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드라마)|
]]
- [ 등장인물 ]
- ||<tablewidth=100%><width=1000><tablebgcolor=#2d2f34><bgcolor=#d0b483><color=#000000><-4> ||
그 외 등장인물 및 특별출연은 등장인물 문서 참고.
- [ OST ]
- ||<tablewidth=100%><tablebgcolor=#2d2f34><tablecolor=#ffffff><nopad>
[[원경(드라마)/음악#s-2.1| Part 1그 날]]
[[소향|소향]]
2025. 01. 07.[[원경(드라마)/음악#s-2.2| Part 2안개가 지나면]]
[[유다빈|유다빈]]
2025. 01. 21.[[원경(드라마)/음악#s-2.3| Part 3꿈이여 그대여]]
[[임한별|임한별]]
2025. 01. 28.[[원경(드라마)/음악#s-2.4| Part 4단 한 순간]]
[[적재|적재]]
2025. 02. 04.[[원경(드라마)/음악#s-2.5| Full Track원경 OST]]
Various Artists
2025. 02. 11.그 외 삽입곡 및 오리지널 스코어는 음악 문서 참고.
1. 개요
tvN X TVING 오리지널 드라마 〈원경〉의 역사적 내용에 대한 탐구 문서이다.2. 복식
- 첫 즉위식이 열릴 때 원경왕후가 기존의 왕비 대례복과 다르게 생긴 심청색 9등 적의와 물총새 깃털로 만들어진 칠휘이봉관을 머리에 쓴 채 즉위식을 치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고증에 맞는 연출이다. 해당 의상은 1370년 명나라의 효자황후가 고려에 보내준 것이다.[1] 하지만 이방원의 흑색 구장복은 고증에 많이 어긋나는데, 흑색 구장복은 명나라에서 황태자의 면복으로 활용된 예복이다. 친왕(親王)과 동일한 예복을 입었던 조선 국왕의 특성상 곤색 구장복을 입어야 한다.[2]
다만 극중 원경왕후가 입은 적의와 관이 고증에 맞는지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논란이 있어왔다. 우리 사극에 등장하는 조선초기 왕비 대례복은 크게 2종류로 하나는 드라마 정도전에 등장했던 양식이며 다른 하나는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 등장했던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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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 드라마 정도전 속 왕후 대례복 / 우 - 육룡이 나르샤 속 왕후 대례복)
원경에 등장하는 왕비 대례복은 이중 정도전에 나온 양식을 재활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느 쪽을 따르던 고증오류이다.[3] 상술된 1370년 명나라의 마황후가 고려에 보내준 대례복에 대해 고려사 여복지의 기록을 보면 고려조 공민왕 19년, 홍무제가 왕의 면복과 원유관복을 내려주었고, 효자황후가 왕비에게 관복[4]을 사여하였다고 하며, 기존 드라마 속 조선 초기 왕비 대례복은 이 기록과 중국 명나라의 복식사 자료를 토대로 복원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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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 송나라 인회황후 적의 / 우 - 드라마 원경 속 적의)
문제는 저 기록이 고려 때의 기록이며 조선 때는 완전히 다른 기록이 나온다는 점이다. 명나라 여성 관복 제도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 시기에 받은 청색 9등 적의는 송나라 내명부 제1품 관복이기에 황태비,[5] 황비[6]가 입는 것과 동일하다. 하지만 조선조에 들어서면 완전히 다른 복식을 사여 받는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왕비 관복 사여는 총 10회로 명에서 조선 전기의 역대 왕비에게 사여한 것은 모두 청색 9등 적의(翟衣)가 아닌 대홍색 대삼(大衫)[7]이고 머리에 쓰는 관은 주취칠적관(珠翠七翟冠), 옷은 배자, 하피, 상아홀(象牙笏)을 사여 받았다고 적고 있다. 원칙대로라면 왕은 친왕이 입는 구장복을 사여 받았으나, 왕비 또한 왕과 같이 친왕비복[8]을 사여 받아야 했으나 그 아래인 군왕비복을 사여 받은 것이다.
여기서 대홍색 대삼의 형태를 살펴보면 국내에 남아있는 유물이 없으나 중국 남창(南昌)에서 발굴된 명 영정왕(寧靖王)의 부인 오씨(吳氏, 1439~1502)의 대삼을 보면 동시기에 살았으며 동일한 군왕비 복식을 사여받았기에 그 색과 형태를 짐작해볼 수 있는데 그동안 사극에 나왔던 조선전기 왕비 대례복과는 그 색깔부터 다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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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 남창 오씨 대삼 출토품 / 우 - 명나라 군왕비 대삼 복원도)
머리에 쓰는 관 또한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일부 고증에 오류가 있다. 공민왕비 적의 일습에는 꿩 7에 봉황 2마리와 크고 작은 수식이 있는 칠휘이봉관(七翬二鳳冠)을 받았다고 적혀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적관 사여 기록을 보면 조선이 명에서 처음 적관을 받은 것은 태종 3년(1403) 원경왕후 민씨가 받은 주취칠적관(珠翠七翟冠)이다. 이는 고려말 사여한 칠휘이봉관(꿩 7, 봉황2)에서 이봉(봉황 2)이 탈락되고 주취(진주와 비취)[9]와 칠적(꿩 7)만 남은 형태로 명나라 홍무 26년에 바뀐 내명부 관제에 따르면 군왕비의 적관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 원경에 등장하는 적관은 꿩 5마리가 있는 오적관이며 이는 대왕 세종 때 칠적관을 오적관으로 복원한 이래로 왕비 대례복과 함께 조선초기 사극에 꾸준히 잘못 복원되고 있는 소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도 칠적관을 복원했다고 하면서 왜 5마리의 꿩 장식만을 올렸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들이 있었다.
(좌 - 드라마 정도전 속 왕후 대례복 / 우 - 육룡이 나르샤 속 왕후 대례복)
원경에 등장하는 왕비 대례복은 이중 정도전에 나온 양식을 재활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느 쪽을 따르던 고증오류이다.[3] 상술된 1370년 명나라의 마황후가 고려에 보내준 대례복에 대해 고려사 여복지의 기록을 보면 고려조 공민왕 19년, 홍무제가 왕의 면복과 원유관복을 내려주었고, 효자황후가 왕비에게 관복[4]을 사여하였다고 하며, 기존 드라마 속 조선 초기 왕비 대례복은 이 기록과 중국 명나라의 복식사 자료를 토대로 복원을 한 것이다.
(좌 - 송나라 인회황후 적의 / 우 - 드라마 원경 속 적의)
문제는 저 기록이 고려 때의 기록이며 조선 때는 완전히 다른 기록이 나온다는 점이다. 명나라 여성 관복 제도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 시기에 받은 청색 9등 적의는 송나라 내명부 제1품 관복이기에 황태비,[5] 황비[6]가 입는 것과 동일하다. 하지만 조선조에 들어서면 완전히 다른 복식을 사여 받는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왕비 관복 사여는 총 10회로 명에서 조선 전기의 역대 왕비에게 사여한 것은 모두 청색 9등 적의(翟衣)가 아닌 대홍색 대삼(大衫)[7]이고 머리에 쓰는 관은 주취칠적관(珠翠七翟冠), 옷은 배자, 하피, 상아홀(象牙笏)을 사여 받았다고 적고 있다. 원칙대로라면 왕은 친왕이 입는 구장복을 사여 받았으나, 왕비 또한 왕과 같이 친왕비복[8]을 사여 받아야 했으나 그 아래인 군왕비복을 사여 받은 것이다.
여기서 대홍색 대삼의 형태를 살펴보면 국내에 남아있는 유물이 없으나 중국 남창(南昌)에서 발굴된 명 영정왕(寧靖王)의 부인 오씨(吳氏, 1439~1502)의 대삼을 보면 동시기에 살았으며 동일한 군왕비 복식을 사여받았기에 그 색과 형태를 짐작해볼 수 있는데 그동안 사극에 나왔던 조선전기 왕비 대례복과는 그 색깔부터 다름을 알 수 있다.
(좌 - 남창 오씨 대삼 출토품 / 우 - 명나라 군왕비 대삼 복원도)
머리에 쓰는 관 또한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일부 고증에 오류가 있다. 공민왕비 적의 일습에는 꿩 7에 봉황 2마리와 크고 작은 수식이 있는 칠휘이봉관(七翬二鳳冠)을 받았다고 적혀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적관 사여 기록을 보면 조선이 명에서 처음 적관을 받은 것은 태종 3년(1403) 원경왕후 민씨가 받은 주취칠적관(珠翠七翟冠)이다. 이는 고려말 사여한 칠휘이봉관(꿩 7, 봉황2)에서 이봉(봉황 2)이 탈락되고 주취(진주와 비취)[9]와 칠적(꿩 7)만 남은 형태로 명나라 홍무 26년에 바뀐 내명부 관제에 따르면 군왕비의 적관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 원경에 등장하는 적관은 꿩 5마리가 있는 오적관이며 이는 대왕 세종 때 칠적관을 오적관으로 복원한 이래로 왕비 대례복과 함께 조선초기 사극에 꾸준히 잘못 복원되고 있는 소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도 칠적관을 복원했다고 하면서 왜 5마리의 꿩 장식만을 올렸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들이 있었다.
- 내관들이 뿔이 없는 사모를 쓰고 등장하는 오류를 범하는데, 이는 이미 기존의 다른 사극들을 통해 수차례 반복해서 지적 됐던 부분으로, 굳이 또 논란을 답습하는 것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견들이 많다.
- 태종을 비롯한 작중 인물들의 전립에 견영과 패영이 같이 붙어 있는 모습들을 확인 할 수 있는데, 견영과 패영이 같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태종의 약 10대손 즈음 되는 먼 후대 현종대의 이야기라 작중 시점엔 맞지 않는 고증 오류라고 볼 수 있다.
- 작중 여성 인물들의 복식은 전단후장형 치마, 단삼, 장삼 등 조선 전기의 복식을 착용하였다. 다만 원경왕후가 작중 입는 전단후장 치마의 형태의 경우 16세기 유물의 형태의것[10]과 비슷하며,이외에도 원경왕후가 입는 단삼이 실제 유물과 달리 품이 작고 당의와 유사한 형태라는 점, 조선 전기임에도 후기에 나타난 속옷인 가슴가리개를 착용한다는 점은 아쉽다고 볼수 있다.
- 태조와 태종 둘 다 재위기에 청룡포를 착용한 모습으로 나온다. 태조가 상왕으로 유명하다 보니 조선태조어진이 청색 곤룡포로 그려진 것 때문에 이때까지의 사극에서는 대체로 청색 곤룡포가 상왕의 복장으로 인식되어 왔으나 실제로 딱히 근거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이전에 한국사의 임금들이 중국과의 외교 관계에서 의례용 곤복이나 조복, 공복(公服)을 사여 받은 적은 있어도 평상복용 곤룡포를 사여 받은 적은 세종 26년이 처음이었다.[11] 홍색 곤룡포가 왕의 주된 평상복이 된 것은 그 이후이다. 그 이전에 청색 곤룡포가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부터 이미 고려 시대의 문화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그 외에 원나라의 친왕들이 청색 옷을 입었기 때문에 원 간섭기 고려도 그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추측도 있고, 동방(동이)에 상응하는 색이 청색이어서 그랬다는 추측도 있다. 다른 분석으로는 주원장이 당시 사생아 취급받던 우왕이나 역성혁명을 일으킨 이성계를 제대로 된 국왕 취급하지 않아서 황색이나 홍색이 아닌 그보다 낮은 등급(명에서는 5~7품)의 색인 청색의 곤룡포를 내려줬다는 분석이 있으며, 이외에는 이성계가 후주 황제였던 시영의 초상화를 모방해 자체적으로 곤룡포를 제작하였다는 추측이 있는데 이는 이성계가 내비친 조선 초기 자주성의 발로라는 분석과 연결된다.
- 10화부터 태종이 홍색 곤룡포를 입고 나오는 것이 묘사된다. 홍색 곤룡포가 명나라로부터 받은 시점은 위에서 언급되다시피 세종 26년이지만, 본작에서는 태종 재위기에 이미 입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현재 태종의 생전 어진이 남아있지 않아 증명할 길은 없지만 조선왕조실록의 타임라인대로라면 태종은 재위 내내 청색 곤룡포를 주로 입고 나오는 것이 고증에 더 부합할 가능성이 높다. 왕을 제외한 사람들의 대홍색 겉옷을 금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 세종 이후이기 때문이다.세종 28년 5월 25일
- 10화에서 충녕대군이 등장하는데 신하와 거의 같은, 흉배가 없는 자주색 관복을 입고 등장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시기 왕세자 또한 흉배 달린 곤룡포가 아닌 충녕이 입고 나온 일반 관복을 입었을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이다.
3. 전개
- 태조가 중전이 보내온 청포도를 먹는 장면이 논란이 됐는데, 태조는 병이 들었을 때에 포도가 먹고 싶다며 자식들에게 교지를 전해 2번이나 포도를 먹은 적이 있었는데 이 때 먹은 포도가 바로 수정 포도(청포도)로, 따라서 청포도를 통해 태조의 심리를 표현한 묘사는 적절한 연출이었다고 볼 수 있다.1, 2 다만 아무리 봐도 작중 등장하는 포도는 일반 청포도가 아니라 20세기에 개발된 품종인 샤인머스캣이라 PPL으로 보일 여지는 충분하다.
- 어린 신빈이 인절미를 주워다 먹는 장면이 이슈가 됐는데, 인절미의 기원은 고려 시대부터 이어지므로 적절한 묘사로 볼 수 있다.
- 태종의 궁내 암살 습격 장면 역시 핍진성의 측면에선 부적절하다고 보는 의견들이 많으나, 개연성의 측면에선 어느 정도 수용 될 수 있다고 보는 의견도 존재한다. 해당 장면에서 태종이 중전에게 장도를 건내주는 연출은 당대의 장도 패용 문화를 잘 보여주는 묘사라고 할 수 있으나, 장도의 칼날 길이가 지나치게 짧은 부분이 지적을 받기도 했다. 다만 이는 안전상의 문제로 어쩔 수 없이 길이를 타협한 것으로 보인다.
- 민씨 형제에 대한 묘사 중 군주 앞에서 중전에 대해 왕이 될 운명 운운한 것은 창작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다소 어긋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어쨌든 태종이 꾸준히 민씨 일족의 무엄함을 비난해 온 것도 사실이라 무작정 이상하다고만 하기도 어렵다. 태종이 민씨 일족을 축출할 때 주요 혐의로 내세운 것 중 하나가 양위 파동을 일으켰을 당시 어린 세자(양녕대군)를 끼고 대신 국정을 결정할 고명대신을 민씨 일족이 미리 내정해 두었다는, 즉 국정농단 혐의였다. 적어도 태종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이들은 그 정도 무엄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는 것. [12]
- 명나라에서 태종의 책봉 문제를 놓고 외교적 압박 및 간섭을 가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실제 역사에서도 건문제가 갑작스런 태조의 퇴위와 정종의 즉위 과정, 그리고 정종 역시 갑작스레 풍병을 이유로 태종에게 선위한 일에 대해 불만을 품긴 했으나 애초에 조선의 내부 사정을 깊게 추궁할 생각이 없었고, 조사의의 난이 일어난 시점의 태종은 정식으로 책봉을 받은 상태라 시간 순서가 반대이다. 조선 초기 책봉과 관련된 외교 갈등은 대체로 홍무제의 강짜가 주된 원인이었기 때문에 1398년 홍무제가 죽은 뒤 양국 간의 외교 관계는 이미 안정을 찾은 상태였다. 이 당시 태종의 책봉 문제는 정종의 왕위 등극과 이방원의 왕세자 책봉을 인준하는 외교 사절이 아직 조선에 도착하지도 못했는데, 다시 조선 측에서 태종이 왕위에 올랐으니 인준해 달라는 요구를 하자 그 동안 홍무제 밑에서 양측 사이를 조율하느라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던 명나라 외교 라인이 분통을 터뜨리면서 생긴 일이고 실제로도 이 때문에 태종이 명나라에 유화적인 태도를 취해야 했던 것은 맞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단순히 1년의 유예 기간을 거쳐야 했을 뿐이었다.
- 하륜이 작년(태종 1년)에 태조가 회암사에서 세자 방석과 무안대군 방번, 흥안군 이제를 애도했다고 하는 것은 소요산에서 한 발언이 근거가 된다. 태조는 1401년(태종 1)에 소요산에 머무르다 1402년(태종 2) 회암사로 이동했고, 태종이 소요산에 머무르는 태조를 찾아와 환가를 간청할 때 태조가 태종을 향해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두 아들과 한 사람의 사위를 위함이다."라는 발언을 했다.# 말은 소요산에서 했지만 태조는 조사의의 난 전까지 주로 회암사에 머무르며 화주(化主) 노릇을 했기 때문에 부처 운운한 것은 대체로 회암사를 염두에 둔 것이라 봐도 많이 어긋나지 않는다.
- 중전이 태종을 향해 성리학을 부정하는 발언을 한 장면이 온라인 커뮤니티들에 퍼지며 큰 논란이 되었다.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와 그 뒤의 정국을 주도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성리학을 전면 부정하는 말을 하는 것은 황당한 상황이다. 애초에 원경왕후의 아버지 민제 역시 과거급제를 하고 이방원을 지도한 유학자다. 이때까지만 해도 성리학 이념은 비교적 새로운 것으로 여말선초 변혁의 사상적 근간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기준처럼 낡고 구시대적인 사고 방식으로 여겨지던 시절이 아니었다.
- 효빈(영실)이 중전과 갈등을 빚으며 자기 아들(경녕군)의 이름(이비)을 막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노비 출신에 뒷배경도 약한 효빈이 원경왕후에게 덤비는 모습을 묘사한 부분이 핍진성 측면에서 다소 부적절하다는 의견들이 많다. 그러나 이론상으로는 어쨌든 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존중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폐쇄적인 궁중 환경과 부모 자식 간의 특수한 관계성 때문에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성종과 폐비 윤씨의 사례처럼 왕실에서 먼저 속사정을 밝히기 전까지는 궁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 알기 어려운 상황도 충분히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 회암사의 중수와 금탁 공양 행사가 작중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처럼 다뤄지는데, 이 부분의 경우, 실제 실록에선 관련한 별다른 행사가 기록 되어 있지 않고, 그저 태종이 태조를 만나기 위해 회암사로 간 일 정도로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라, 극의 긴장감 형성을 위한 제작진의 의도적인 창작으로 보인다.
- 신덕왕후를 대비로 칭하며 이성계가 기리는 장면이 있는데, 신덕왕후는 이성계보다 먼저 죽어 생전에 대비로 있었던 적도 없었고, 태종이 후궁으로 강등시켜버렸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대비로 지난 상왕(上王) 정종의 배우자인 정안왕후 김씨가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정안왕후는 태조 이성계가 훙서하고 나서 4년 후에 승하하였다.(전략)상왕(上王)의 배위(配位)는 김씨(金氏)로서 지금 왕대비(王大妃)를 봉하였으니, 증 좌시중(左侍中) 천서(天瑞)의 딸이고(후략)
- 내약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내약방은 조선 초기에 설치된 약재 관리 기구로서 태종대의 기사에 등장하고 있다.
- 조사의의 난이 터지기 직전에 회암사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는데, 태종이 폐비 운운한다. 드라마에서 민씨 형제가 폐비를 정통성 확보와 연결짓는 것은 포인트가 어긋난 부분은 있지만, 적어도 태종이 외척의 존재가 왕권의 가장 큰 적대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 둘의 사이가 나쁜 것이 대단히 유명했다보니 나중에 성종이 중궁 윤씨를 폐비할 때 선처의 사례라고 나온 것이 태종과 원경왕후의 사실상의 별거 관계였다.# 이 둘의 관계가 폐비 일보직전이라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맞다는 것.
- 명의 사신이 와서 군마를 요구하고 이에 대해 태종과 조정은 주체와 주윤문 사이에서 저울질을 한다. 군마 문제에 관련해서는 대가 지불 및 군마 공급 문제로 양측 간 의견 충돌이 있긴 했지만 조선은 기본적으로 명나라의 내부 권력 투쟁과 상관 없이 외교적 의례대로 사신을 대했다. 나중에 주체가 승리하여 영락제가 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주체의 근거지인 연 지방이 요동 지방과 가까워서 정난의 변의 여파가 조선의 국경에도 무시 못 할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어느 쪽이 승리할 지 예의주시한 것은 맞다. 정종 때의 경연에서 이 주제가 나오기도 했는데, 조선 측에서는 난의 초기부터 주체의 승리 가능성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 편전에서 관료들이 사신 접대는 원래 중궁에서 했다고 말하는데, 사실 무근이다.
- 상궁들이 합궁 중인 군왕과 중전을 방 밖에서 둘러싸고, 이것저것 지시를 하는데 이 또한 기존 사극의 오류를 답습한 것이다. 상궁들이 만인지상인 두 사람에게 지시를 내리는 일은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에 궁중의 성생활이라고 묘사된 이후로 자체 조사를 하기 귀찮았던 사극 작가들이 베끼면서 사극계 전반에 퍼진 낭설이다.
- 태상왕이 조사의의 난 직전에 사신을 맞이하는데, 원래는 소요산에서 맞이했다. 태상왕은 여러 번 사신을 맞이한 적 있지만, 태상왕이 자신이 사신을 만나기 위해 그 먼 길을 간 적은 없다.
- 명나라 사신의 접대와 더불어 명 황제의 공녀 요구 문제를 해결하려던 원경왕후가 영락제 주체를 '문황제'라고 일컫는 대사가 나온다. 영락제가 '성조 문황제(초기에는 태종 문황제)'라는 시호를 받은 것은 맞으나 그것은 언제까지나 황제가 붕어한 이후에 부여되는 것으로 그는 살아생전 결코 문황제라는 존호로 불린 적이 없다. 이걸 조선에 대입하자면 이방원이 살아생전에 태종대왕이나 공정대왕, 광효대왕 등의 시호로 불렸다는 소리가 된다. 그저 '현 황제'나 '금상 황제', 아니면 당시 연호를 생전 존호로 사용하던 명나라 일세일원제 특성상 '영락 황제'라고 대사를 처리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있다. 아니면 어차피 원경왕후가 명나라 사신 앞에서 한 대사가 아니기에 그냥 휘대로 '주체'라고 불렀어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을 터인데, 왜 굳이 문황제라는 대사를 집어넣었는지 의구심을 느낄 수밖에 없다.
- 12화에서 성녕대군이 병으로 사망하자 크게 슬퍼하는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때 양녕대군이 동생이 사경을 해메이던 순간부터 죽는 때까지 사냥만 해왔다는 게 드러나자 양녕대군을 호출하고서 멱살을 잡으며 "네가 사람이냐?"라고 사람 취급조차 안하는 욕설을 할 정도로 크게 분노하며 실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부분은 양녕대군이 욕을 먹게 된 계기인 사냥을 한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맞냐고 욕하는 건 실제로 태종실록에 나오는 묘사인데 "양녕대군 저것은 사람의 마음이 없다."라고 진짜로 욕을 하는 모습을 드러내며 경멸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실제 역사와 드라마에서는 성녕대군의 죽음이 양녕대군의 폐세자 처분을 받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 스핀오프 격인 '원경-단오의 인연'에서 이방원과 민씨가 이어지게 된 배경이 나온다. 민씨가 가장 아끼는 단짝친구를 고려 조정이 공녀로 뽑아 북원으로 보내려 하는 상황에서, 성균관 유생인 방원이 그것을 막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상소를 올리는 과정에서 본래 왕족(국왕의 사촌동생)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던 민씨와 사랑을 싹틔우는 과정이다.
여기서 고증오류가 있는데, 우왕 시기 권신인 이인임 주도로 고려가 북원과 명나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것은 사실이나 원나라에 공녀를 보내는 제도는 이미 공민왕 초기에 폐지되었고 극중 등장하는 결혼도감도 이미 혁파된 지 오래된 상황이었다. 물론 원나라가 중원의 패권을 상실하고 북쪽으로 쫓겨간 이후에도 계속 고려에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조공 목록에 공녀가 있어 일시적으로 결혼도감을 부활시켰을 가능성을 아주 배제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당시 고려는 북원과 명 둘 중 어디에도 공녀를 조공하지 않았다. 공녀 조공은 이후 조선 대에 가서 영락제와 선덕제 등이 공녀를 요구하여 보내게 된 기록이 남아 있다.
아울러 당시 국왕이었던 우왕은 사촌동생이라는 존재가 없었다. 만약 사촌동생이 있었다면 충혜왕의 아들이나 서자였을 것이나 적어도 당시 살아있었던 충혜왕의 적자는 없었으며 서자인 왕석기 등도 이미 처형된 상태였다. 추측해보자면 극중 군으로 봉해진 우왕의 사촌동생은 실제인물인 영녕군 등 다른 종친을 모티브로 하여 설정한 제작진의 창작으로 보인다.
- 무명짜기 장면에서 일제강점기 이후 보급된 개량베틀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등장했다.
[1] 그러다가 1403년 이후 명나라와의 외교관계가 더 안정되고 명나라의 관제도 대대적으로 개편되면서 군왕비(郡王妃)용으로 따로 제작된 박빈이 달리지 않은 칠적관과 대홍색 대삼을 명나라에서 보내주기 시작하여 이 때부터 임진왜란 전까지 쭉 입게 되고, 극 중 원경왕후가 착용하던 심청색 9등 적의와 칠휘이봉관은 명나라에서는 황태자비용으로만 활용되게 된다.[2] 흔히 우리가 국왕의 면복으로 많이 봐오던 구장복은 명나라에서 홍무 24년인 1391년에 새로 제작된 것이고, 조선왕조실록에서 본격적으로 명나라가 조선의 임금에게 면복을 하사해줬다는 기록이 최초로 등장하는 시점은 태종 2년인 1402년이다. 이 역시 기존에는 홍무제와의 표전문 문제로 외교관계가 악화되어 한동안 명나라 사신을 통한 의복 하사가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태종 치세 이후 본격적으로 외교관계가 안정되면서 보내준 걸로 보인다.[3] 그나마 정도전에서 묘사된 양식이 고증에 가까운데 그 이유는 심청색 적의에 흑색 하피(霞帔)를 걸치는 건 1897년 대한제국 이후에나 가서 볼 수 있는 양식이고 저 때 중국에서는 심청색 적의에 어깨에 하피를 걸치지 않았다. 대신 1403년 이후부터 명나라에서 보내주기 시작한 대홍색 대삼(大衫)의 경우 하피가 포함되어 있다.[4] 이는 송나라 내명부 제1품 관복에 해당한다.[5] 구휘사봉관, 심청색 9등 적의 ,옥색중단,심청색 폐슬,옥곡규,옥혁대,청라대대,수(綏),옥패2,청말,청석으로 구성[6] 구룡사봉관, 청색 9등 적의, 소사중단홍색대삼,운봉문의 하피,청색폐슬,대대,옥혁대,패수,청색버선으로 구성[7] 적의(翟衣)는 꿩이 수놓아진 옷이란 뜻으로 대삼에는 꿩을 수놓지 않는다[8] 칠적관이 아닌 구적관에 대삼, 하피, 사규오자, 대대, 국의, 옥곡규, 옥혁대, 옥화채결수, 옥패, 청말, 청석으로 구성[9] 혹은 진주와 물총새로 해석해 대왕세종 이후 2마리의 봉황이 있어야 할 위치에 진주를 문 물총새 장식을 올리는 복원을 하기도 한다. 본작에서는 이에 따라 진주와 물총새 장식을 올린 형태의 적관이 등장한다[10] 물론 15세기에도 전단후장형 치마가 존재하기는 한다.[11] 세종 26년 3월 26일. 이전에 곤룡포를 사여 받았다는 근거 자료의 원문을 보면 대체로 곤면(袞冕), 즉 면류관복을 말하는 것이다. 고려 우왕 말기에 설장수가 홍무제가 하사한 편복 세트(사모, 단령)를 입고 귀국한 적이 있긴 한데 왕복은 아니었고 어떤 색깔인지는 나와 있지 않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이를 우왕이 명나라로부터 청룡포를 받은 것으로 각색했다. 박시백의 고려사에서도 고려 말기 국왕들은 대부분 청룡포를 입은 것으로 묘사된다.[12] 왕 앞에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만으로도 죽임을 당해도 될 정도의 죄목이다. 실제 역사에서 이방원이 민씨 일가를 죽인 이유는 자신의 아들이 훗날 왕위를 계승받았을때 외척으로 인한 왕권이 흔들리지 않도록 철저히 외척을 배제하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