 감독이 있을 때, 7년 연속 PO 진출 및 세 번의 챔프전 진출, 1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2010-11 시즌 챔프전 진출에 실패했다고 그와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대신 임명한
경기 | 상대 구단 | 결과 |
2005-2006 KCC 프로농구 챔프전 | 모비스 | 4:0 스윕승[9] |
2008-2009 동부프로미 프로농구 4강전 | 모비스 | 3:1 승[10] |
게다가 안준호 감독 재임 기간 동안 삼성이 모비스에게 강했다는 것도 재평가되었다. 7시즌 동안 플레이오프에서 두 번 만나서 다 이겼으며, 정규시즌에도 앞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11]. 유재학 감독의 모비스를 상대로 정규시즌 26승 16패를 기록했으며, 플레이오프에서는 7승 1패로 총 33승 17패를 기록했다. 상기했다시피 플레이오프에서는 그냥 이긴 게 아니라, 챔프전 최초 4전 전승과 4강 플레이오프에서 최초로 1위팀을 꺾고 챔피언결정전 진출 이게 바로 안준호 시절의 삼성이 유재학의 모비스를 상대로 세운 기록이다. 그가 나가고 난 뒤 4시즌 동안 삼성의 모비스 상대전적은 2승 22패인데다 그 2승도 2011-12 시즌의 김상준 체제 아래에서 이뤄낸 것이다.
3.2. 단점
이 시기에 팀이 하도 잘 나간 덕에 잘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비판받는 부분이 하나 있는데, 바로 신인 육성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성기에 돌입한 멤버들로 우승을 했지만, 외국인 선수나 이상민, 이승준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보강 없이 멤버를 그대로 끌고 가면서 성적은 점점 내려갔고, 사퇴 이후 팀의 고령화 문제까지 터지며 암흑기로 가는 원인을 만들었다. 호성적 때문에 불리한 드래프트 픽을 받아 어쩔 수 없다는 평가도 있지만, 비슷하게 픽 운이 없었던 전자랜드가4. 어록 제조기
이 때부터 흔히 아는 개그맨 이미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작전타임에서 좋게 말하면 민주적인, 나쁘게 말하면 선수들이 개기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었다. 확실히 작전 타임에서 영 말이 잘 안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특히 타임아웃 때 선수를 부르는 일명 출첵타임이 있다. 예를 들어 혁이, 정슥이, 규섭이, 시준이, 네이트, O, T로 줄여서 부른다.
긴 말 필요 없이 이 영상의 3분 33초부터 보자. 시기는 2007-2008 시즌 서장훈 대신 온 이상민이 합류한 시점이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혹자는 고려대학교 농구단의 박한 전 감독과 흡사하다고 한다.[14]
그 외에도 사자성어로 시즌 중 본인 팀 표현하기, 2008년 원주 동부 프로미와의 챔프전에서 치악산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 굴에 간다 드립 등등... 이 때문에 별명은 안어벙, 순식간에 개그맨이 되었다.
그래서 2006년 2월 5일 전주 KCC와의 경기에서 양복을 벗어던지고 항의하다 테크니컬 파울로 퇴장당했을 때, 또한 2007년 12월 20일 인천 전자랜드와의 원정 경기에서 안준호 감독이 심판 판정에 분노해서[15] 몰수패를 각오하고 선수단을 벤치로 모두 철수시키자 오죽하면 저 사람 좋은 안준호가 저러겠냐라며 심판이 뭔가 잘못했을 거란 반응이었을 정도(...).[16]
하지만 이걸로 안준호 감독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5. 기타
- 경기 중 위의 사진처럼 앉은 상태에서 코트를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본인은 앉은 상태의 각도에서 더 잘 보인다고.
- 상기했다시피 울산 모비스의 유재학 감독 상대로 저승사자와도 같은 상대 전적을 자랑한다. 특히 플레이오프에서는 7승 1패로 압도적 우위(이 중 4승은 2006년 챔결 때 스윕승으로 기록했다)를 기록 중이다. 그것도 2번 모두 하위팀이 상위팀(정규 리그 1위 팀)을 누른 업셋 승리라는 게 더 의미가 깊다. 그런 그보다 플레이오프 유재학 감독 상대 승률이 높은 감독이 있는데 삼성에서 선수로 뛴 적이 있는 김승기다.
6. 관련 문서
[1] 예전에는 安俊護였다가 1990년대 이후의 기사에서는 安俊濩로 기재되어 있다.[2] 음력 1956년 2월 2일[3] 삼성 썬더스 감독 시절 교회 집사로도 활동한 적이 있다. 출석하는 교회는 명성교회.[4] 어머니가 48세일 때 태어났으며, 바로 위 누나와는 11살 차이가 난다. 어머니는 2008년 11월, 향년 100세에 사망하였다.[5] 1997년 퇴임 후 일본 샹송화장품 여자농구단을 지휘하며 일본 여자농구 발전에 기여했다.[6] 이 기록은 불과 1년만에 대구 동양 오리온스가 그 전설의 32연패로 기록을 3배 가까이 늘여 놓는다.[중도경질] [8] 여기에 KBL 컵대회까지 우승하면서 트레블을 달성했다.[9] 역대 최초 챔피언결정전 스윕승이다.[10] 역대 최초 정규리그 1위팀이 4강에서 탈락했다.[11] 후에 안준호 감독이 물러난 뒤 후임 감독들이 모비스에게 철저히 승수 자판기로 전락당하면서 22연패까지 당했음에도 삼성과 모비스와의 상대전적이 비등했다.[12] 그리고 이상민은 그 다음 시즌 모비스와 상대전적 4승 2패로 6년만에 모비스 상대 우세를 기록했다. 마지막 경기에서 111:70(전반 스코어 64:20으로 KBL 한 경기 전반 최다 점수차 승리)으로 시즌 최다 점수차 승리를 기록한 건 덤.[13] 다만 이관희는 안준호 체제에서 뛴 적이 없었다.[14] 만약 김응용, 김성근이나 허재, 전창진, 유재학, 이정철 같은 감독에게 저랬다면 어떻게 될지는 상상해보라(...).[15] 이 당시 경기 내내 파울콜에 불만이 많았던 탓에 항의하면서 "시종일관 경기를 이렇게 하는 거 아냐. 선수들을 왜이렇게 억울하게 만드냐고. 훈련한 걸 선수들이 경기에서 써먹어야 할 거 아냐!"라며 강하게 항의했다.[16] 심지어 이 당시 엑스포츠 해설위원이었던 최인선 해설 또한 "웬만해서는 저렇게 흥분하지 않는 감독인데..."라고 말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