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9 21:13:26

위편삼절

고사성어
가죽 끊을


1. 유래2. 기타


1. 유래

공자주역에 심취하여, 죽간의 가죽끈(韋)이 세 번이나 끊어질(三絶) 정도로 읽었다는 뜻.
공자가 말하길, "하늘이 나를 몇 년 더 살게 해 준다면 50살에 주역을 공부할 것이다. 그리하면 큰 허물이 없을 것이다."
子曰: "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1]
공자는 말년에 주역에 심취하여 단전, 계사전, 상전, 설괘전, 문언전을 서술하였다. 주역을 읽으매,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였다. 말하길, "내게 몇 년이 더 있다면, 내가 『역(易)』에 대해서는 제대로 통달할 수 있을 텐데.”
孔子晩而喜易, 序彖、繫、象、說卦、文言. 讀易, 韋編三絶. 曰: "假我數年, 若是, 我於易則彬彬矣."[2]
라고 말할 정도로 주역을 중요시 했다. 이렇게 주역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죽간을 이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닳아 끊어질 정도였다는 이야기.

2. 기타

현대에서는 주역은 점술책으로만 여겨진다. 이 때문에 현대인들이 보면 괴력난신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공자가 왜 점술 같은 미신을 공부했냐는 의문이 생긴다. 그런데 주역은 점술책이기도 하지만 고대 중국인들의 세계관을 담은 철학서이기도 하다. 고대에는 종교와 철학, 주술과 과학의 경계가 불분명했기 때문에 이상한 일이 아니다.

분서갱유 때 주역이 점술책으로 취급받아서 불쏘시개를 면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주역은 분서갱유 때 이미 소실되었다. 주역이 단순한 점술책이 아니라 유학자의 경전으로도 취급되었다는 분명한 예시이다.[3] 오늘날의 주역은 한나라 때 금문(今文, 예서)으로써 복원된 것이다.[4] 분서갱유 시절 경전은 기록이 아니라 암기로 전수되었다. 그랬기에 한나라 때 경전 복원이 가능했다.

중용에는 공자가 귀신을 칭찬하기도 하는데[5] 이것에 의심을 품기도 한다.

그리스도교로 대표되는 서구 문화의 전통에서는 물질세계와 대비되는 영적 세계가 있다고 여긴다. '초자연'이라고 번역한 라틴어 supernaturalis를 직역하면 '자연/본성의 위(上)'라는 뜻이다. 하위의 물질세계와 분리된 상위의 영혼세계를 상정하고, 그곳을 자연(물질세계)의 위에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상위 영적세계에선 하위 물질세계의 법칙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 고대 중국에서 귀신은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자연적 존재였다. 주희의 <주자어류>에서 귀신을 이렇게 설명한다.
* 신(神)은 펼친다는 뜻이고, 귀(鬼)는 움츠린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비, 바람, 우레, 번개가 처음 발생했을 때는 '신'이고, 비, 바람, 우레, 번개가 멈추고 조용한 상태는 '귀'라고 한다.
* 귀신은 단지 기(氣)일 뿐이다. 그런데 기라는 것은 끊임없이 움츠리고, 피고, 가고, 오고 하는 것이다. 천지간에 기가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예기> 제의편에도 공자가 재아와 귀신에 대해 토론한 것이 실려있다.
* 대저 산 것은 반드시 죽는다. 죽으면 반드시 흙으로 돌아간다. 이것을 '귀'라고 한다. 그러나 혼은 하늘로 돌아간다. 이것을 '신'이라고 한다.

고대 중국에서 사람을 크게 혼과 백으로 나누었다. 혼이 정신이고 백이 육체인데, 둘 다 기가 뭉쳐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이 분리되는데, 육신은 땅에 묻혀 썩어 흙이 되면 백 또한 기로 환원된 것이다. 그러나 혼은 이후에도 한동안 뭉친 기가 흩어지지 않고 떠돌아다닌다고 여겼다. 아직 흩어지지 않고 남은 기의 덩어리가 '귀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어 아직 흩어지지 않은 조상의 기 덩어리(귀신)와 후손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반대로 말하면 언젠가는 조상의 귀신도 흩어져서 기로 돌아갈 텐데, 그러면 제사를 지낼 이유도 사라진다. 조상의 제사를 천년만년 지내지 않는 종교적 근거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동양 고전에서 귀신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지만 역시 다른 삼라만상과 마찬가지로 기가 뭉쳐 이루어진 자연 속 존재로 규정된다. 서구의 전통과는 다르지만, 이 또한 종교관의 일종이다. 공자 또한 고대 중국의 종교관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 안에서 합리를 추구하였을 뿐 현대적 합리성과는 다르다.

중국의 역사학자 리숴는 저서 '상나라 정벌'에서 점 치는 것에 별 관심도 없던 공자가 말년에 역경에 이토록 관심을 가진 것은 역경 속에 내포된 혹은 감춰진 역사의 이면을 봤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 논어 술이(述而)편[2] 사기 공자세가[3] 사기 <유림열전>에 보면 "그런데 진나라 말기에 이르러 시경, 서경을 불사르고 유학자를 생매장했는데, 육예(시경, 서경, 주역, 예기, 악경, 춘추)는 이로부터 없어졌다."[4] 사기 <유림열전>에 따르면, "노나라 상구(商瞿, 공자의 제자)가 공자에게 주역을 전수받았고, 공자가 죽자 상구는 주역을 전수시켰으며, 제나라의 전하(田何)에 이르기까지 여섯 세대에 걸쳐 전수되었다. 전하의 시절에 한나라가 건국되었고...(중략)...양하(楊何)는 주역으로써 원광 원년(기원전 134년, 한무제)에 초빙되어 중대부에 올랐다."[5] 子曰 鬼神之爲德 其盛矣乎.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귀신의 덕됨이 성하기도 하구나' 하시었다. 이 구절의 임팩트가 지나치게 큰 나머지 중용 16장을 그냥 귀신장(鬼神章)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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