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 존스의 수상 및 영예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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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턴 셀틱스 등번호 13번 | |||||||||||||||||||||||||||||||||||||||||||||||||||||||||||||||||||||||||||||||||||||||||||||||||||||||||||||||||||||||||||||||||||||||||||||||||||||||||||||||||||||||||||||||||||||||||||||||||||||||
토드 데이 (1995~1996) | → | 단테 존스 (1997~1998) | → | 데이먼 존스 (1999) | ||||||||||||||||||||||||||||||||||||||||||||||||||||||||||||||||||||||||||||||||||||||||||||||||||||||||||||||||||||||||||||||||||||||||||||||||||||||||||||||||||||||||||||||||||||||||||||||||||||
안양 SBS스타즈-KT&G 카이츠 등번호 32번 | ||||||||||||||||||||||||||||||||||||||||||||||||||||||||||||||||||||||||||||||||||||||||||||||||||||||||||||||||||||||||||||||||||||||||||||||||||||||||||||||||||||||||||||||||||||||||||||||||||||||||
김태완 (2002~2004) | → | 존스 (2004~2006) | → | 김일두 (2006~2009) | ||||||||||||||||||||||||||||||||||||||||||||||||||||||||||||||||||||||||||||||||||||||||||||||||||||||||||||||||||||||||||||||||||||||||||||||||||||||||||||||||||||||||||||||||||||||||||||||||||||
안양 KT&G 카이츠 등번호 11번 | ||||||||||||||||||||||||||||||||||||||||||||||||||||||||||||||||||||||||||||||||||||||||||||||||||||||||||||||||||||||||||||||||||||||||||||||||||||||||||||||||||||||||||||||||||||||||||||||||||||||||
홍사붕 (2004~2006) | → | 존스 (2006~2007) | → | 양희종 (2007~2009) |
미국의 前 농구선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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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셀틱스 시절. | ||||
안양 KT&G 카이츠 시절 | }}} | |||
<colbgcolor=#eeeeee,#191919> 단테 존스 Dontae' Jones | ||||
출생 | <colbgcolor=#ffffff,#191919>1975년 6월 2일 ([age(1975-06-02)]세) | |||
미국 테네시 주 내슈빌 | ||||
국적 | 미국 | |||
학력 | 내슈빌 스트라트포드 고등학교 - 미시시피 주립대학교 | |||
신체 | 키 194.7cm|체중 100kg | |||
포지션 | 스몰 포워드,파워 포워드[1] | |||
프로 입단 | 1996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21번(뉴욕 닉스) | |||
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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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前 농구선수. 미시시피주립대학 재학시절 모교를 NCAA 파이널 4에 올려놓았던 선수이며 하위권팀 안양 SBS를 흥행의 주역으로 만들었던 선수로 한국에서의 별명은 '단선생' '단교수', 안양의 명예시민이다.아쉽게 단테 존스 이후 1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 이후 어떤 국내외 KBL 선수도 단테 존스 만큼의 임팩트를 주지 못했다. 비단 실력을 넘어서서 농구에 무관심 했던 일반 시민과 언론들이 점차 주목을 했으며 주중 정규 시즌게임 조차 관중들이 몰릴 정도였으니 실력과 스타성 모두를 갖춘 몇 안 되는 선수였다.
2. 선수 시절
2.1. KBL 이전 시절
테네시 내슈빌 출생으로 노스이스트 미시시피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미시시피 주립대로 전학을 했으며, 전학 후인 1995-96 시즌에는 리차드 윌리엄스[2] 감독의 지도 하에 에릭 댐피어 등과 함께 당대 최강인 켄터키 대학교를 꺾는 파란을 일으키며 NCAA Division I 남자농구 챔피언십 파이널 포에 팀을 올려놨다. 이 활약으로 1996년 NBA드래프트[3] 1라운드 21순위로 뉴욕 닉스에 선발된다. 그러나 데뷔 시즌은 발 부상으로 한 경기도 뛰지 못했으며, 2년차인 97-98시즌 시작이전 보스턴과의 트레이드에 포함되며 셀틱스에서 첫 프로 데뷔를 한다. 그러나 스몰포워드치고 다소 애매한 사이즈(?)[4], 수비력 등의 문제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NBA에서 통산기록은 97-98 15경기동안 평균 6.1분 2.9점 0.3어시스트 0.6리바운드 0.2블럭 0.1스틸, 야투율 33.3%, 3점슛 성공률 26.1% (자유투 시도/성공 없음)란 미미한 기록만을 남기고 한 시즌만에 방출되었다.이후 여러 해외 리그에서 활약하며, ABA와 CBA를 통해 NBA에 꾸준히 노크중에 있었다.
2.2. 안양 SBS 스타즈-KT&G카이츠 시절
04-05 시즌 안양 SBS는 중하위권을 전전하며 고전하던 중 주력 득점원 조 번[5][6]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며 대체 선수를 물색했다. 그 중 눈에 들어온 것은 ABA 득점왕인 단테 존스였고 계약을 추진했으나 난항을 겪는다. 이전부터 많은 팀들이 눈독을 들였으나 NBA 진출, 가족 등을 이유로 거절해온 것. 존스와 접촉한다는 것을 우연히 안 당시 안양의 주전 센터이자 존스가 존경하는 선배인 주니어 버로의 조언으로 단테 존스는 KBL 무대에 등장한다.그리고 안양 SBS 스타즈는 15연승[7]을 질주하며 3위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다. 시즌 기록은 16경기, 29.38득점 12.1리바운드 3.4어시스트. 기록도 기록이지만 이 때의 단테 존스는 그야말로 언터쳐블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문경은의 말을 빌리자면 '어린아이가 노는 곳에 어른이 왔다'. NBA에서나 보여주던 기술들을 연일 쏟아내며 최전성기의 김주성마저 어린아이 손목 비틀듯 간단히 제압하며 기량을 과시했다.
단순히 기량 뿐만 아니라 흥행에서도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가졌던 선수였는데, 이 때 단테 존스가 불러왔던 흥행이 얼마나 뜨거웠는가 잠시 설명을 하면 팬서비스, 기량, 쇼맨쉽 모든 것을 갖춘 단테 존스의 등장에 평균 2600여 명 정도가 경기장을 찾았던 안양의 홈 경기는 존스 영입 이후 4200여 명이 몰려들어 무려 갑절이나 관중이 늘어났고, 주말의 경우는 입석표도 팔리는 등 관중몰이를 했다. 특히 2005년 3월 1일 부산 KTF와의 경기에서는 6,625명의 관중이 입장, 개관 이래 최다 관중 2위를 기록하는 등 이 경기를 93-88로 승리하며 KBL 창단 후 최다인 12연승을 달성한 이후에는 관중 몰이가 더욱 가속화되어, 시즌 마지막 5경기에서는 평균 관중이 무려 5,200명에 달하기도 했다. 존스의 영입 이후 SBS 구단 홈페이지의 조회 수는 8만여 회에서 20만여 회로 뛰어올랐고, 회원 가입 인원도 4배나 뛰었다. 남자 프로농구의 인기 상승에도 한몫 단단히 했다. 존스가 나타난 후 농구 시청률과 TV 중계 횟수는 두 배 가까이 늘어났고, 최종적으로 100만 관중을 처음으로 달성하며 방점을 찍는다.
그러나 우승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 6강 플레이오프에서는 대구 오리온스를 2전 전승으로 싱겁게 제압했지만, 존스는 두 경기에서 오리온스의 수비에 막혀 1차전에서 14점, 2차전에서 21점으로 정규리그만한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4강 플레이오프에서는 전주 KCC의 노련함과 조성원의 3점을 막지 못한 채 단테 존스의 활약을 뛰어넘고 1승 뒤 3연패로 아쉽게 패퇴, SBS의 단테 열풍은 4강에서 멈춰서게 된다. 그리고 이 시즌을 끝으로 안양 SBS는 KT&G에게 27억을 받는 조건으로 매각해 안양 KT&G로 바뀐다.
2.3. 불발에 그친 우승도전. 신드롬에 그치다.
KT&G로 이름이 바뀐 이래 첫 시즌인 2005-06시즌. 이 당시 안양은 최소 4강 이상 혹은 우승 후보로까지 거론되었는데, 단테 존스와 재계약에 성공했고 주희정-양희승-은희석으로 이어지는 희트리오와 김성철-양희승 쌍포도 건재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일부 전문가들은 15연승 당시 파괴력이 발휘된다면 전무후무한 9할대 승률 1위까지 예상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안양의 창단 이래 최고 성적을 전망한 사람들이 많았다. 다만 변수는 무시할 수 없었는데, 지난 시즌 후반기 돌풍을 일으킨 존스가 이번 시즌에는 다른 구단들의 외국인 선수들의 위력과 철저한 경기 패턴 분석으로 인해 예전만큼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대다수였다.우려대로 KT&G를 제외한 다른 9개 구단들이 존스의 단점과 경기 패턴들을 분석하며 조던룰을 연상시키는 '존스룰'까지 들고나오며 단테 존스와 안양은 이전만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이미 전 시즌 막판에 존스의 플레이 스타일을 분석한 타 팀들은 이미 존스에 대한 철저한 대응책을 마련해놓은 상태였고, 여기에 루이스 로, 크리스 윌리엄스, 피트 마이클 등 해외 상위리그에서 뛰던 선수들이 대거 입성해 외국인 선수들의 레벨이 상향평준화되면서 04-05시즌과 같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자태는 재현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시즌 첫 6경기에서 고작 평균 19.7점 10.5리바운드에 그치는 등 부진으로 인해 한 때 퇴출설까지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11월 6일 대구 오리온스와의 경기에서 38점을 올린 것을 시작으로 다시 지난 시즌의 폭발적인 득점력을 되찾으며[8] 김성철, 양희승 등 쌍포를 비롯해 새로 영입한 센터 가이 루커가 무릎 부상으로 중도 퇴출되는 [9]악재속에서도 2라운드 까지는 9승 7패로 선전했다. 하지만 루커의 대체선수로 영입된 허브 래미자냐는 100kg이 채 되지 않는 체중으로 이 당시 거구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설상가상 시즌 중반 이후에는 양희승-김성철 쌍포가 번갈아 부상을 당한 것을 비롯해 부상 악령이 쏟아지며 존스에 대한 의존도를 더욱 가중시켰다. 결국 KT&G는 3라운드 첫 경기에서 당시 꼴찌 인천 전자랜드에게 68-87 대패를 당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10경기에서 4연패와 6연패 포함 고작 1승 10패, 3라운드 들어 1승 8패의 최악의 성적을 거두며 9위까지 추락[10], 2라운드까지 간신히 유지했던 5할 승률도 다 까먹으며 최악의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오죽했으면 이 때 꼴찌의 레전드의 32연패 시절 이후 가장 압도적인 꼴찌를 시전중인 개그랜드에게도 밀려 꼴찌로 추락한다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 실제로 4라운드 한 때 4연승으로 반짝 상승했지만, 이후 다시 4연패를 당하는 등 이 당시 14경기에서 고작 4승에 그쳤다. 2라운드 이후부터로 따지면 5승 14패. 이 기간 동안 그들보다 못한 팀은 인천 전자랜드 뿐이었다. 그리고 4라운드 종료 시점까지 쭉 9위에 머무는 등 플레이오프 탈락이 눈 앞에 다가온 듯 했다.
그러나 5라운드 이후부터 안양은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다. 단테 존스가 지난 시즌을 연상케하는 가공할 득점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래미자냐를 퇴출한 뒤 데려온 안토니오 키칭스는 145kg에 달하는 웨이트로 타 팀의 거구들에게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존스와 국내선수들의 부담을 덜어줬다. 시즌 내내 부상으로 엇박자 행보를 이어오던 양희승-김성철 등 국내 선수들도 부상 복귀 이후 서서히 손발이 맞아가기 시작하며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다. 5, 6라운드에서 비록 전 시즌과 같은 폭발적인 연승은 없었지만, 시즌 전 보여줬던 롤러코스터 모습에서 벗어나며 5, 6라운드에서 나란히 6승 3패를 기록하며 6강권을 위협한다. 그러나 사실상 6강 경쟁을 위한 마지막 기회였던 결국 3월 22일 대구 오리온스와의 경기에서 83-98로 대패하며 남은 2경기를 모두 이기고 오리온스가 2경기를 모두 패배해야만 6강에 진출하게 되는 상황에 몰렸다. 다음 경기인 인천 전자랜드와의 경기에서 91-83으로 승리했지만, 곧바로 다음날 대구 오리온스가 서울 SK를 37점차로 대파해 플레이오프 탈락이 확정됐다. 최종 성적은 27승 27패로 정규리그 7위. 시즌 전 9할대 승률까지 예상했던 팬들은 충격적인 결과물일 수밖에 없었는데, 찰스 민랜드를 제치고 득점왕에 올랐지만 플레이오프에 진출 못했다는 것이다.그나마 시즌이 끝나고 단테 존스가 안양 명예시민으로 선정됐다는 것과 지난 시즌 후반부와 유사한 뒷심을 발휘했다는 것은 위안거리였다. 다만 이 시즌을 기점으로 존스의 다혈질 기질과 지나친 개인플레이는 팀 관계자들과 팬들 사이에서 도마에 오르게 된다.[11]
그 다음 시즌인 2006-07시즌은 전 시즌과 달리 약체로 평가받는다. 김성철이 FA로 인천 전자랜드로 이적했고 시즌 전 부터 존스를 보좌할 용병이 기량 미달로 퇴출됐다. 이 당시 김동광 감독 역시 단테의 다혈질 기질과 개인플레이로 재계약을 극도로 꺼렸다. 팀 동료들 역시 단테의 개인 플레이와 다혈질 기질을 못마땅해했다는 후문. 그러나 당시 단테의 의존도가 높았던 KT&G는 다시 재계약을 하며 단테를 한 시즌 더 끌고 가기로 결심한다. 이 때 단테는 홍사붕이 은퇴하면서 등번호를 32번에서 11번으로 바꾸게 되는데 당시 큰 딸이 11살이었고, 본인의 프로 인생이 11년차여서 바꿨다고 한다. 이 후 32번은 전자랜드에서 김성철의 보상선수로 온 김일두가 달게 된다.
1라운드에서는 시즌 초반 49점을 기록하는 등 가공할 위력을 보인 단테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국내 선수진의 극심한 부진으로 인해 애를 먹었다. 1라운드 9경기 중 무려 6경기에서 30점을 넘겼지만, 이 경기에서 3승 밖에 거두지 못했다. 웨슬리 윌슨은 당시 "강백호먼"이라 불린 제러드 호먼과 더불이 최악의 선수로 거론되고 1라운드만에 퇴출됐다. 1라운드 성적은 4승 5패.
KT&G는 이번 시즌에도 시즌 중반 악몽을 피하지 못하게 된다. 1라운드에서는 그나마 어찌어찌 단테로 버텼고, 윌슨을 퇴출하고 2년 만에 주니어 버로가 다시 돌아온 후 5승 5패를 기록하며 공동 4위까지 올랐지만, 이후 단테의 개인 플레이가 나아지지 않았고, 국내 선수들은 부상에 시달렸으며, 설상가상 주니어 버로마저 부상으로 인한 체력과 훈련량 부족으로 예년만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등 여러가지 악재가 겹치며 2라운드에서 5연패 포함 2승 7패에 그치며 9위까지 추락, 결국 김동광 감독은 경질되었다. 이 후 KT&G는 당시 신선우 감독 밑에서 창원 LG 세이커스 코치를 하고 있던 유도훈 코치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리는듯 했던 KT&G였지만, 오히려 KT&G는 단테 존스의 득점력을 줄이는 대신 중심 축을 주희정으로 옮기며 주희정이 리딩을 주도해서 국내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는 농구로 변신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즉각 효과를 봤다. 단테는 3라운드에서 평균 득점이 20점에도 미치지 못하는 등 부진했지만, 3라운드에서 기존의 양희승이 살아나고 김일두, 이현호 등 식스맨들이 점차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며 서서히 팀 성적이 상승곡선으로 돌아선다. 3라운드에서는 2승-1패 패턴을 반복하며 6승 3패를 기록하며 다시 중위권 경쟁에 뛰어든다. 이후에 KT&G는 여러차례 오락가락한 모습을 보이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지만, 단테 존스가 시즌 마지막 2경기에서 연이어 4쿼터에 괴력을 발휘하며 자력으로 2004-05시즌 이후 2년만에 6강 진출을 확정짓는다. 최종 성적은 25승 29패. 역대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던 팀들 중 3번째로 낮은 성적임에도 갖은 악재를 극복하고 6강에 올랐다.[12]
그토록 어렵게 오른 6강 플레이오프였지만, 정작 플레이오프에 들어서면서 단테의 고질병이었던 다혈질 문제가 기어코 터지고 말았다. 1차전에서는 필립 리치와 신경전을 펼치다 멱살까지 잡혔고, 특히 3쿼터에는 캐링 더 볼 판정까지 받으면서 심판에게 강하게 항의하다 테크니컬 파울까지 받았다. 결국 단테는 화를 참지 못하고 4쿼터에 슛만 난사하며 경기를 그르쳤고, 경기 종료 2.5초 전에는 농구공을 천장으로 걷어차는 볼성싸나운 행동까지 저지르며 퇴장당했다. 36점 10리바운드라는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단테는 팬들에게 강한 비판을 받았다.
다음 경기에서는 경기 시작 전 코트 중앙에서 공식 사과를 하는 등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판정 항의도 없었다. 1-3쿼터에 꾸준히 10점씩 기록하며 팀을 이끌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리는 듯 했다. 그러나 4쿼터 초반 4반칙에 걸리면서부터 흔들린 단테는 72-72 동점 상황에서 하프라인 바이얼레이션 이라는 오심으로 인해 다시 흥분하게 된다. 이번에는 그래도 이전처럼 크게 흥분하지는 않고 비교적 빨리 추스른 모습을 보였으나, 단테는 결국 4쿼터에 1점 밖에 넣지 못했다. 주심점을 잃은 KT&G는 4쿼터에 11-24로 압도적인 열세로 인해 전반 한 때 21점차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81-89로 역전패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이후 단테는 KBL의 트라이아웃제도 부활에 따라 돌아오지 못하면서 이 시즌이 결국 단테의 대한민국 커리어 마지막 시즌이 됐다.
여담으로 이 시기 단선생의 명언이자 두고두고 회자되는 용어로 "KBL is my NBA."가 있다.
2.4. 해외 선수 시절
은퇴 이후 래퍼로 활동하면서 찍힌 사진
이후 중국리그에서 뛰었다가 2013년 멕시코리그에서 은퇴했다. 이후에는 개인 음반을 내고, 지역 농구 행사에 참여해 지내는것으로 보인다. 내슈빌 유소년 농구 아카데미 원장이라고 했다. 현재까지도 지역에서 인디 래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모양이다.
여담으로 2007년 말, 중국 운남에서 득점왕으로 활약하고 있던 중, 한 관중이 코트로 생수병을 던졌는데, 격분한 나머지 그 생수병을 다시 관중석으로 던지면서 징계를 받게 됐다. 결국 단테는 중국에서 퇴출되고 말았다. 이 당시 팬들은 KBL를 뒤바꿔놓은 단테 신드롬이 중국에서 고생하고 있다며 거친 행동에 대한 비난 보다는 아쉬운 반응이 대다수였다.[13]
2.5. 플레이 스타일
현대 농구로 치면 리그 최고의 공격형 슈퍼스타.[14][15] 그러나 수비력 부재로 인해 만능 슈퍼스타가 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빼어난 운동능력과 슈팅, 기술을 겸비한 선수였다. 포스트업에 이은 턴어라운드 페이더웨이슛은 알고도 못막는 전매특허였고, 팬들은 이를 "사기 더 웨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슛거리 또한 길어서 3점 라인 보다 훨씬 뒤에 있는 라인[16]에서도 3점슛을 어렵지 않게 꽂아 넣었으며, 특히 한 번 터지기 시작하면 상대의 수비에 관계없이 3점슛 3-4개는 아무렇지 않게 꽂아넣는 폭발력까지 발휘했다. 실제로 단테는 한 쿼터에 20점 이상 몰아넣는 폭발력을 여러차례 발휘했으며, 2005-06시즌 원주 동부와의 1라운드 맞대결에서는 1쿼터에만 3점슛 6개를 모두 꽂아 넣는 괴력을 발휘하며 당시 한 쿼터 최다 득점 타이인 24점까지 몰아친 바 있다.
또한 운동능력과 탄력이 워낙 좋아 경기 도중 호쾌한 덩크슛을 2-3차례 이상 터뜨려 KBL 내에서도 수많은 팬덤을 거느렸고, 신장대비 리바운드 능력도 좋아 매 시즌 경기당 평균 10개 이상의 리바운드를 잡아냈다. 이렇듯 공격 부분에 있어서는 딱히 흠잡을 수 없는 KBL 모든 선수들을 통틀어도 완전체에 가까운 기술을 구사했다.
뿐만 아니라 위에서 언급했듯 쇼맨십이 대단히 뛰어나 매 경기 끝나고 인터뷰도 마다하고 팬들에게 가장 먼저 다가가 감사 인사를 건냈으며, 경기 중간중간 화려한 세레머니[17]를 선보여 경기 외적으로도 팬들을 즐겁게 했다. KBL 올스타전과 같은 번외 경기에서도 경기 결과에 구애받지 않고 화려한 쇼맨십을 선보였다. 이 때문에 2021년 현재도 역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를 거론할때 항상 빠지지 않는 선수이라는 것은 틀림없다.[18]
공격 부분에서의 약점도 물론 있다. 빠른 스피드에 비해 돌파를 자주 시도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무릎부상으로 인해 가로 움직임의 부담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다양한 공격 옵션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돌파는 성공하면 그만이고 아니면 다른 옵션을 사용하겠다는 식으로 플레이했다. 잘 풀리는 날에는 전매특허인 페이더웨이를 이용해 어떻게든 우겨넣지만, 워낙 고난이도의 슛인 문제도 있고 하여 그 성공률이 일정하지 못했다. 특히 오른쪽으로 턴하는 페이더웨이에 비해 왼쪽으로 턴하는 경우 성공률이 떨어져, 이를 간파하고 수비를 시도할 경우 한 쿼터 내내 고전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19] 한편, 의외로 노마크 상황에서의 미들슛을 놓치는 등 터프 플레이의 달인치고 기본적인 실수를 종종 범하곤 했는데, 경기 내외적으로 선수 자체의 멘탈 문제와 분리할 수는 없을 듯하다.
무엇보다 수비력에서 큰 약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수비상의 약점으로는 몸싸움을 기피하는 점이었다. 그렇지만 대학 농구 시절부터 운동선수로서의 성실성(work ethics)이 뛰어난 선수로 유명했기 때문에 적극성보다는 무릎의 부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단테 존스는 동 포지션의 중량급 선수에게는 1:1에서 고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지역방어 상황에서 압도적인 점프력을 토대로 상대 센터에게 호쾌한 블록슛을 먹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덕분에 단테 존스는 리바운드에서도 PF 포지션 중 최고 수준의 수치를 기록했다.
무엇보다 단테의 가장 큰 단점은 바로 다혈질 성격. 데뷔 초창기에는 그리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패턴이 노출되고 외국인 선수 수준이 상향된 2005-06시즌 부터 본격적으로 터진 문제다. 이로 인해 KBL에서 최상위 클래스 5인 안에 들어가는 실력을 가지고도 기복이 심한 플레이로 이어졌다. 한 마디로 감정 기복이 매우 심했다. 이에 따라 경기의 잘 되는 날과 안 되는 날의 편차가 심했으며, 경기 중간중간 심판에게 과도한 어필과 돌출행동 등으로 해를 끼치는 경우도 잦았다. 그리고 이는 2006-07시즌 중반 김동광 감독의 자진사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때문에 수비력과 더불어 커리어 내내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3. 시즌별 성적
역대 성적 | ||||||||||
시즌 | 소속팀 | 경기수 | 2점슛 | 3점슛 | 자유투 | 득점 | 리바운드 | 어시스트 | 스틸 | 블록슛 |
1997-98 | BOS | 15 | 19/57 (33.33%) | 6/21 (28.58%) | 33 | 9 | 4 | 1 | 13 | |
NBA 통산 (1시즌) | 15 | 19/57 (33.33%) | 6/21 (28.58%) | 33 | 9 | 4 | 1 | 13 | ||
시즌 | 소속팀 | 경기수 | 2점슛 | 3점슛 | 자유투 | 득점 | 리바운드 | 어시스트 | 스틸 | 블록슛 |
2004-05 | SBS | 16 | 151/251 (60.16%) | 32/80 (40.00%) | 72/86 (83.72%) | 470 | 194 | 54 | 39 | 17 |
시즌 | 소속팀 | 경기수 | 2점슛 | 3점슛 | 자유투 | 득점 | 리바운드 | 어시스트 | 스틸 | 블록슛 |
2005-06 | KT&G | 54 | 506/935 (54.11%) | 138/372 (36.07%) | 151/202 (74.75%) | 1,577 (1위) | 577 | 108 | 98 | 35 |
2006-07 | 54 | 540/1145 (47.16%) | 137/378 (36.24%) | 155/205 (75.61%) | 1,372 | 525 | 127 | 97 | 33 | |
KBL 통산 (3시즌) | 124 | 1038/1917 (54.15%) | 302/812 (37.19%) | 370/482 (76.76%) | 3,352 | 1277 | 286 | 229 | 85 |
4. 관련 문서
[1] 단 KBL 무대에서만 파워 포워드로 골밑공격을 했는데 외곽슛을 던지는 경우가 많았다.[2] 1945년 8월 22일 미시시피 주 펄 출생. 1967년 미시시피 주립대학교 졸업 후 코피아 링컨 커뮤니티 칼리지 농구부를 시초로 사우스 나체즈 고등학교, 잭슨 세인트 앤드류 고등학교, 몬테벨로 중학교 등지에서 코치를 맡다가 1984년 모교인 미시시피 주립대학교 코치로 전근가서 밥 보이드(1930~2015) 감독을 보좌했다. 1986년부터 감독으로 승진해 임기 12년 동안 존스와 댐피어 외에 훗날 부산 kt 소닉붐의 용병으로 알려질 타이론 워싱턴도 발굴했다. 퇴임 후 미시시피 혼독스(ABA), 펄 고등학교, 잭슨 레이지(WBA) 등을 거쳐 2008~2009년 사이에 앨라배마대 버밍햄 캠퍼스(UAB)와 루이지애나 공과대학교에서 농구부장을 맡았다. 2014년 아칸소 주립대학교 코치를 끝으로 일선에서 물러나 미시시피 주립대의 라디오 농구중계 해설위원을 6년 간 맡다가 2020년에 서던 미시시피 대학교의 특임코치로 복귀해서 1시즌 간 맡았다.[3] 앨런 아이버슨, 스티브 내시, 레이 앨런, 코비 브라이언트등 전설적인 선수들이 드래프트 된 해이다. 즉 무려 MVP만 3명이 나왔고 이 선수들 제외 했을때 스테판 마버리, 샤리프 압둘 라힘, 앤트완 워커, 저메인 오닐, 마커스 캠비 등 올 NBA, 올스타, 국가대표, 올해의 수비왕 등 타이틀이 있는 선수들도 수두룩했다. 또한 유럽출신인 페자 스토야코비치,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도 이 해 드래프트에서 선발된 선수들로 각 각 98/99, 97/98 시즌에 입성했다. 조던, 하킴, 바클리, 스탁턴, 윌리스등이 입성한 84년 이후 가히 최고수준 이라고 자랑할만한 1996년 이다.[4] 당시는 드래프트 사전 신체검사결과가 공표되기 전이라 NBA에서 측정된 그의 신장이 정확히 얼마 정도인지 불명인데, NBA에선 6피트8인치(203cm)로 표기되었다. 이는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스몰포워드로선 전혀 부족한 사이즈가 아니다. 다만 KBL 신장이 진짜일 경우 이는 6피트 4인치 2/3 정도로 신발신고 6피트6인치가 조금 넘는 키인데 스몰포워드로선 확실히 애매한 신장이다. 존스의 플레이스타일상 돌파가 적고 외곽슛의 비중이 높은데, 이런 선수는 신장/운동능력 면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면 딱히 공격옵션으로 써먹기 힘들다. 반대 케이스가 6피트6인치 키로 같은 시기에 준올스타급으로 한때 20점 이상까지 넣어줬던 코리 매거티인데, 매거티의 경우 탄탄한 운동능력과 확실한 골밑마무리 능력으로 돌파를 하면서 자유투를 엄청나게 많이 얻어내는 스타일이었다. 그렇다고 단테가 전문슈터급 슈터였던 것도 아니고 수비도 약하니 NBA기준으론 딱히 써먹을 데가 없었던 선수.[5] 아르헨티나 리그 MVP 출신으로, 당시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던 선수라 부상으로 교체가 확정되었을 때 SBS 팬들은 꽤 아쉬워했지만, 존스의 맹활약과 함께 광속으로 잊혀졌다(...).[6] 단테 존스가 올 때까지 공동 6위로 플레이오프 진출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7] 시즌 최종전에서 LG에게 패배해서 16연승이 좌절되었다. 그래도 2011-12시즌 동부가 16연승으로 갱신하기 전까지 한 시즌 KBL 최다 연승기록으로 2021-22시즌 서울 SK와 공동 2위.[8] 당시 KBL 역사상 두 번째로 4경기 연속 40점을 퍼부었다.[9] 표면적인 이유는 부상이 맞지만, 자세히 파고들면 당시 루커가 부상을 숨기고 뛴 것에 대해 김동광 감독이 괘씸죄를 적용시켰다는 의견이 많다.[10] 당시 꼴찌였던 전자랜드도 첫 연승을 포함해 2승 7패를 거둔 상황이었다.[11] 다만 이는 반론도 만만치 않게 존재한다. 직전 시즌과 달리, KT&G는 당시 10개 구단들과 비교하더라도 가장 심각한 부상 악재에 시달렸으며, 애당초 팀 플랜 자체를 존스에게 맞춘 이후 나머지 선수들이 존스의 공격력을 극대화시키는 구조로 팀을 맞춘 것을 감안하면, 이래저래 존스 없이는 팀 전체가 굴러갈 수 없던 상황이었다. 다혈질 성격은 본인의 성격이니 치차히더라도 개인플레이는 팀 사정상 면죄부가 주어져야 마땅했다.[12] 가장 낮은 성적으로 6강에 진출한 팀은 2012-13시즌의 서울 삼성 썬더스(22승 32패/승률 40.7%). 그러나 이 당시에는 고의 패배 의혹과 승부 조작으로 인해 경쟁자들이 대놓고 탱킹을 거듭했기에 관점에 따라서는 평가가 다소 엇갈린다. 사실 외적인 악재를 모두 뺀 체 냉정하게 경기력 측면만 봤을때는 삼성 역시 진작에 PO경쟁에서 탈락했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었던 상황이었다. 실제로 힘겹게 오른 6강 PO에서 3위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에게 3전 전패로 물러났다.[13] 이 당시 리그 전체 평균 득점 1위(32.3점)를 달리고 있었으며, 한 경기에서는 1쿼터에만 무려 3점슛 6개를 연속으로 넣는 묘기까지 선보이며 한 쿼터 최고 득점인 31점까지 기록했었다.[14] 단, 제임스 하든과 달리 존스는 돌파력이 떨어졌고, 슈팅 의존도가 심해 잘되는 날과 안되는 날의 편차가 크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그로 인해 자유투 획득 능력도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15] 그러나 2022년 기준으로 하든 역시 팬텀 파울 강화로 인한 규정으로 인해 자유투 획득 횟수가 크게 감소했고, 무엇보다 전성기 시절 무리한 혹사로 인한 에이징-커브(노쇠화)가 오면서 기량이 급격하게 하락했다. 이로 인해 전성기 시절보다 신체밸런스가 떨어저 슈팅 의존도와 잘할때와 못할때 편차가 매우 심해진 것이 단테와 닮은 점이다.[16] 현대 용어로는 이른바 Deep-Three라고도 한다. NBA에서 스테판 커리, 데미안 릴라드가 대표적인 Deep-Three 장인들이다.[17] 안양 SBS가 15연승을 달리던 당시 리마리오 세레머니가 대표적이다.[18] 물론 제러드 설린저라는 역대 최고의 NBA 경력을 지닌 외국인 선수가 들어온 2020-21시즌 안양 KGC인삼공사가 사상 첫 플레이오프 전승(10연승) 우승으로 인해 존스의 열풍까지 갈아치웠다.[19] 하지만 존스는 기본적으로 공격 옵션이 다양한 선수였기 때문에 기복 문제를 제외하면, 한 경기 내내 득점력이 매우 저조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