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21:52:04

윌리엄 페리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임스 포레스탈 루이스 A. 존슨 조지 C. 마셜 로버트 A. 로벳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찰스 어윈 윌슨 닐 매클로리 토머스 게이츠 로버트 맥나마라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클라크 클리퍼드 멜빈 레어드 엘리엇 리처드슨 제임스 슐레진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도널드 럼즈펠드 해럴드 브라운 캐스퍼 와인버거 프랭크 칼루치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딕 체니 레슬리 애스핀 윌리엄 페리 윌리엄 코언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도널드 럼즈펠드 로버트 게이츠 리언 패네타 척 헤이글
제25대 제26대 직무대행 제27대
애슈턴 카터 제임스 매티스 패트릭 섀너핸 마크 에스퍼
직무대행 제28대
크리스토퍼 밀러 로이드 오스틴
← 역대 미합중국 전쟁부장관 }}}}}}}}}

<colbgcolor=#176183><colcolor=#fff>
미합중국 제19대 국방장관
윌리엄 페리
William Perry
파일:williamjperry_cahalloffameinductee_0.png
본명 윌리엄 제임스 페리
William James Perry
출생 1927년 10월 11일 ([age(1927-10-11)]세)
펜실베이니아 밴더그리프트
재임기간 제19대 국방장관
1994년 2월 3일 ~ 1997년 1월 23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176183><colcolor=#fff> 자녀 5명
학력 스탠퍼드 대학교 (학사, 석사)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 (수학 / 박사)
정당

복무 미합중국 육군
1945년 ~ 1947년 (정규군)
1950년 ~ 1955년 (예비역)
최종 계급 예비역 소위 (미합중국 육군) }}}}}}}}}


1. 개요2. 초기 경력3. 국방장관 시절4. 이후5.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미국의 관료.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미국 제19대 국방장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2. 초기 경력

1927년 10월 펜실베니아 주, 벤더그리프트에서 출생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46년 입대하여, 당시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점령군으로 일본에 주둔 중이던 미 육군부대에서 1년간 복무했다. 이후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학사, 석사를 차례로 취득했고, 1955년까지 미 육군 예비군 소속으로 ROTC 장교로 복무했다. 그리고 1957년에는 펜실베니아 주립대학에서 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0~70년대에는 본인의 기술 업체를 창업하여 경영하였고, 이때의 능력을 미 국방부로부터 인정받아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인 1977년부터 4년 동안 국방성의 '연구-기술 담당 차관'(Undersecretary of Defense for Research and Engineering)으로 재직했다. 간단히 말해서 주요 무기체계의 연구개발, 획득을 직접 관장하는 직책이었는데, 그의 재직 시절에 개발을 주도했던 무기들 가운데는 그 유명한 스텔스 전폭기도 있었다.

3. 국방장관 시절

1993년 클린턴의 대통령 취임과 함께 미 국방성의 2인자인 '부장관'(Deputy Secretary of Defense)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선임자인 리 애스핀 장관이 그해 10월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시가전[1]으로 국내외의 비판을 받으면서, 이듬해인 1994년 2월 후임 국방장관이 되었다.

파일:external/static1.squarespace.com/Insert09.jpg
국방장관 취임 이후, 클린턴 행정부 1기 시절 미국의 주요 군사정책에 관한 결정을 담당했다. 구체적으로는 아이티 무력 개입(1994), 보스니아 공습(1995), 그리고 1차 북핵 위기 등이 대표적이었다.

특히 1차 북핵 위기는 장관 취임 직후부터 그의 최대 정책적 난관이었다. 북한이 3월의 '서울 불바다' 발언, 4월의 영변 원자로 폐연료봉 교체 등을 통해 빠른 속도로 위기를 악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페리를 비롯한 미 군사당국은 한때 영변 원자로를 비롯한 북한 핵시설을 정밀공습하는 방안까지 심각히 고려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방안은 영변의 핵시설을 제거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지만, 이후 북한의 군사보복으로 한반도에 전면전이 발발했을 경우 수십만명의 사상자와 3000억 달러가 넘는 재산피해가 발생할 것이라는 예상 때문에 검토 단계에서 기각되었다.

결국 대안으로 북한에 대한 군사 봉쇄, 대규모 전력증원의 착수 등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들도 북한과의 대규모 무력 충돌 가능성을 전제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페리를 비롯한 당시 미 군사당국이 체감했던 전쟁 위협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다행히도 그해 6월 북한을 방문했던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김일성을 설득하여 핵사찰 수용을 이끌어내어 위기는 종식되었다.

한국에서는 북핵위기에서의 활동 때문에 유명하지만 미국에서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가 중부 유럽, 동유럽국으로 가입국을 확장하는 문제에 있어서, 반대론자로 자주 이름이 오르내린다. 백악관 내에서 거의 유일한 NATO 확장 반대론자였으며 러시아와의 관계를 중시여겼다. 때문에 보스니아 전쟁에서도 세르비아 무기 금수 조치안을 반대하였고 데이턴 협정에 따라 실행된 미군의 보스니아 파병도 반대하였다#. 당시 세르비아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국방장관직을 떠난 1997년 초에 폴란드, 체코, 헝가리의 NATO가입이 확정된 것도 이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4. 이후

파일:external/l7.alamy.com/us-policy-coordinator-on-north-korea-william-perry-r-gestures-as-south-gtbtw4.jpg
(1990년대말 대북 정책조정관 시절,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함께)

1997년 클린턴의 재선 및 2기 취임과 함께, 윌리엄 코언에게 국방장관직을 넘겨주고 퇴임했다. 그러나 1998년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로 다시금 북핵 문제에 따른 국제적 긴장이 조성되자, 클린턴에 의해 대북정책 조정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꾸준한 설득, 1년만에 성사된 북한의 '미사일 발사 중단' 합의 등을 반영하여 북한과의 점진적인 관계 개선을 골자로 하는 '페리 프로세스'를 작성했다.

이후 더 이상의 공직을 맡지 않고, 스탠퍼드 대학교의 명예교수, 유수의 민간기업에서 사외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의 전현직 외교안보 관료들과 함께, 핵무기의 감축 및 폐기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2016년 9월 30일자 <뉴욕 타임스>에 미군의 지상 배치 ICBM 폐기를 주장하기도 했다. 북핵 위기 관련해서도 종종 발언을 하여 국내의 주목을 받았는데, 자신이 장관 시절에 검토했던 '대북 선제 타격'이 북한의 핵위협을 제거하는 데 효과적이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5. 둘러보기

{{{#!wiki style="border-top: 0px none; border-left: 10px solid #0044C9; border-right: 10px solid #0044C9; text-align: center; margin: -6px -11px; padding: 7px; min-height: 34px"
{{{#!wiki style="margin: 0 -16px -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word-break: keep-all"
직위 명단
부통령 <colbgcolor=#fff,#1f2024> 앨 고어
국무장관 워런 크리스토퍼매들린 올브라이트
재무장관 로이드 벤슨로버트 루빈로렌스 서머스
국방장관 레스 아스핀윌리엄 페리윌리엄 코헨
법무장관 재닛 리노
내무장관 브루스 배빗
농무장관 마크 에스피댄 글릭먼
상무장관 론 브라운미키 캔터윌리엄 M. 데일리노먼 미네타
노동장관 로버트 라이히알렉시스 허먼
보건사회복지장관 도나 샬랄라
주택도시개발장관 헨리 시스네로스앤드루 쿠오모
운수장관 페데리코 페냐로드니 슬레이터
에너지장관 헤이즐 올리리페데리코 페냐빌 리처드슨
교육장관 리처드 라일리
제대군인장관 제시 브라운토고 웨스트
환경보호청장 캐럴 브라우너
관리예산실장 리언 페네타앨리스 리블린프랭클린 레인스잭 루
중앙정보국장 제임스 울시존 M. 도이치조지 테넷
무역대표부 대표 미키 캔터샤를린 바셰프스키
주유엔대사 매들린 올브라이트빌 리처드슨리처드 홀브룩
경제자문위원장 로라 타이슨조셉 스티글리츠재닛 옐런마틴 M. 베일리
연방중소기업청장 어스킨 볼스필립 래더아이다 알바레스
연방재난관리청장 제임스 윗
국가마약통제정책실장 리 브라운배리 맥카프리
백악관 비서실장 맥 맥라티리언 패네타어스킨 볼스존 포데스타 }}}
}}}}}}}}}



[1]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02년작 영화 블랙 호크 다운이 바로 이 전투를 다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