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09 20:23:41

울트라토리당

Ultra-Tories Party
한글명칭 울트라토리당
창당일 1829년
해산일 1830년대
당수 리처드 비비안
에드워드 내치불
하원의원
60석 / 658석 (9.11%)[1]
후계정당
이념 보수주의
반가톨릭주의
사회보수주의
고전적 휘그주의[2]
정치적 스펙트럼 우익~극우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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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세기 영국에서 친성공회, 반가톨릭 성향을 띄는 보수 정당이었고, 1829년 가톨릭 해방령이 제정되자 당시 여당토리당에서 탈당한 파벌이 창당했다.

기존의 영국 보수 진영을 주도하던 토리당보다도 더 강경하고 과격한(Ultra) 노선을 추구해서 울트라토리당(Ultra-Tories)라고 불리게 되었다.[3]

본인들은 스스로를 토리당이라고 불리는 것을 거부했으며, 자신들이야말로 1688년 명예혁명 정신과 고전적 휘그당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명예혁명은 가톨릭 국왕과 가톨릭을 완전히 배제하고 프로테스탄트 국교회의 절대적 우위를 확인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이들이 비판하는 주요 대상은 휘그당 보다는 같은 토리당 정치인들, 그 중에서도 가톨릭 해방을 주도한 아서 웰즐리 공작과 보수정당 정치인이라기에는 특유의 고전적 자유주의 성향이 강하던 로버트 필이었다. 특히 웰링턴 공작에 대해서 그가 당내 대표적인 보수파 정치인이었음에도 '웰링턴이 영국 헌정과 국체를 파괴한다'며 살벌하게 비난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사실상 그의 가장 큰 정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830년 총선에서 토리당이 분열 때문에 대패한데다가,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등 정국이 격동하자 결국 당은 해산되고 소속 의원들은 모두 토리당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얼마 안가 곡물법 폐지 문제로 인해 당이 다시 자유무역파(로버트 필 등)와 보호무역파로 분열되자 보호무역파에 속해 로버트 필을 강경하게 비판하며 결국 필파가 당의 주도권을 잃게 만드는 데에 공헌했다. 이후 필파는 결국 토리당을 떠나 휘그당에 합류하여 자유당을 결성한다.

휘그당의 찰스 그레이 총리를 중심으로 참정권을 확대하고 선거제도를 대거 개편하는 1832년 개혁법이 정계의 이슈로 떠오르자, 당내 온건파인 필파와 보수파인 웰링턴파가 모두 합심해 강경하게 반대하는 상황에서, 필과 웰링턴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킬 수 있으리란 이유로 당 내 파벌들 중 유일하게 개혁에 찬성했다(...) 다만 모두가 개혁에 찬성한 건 당연히 아니고, 민간에서는 이 파벌 지지자들 대부분은 당연히 개혁을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결론적으로 이 법이 통과된 후 치른 1832년 총선에서 토리당이 역대급 참패를 당하는 바람에, 개혁에 찬성한 것이 무색하게 정치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1] 1830년 영국 총선 직후 의석수[2] 영국 국교회 지상주의, 극단적인 반가톨릭주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기반한 사회질서 유지, 프로테스탄트 엘리트가 구성하는 의회에 의한 지배[3] 여담으로 비슷한 시기 프랑스의 극단적 왕당파 세력을 이 파벌처럼 ultra를 붙여 초왕당파(ultra-royalist)로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