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11 21:30:49

유긍달(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 개요2. 작중 행적3. 기타

1. 개요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의 등장인물. 원 역사의 유긍달에게서 모티브를 따왔다.

충주 유씨(忠州 劉氏) 출신으로 충주의 대호족이자 충주 왕후(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아버지로, 원 역사 정종(定宗)과 광종, 경순왕의 처 낙랑공주의 외조부이다.

주인공 임연우의 메인 적대자이며 빌런에 가까운 행적을 보이지만, 고려라는 국가를 기준으로 보면 아군이기도 하며 나중에 가면 오월동주하기 때문에 악당이 아닌 반동인물이라 볼 수 있다.

2. 작중 행적

왕건에게 잡찬으로 불리며 왕건과 임씨 부녀가 사벌주에서 빠져나온 직후에 충주에 도착하여 왕건이 맞으러 오라는 전령을 보내자 가병들을 이끌고 맞으러 나오면서 개경의 현 상황을 말하면서 왕건의 빠른 귀환을 돕기 위해 선박을 제공한다. 이후 정윤과 연우의 혼사가 연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임씨 가문에서 혼사를 꺼리는 것을 눈치채고 연우를 정윤비로 대우하여 혼사를 못 박으려 하나, 의도를 눈치챈 연우가 먼저 절을 하면서 한방 먹은 듯이 답을 하면서 가버린다. 이후에 딸과 외손녀한테 연우가 스스로 정윤비임을 인정하게 유도하도록 지시를 내린다. 이유는 정윤의 빈약한 세력에 한정된 세력을 가진 상산하고 결합시켜 정윤의 세력을 제한시키기 위함이다.

40화에서 왕건의 명을 받아 후백제에 반격을 준비하기 위해 충주로 가게 된다. 이후 개경에서 출진하는 왕건과 합류하여 삼년산성 공격에 실패하고 철군하는 길에 청주에서 왕건과 같이 위기를 맞았으나 유금필의 구출을 받은 직후에 자신의 본거지인 충주로 돌아가자 진언한다. 진언이 받아들여져 충주에서 왕건과 출진한 호족들과 후속대책을 논의하던 중에 화엄종 북악파의 수장인 희랑이 견훤에 의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왕건과 같이 듣고는 기회를 잡은듯 왕자를 보내 남악파의 수장 관혜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견훤에 맞서 정윤을 부석사로 보내 고려는 희랑을 버리지 않았다는거를 백성들에게 보여주자 왕건을 부추긴다.

이후 연우가 왕무와의 협력으로 무차대회를 파토내고 오는 활약을 벌이는 결과가 나왔음에도 별 반응이 없다가, 연우가 연은분리법을 이용해 추출량을 늘려 은 제련소의 권리를 왕건에게 받아내자 임명필을 통해 임희와 연우에게 황보제공과 같이 접촉을 시도한다. 임씨 부녀의 여태까지의 행적을 보고 부녀가 파혼을 바라는 것을 말하고서는 원래는 "정윤과 연우가 맺어져야 나라가 안정된다"는 명목으로 혼사를 밀려고 했으나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는 명목으로 "파혼을 지원해주겠다"고 임희에게 제안한다.

임희가 이를 받아들이자 "지금 있는 사람들 모두 다 신하인 처지이니 감히 왕한테 국혼에 대해 직접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이 없다"는 거를 주지시킨 다음에 먼저 파혼을 바라는 민심을 조성하여 왕건이 파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들자고,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제안한다. 직후 연우에게 백성들한테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팔관회 때 선발되는 국선에서 만 백성이 알아볼 수 있게 선발되어 달라 요구한다. 이후 황보제공 임희 임명필 등과 같이 파혼을 위한 여론 조작을 공모하면서 연우가 국선에 선발되고, 왕무의 외가가 멸문당한 거나 마찬가지가 되어 장례식을 한 이후에 미리 합의한 대로 파혼을 위한 여론을 일으킨다. 그러나 수도 개경은 개성 왕씨 가문이 수세대에 걸쳐 군림하던 지역이라 왕건에게 바로 들켰고, 왕건은 파혼을 승낙하는 척 사기극을 꾸며 기어코 왕무와 임연우를 혼인시켜 버린다.

신라를 귀부시키기 위한 공작을 총괄하게 되었으나, 신라 조정이 항복을 하지 않고 시간 끌기로 일관하는 것을 왕건에게 질책을 받은 이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지 공식 석상에 나오지 않는다. 외손녀 유설란을 경순왕과 결혼시켜 신라 세력과 연계를 꾀하는 한편, 왕정(문원대왕)과 정주 왕후의 딸(문혜왕후)을 혼인시키려 했지만 179화에서 왕무 부부와 주요 대호족들에게 세작을 겸하는 시녀들을 심어둔 사실이 연우에 의해 적발되어 왕건에 의해 책임을 지고 가택연금을 당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타 호족들에게 신뢰를 완전히 잃어 충주파가 공중분해당했고, 정주원에도 간첩을 심은 것에 분노한 정주원은 혼담을 미루었다가 얼마 뒤 임연우가 아들을 낳자 왕정 대신 광주원군과 혼인시키는 것으로 보답하였으며 왕무의 동복 여동생인 오지수가 강릉 김씨 김장명과 혼인하는 것으로 세력구도가 정윤파에게 쏠리게 된다. 이후 왕요와 왕소가 원 역사와 달리 그저 그런 집안과 혼인했다는 언급을 보아 정식으로 혼인하기 전에 유긍달의 스캔으로 원래 약혼자와 파혼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유긍달이 풀려날 때까지 충주 유씨는 호족들에게 제대로 찍혀서 숨죽이고 살았고, 왕요와 왕소도 충주원에서 은둔했다. 왕건 사후에 북벌을 위한 국론 통합의 일환으로 연금에서 풀려나 정계로 복귀한다. 하지만 이미 왕무의 입지가 탄탄했고 북벌 성곡 후에는 왕권이 크게 강화되어 별다른 공작은 하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947년 북벌 당시 충주 유씨의 병력을 이끌고 북벌을 원조하였으며, 북벌의 성공을 대가로 황주 황보씨와 마찬가지로 추가 분봉을 받았다고 한다. 왕건이 생전에 북벌을 꿈꿨던 이유 중 하나로 호족들의 분봉과 인구압 문제 때문에 땅은 넓지만 사람이 적은 발해 땅을 손에 넣어 인력을 뺄까 논의했던 점을 고려하면 분봉 과정에서 아예 집안이 발해령으로 이주했을 수도 있다.

에필로그에 나오는 작중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결국 자신의 외손자를 왕으로 만드는 것에 실패하였지만, 원 역사에서 호족들이 왕위에 너무 노골적으로 관여한 나머지 여러 차례에 걸쳐 일어난 대숙청에 의해 고려 중기 이후 충주 유씨가 정계에서 완전히 몰락한 것을 고려하면 차라리 이쪽이 더 신세가 핀 편이다.

3. 기타

역사서에 적힌 사실과 연우가 평하기를 결혼을 통한 인맥으로 자신의 외손자가 왕위를 이어야 고려가 안정이 되도록 손 써 놓았고 수완이 대단하다 평하면서 왕무와의 결혼을 꺼리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된다. 단 임연우의 평에 따르면 왕무가 작정하고 호족들을 대숙청하려 했으면 무사할 수 없었지만, 그랬다가는 신생 왕조인 데다 삼국통일을 한 지 10년도 안 된 상태에서 고려라는 나라 전체가 공중분해당할 수 있어 나라의 안정을 위해 일찍부터 권력다툼을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 더 컸다고 한다. 그리고 왕건이 왕무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었으면서도 정작 호족들 분쟁에 개입하기 싫다며 유긍달이 혼인동맹으로 반정윤파가 뭉치는 것을 철저히 방관한 것도 원인이었다. 임연우는 자신이 아들을 낳고 나서 아버지인 임희가 외손자를 귀여워하는 모습을 보고 단순한 권력 이전에 외손자가 너무 귀여워서 그런 거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작전을 짜는 방식이 본인이 직접 나서는 일이 아니면 큰 틀을 아랫사람에게 주고 세부 계획은 아랫사람이 짜서 실행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하지만 이 때문에 아랫사람의 실수 또는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일을 망친 적이 몇 번 있다. 황보인혜와 유설란이 신례를 빙자해 정윤비로 몰아가려다 실수로 임연우를 익사시킬 뻔하거나, 화엄종 건을 왕무에게 짬처리했지만 임연우의 기지로 왕무의 공적이 되거나, 임연우의 파혼을 위해 여론조작을 했지만 왕건에게 걸려 왕건의 사기에 역으로 당하거나, 간첩 사건으로 인해 타 호족들에게 신뢰를 잃어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는 등이 있다.

왕건은 유긍달을 좋게 보지 않았지만 현실적으로 충주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에 용인하고 있었다고 한다.

본인의 야망과는 별개로 굽힐 때는 굽힐 줄 알며 신라의 항복 사기 때문에 몇 년간 고통받는 모습도 나오는 등 나름대로 고생을 한 편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절대 좋게 평할 수 없는 인물인데 유긍달의 야망으로 인해 고려 초 왕위 계승 구도를 대판 꼬아버린 결과 고려 왕조가 몇십 년도 안 가 공중분해당할 뻔했기 때문이다. 유긍달의 행동으로 인해 호족에 의해 왕위가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면서 고려 왕위가 시작부터 극도로 불안정해졌고 웅진백제마냥 왕족들의 잔혹사를 찍다가 일찌감치 씨가 마르거나 여요전쟁 때 그대로 고려가 멸망할 뻔했고, 이후 왕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귀족들이 전횡을 하는 관례는 고려 왕조 500년 내내 고려 사회에 악영향을 끼쳤다.

주인공 입장에서는 주적 중 한 명이지만 작중의 주요 어그로가 시아버지인 왕건에게 거의 다 쏠린 덕분에 묻혀버려서(...) 독자들에게 크게 주목을 못 받았다. 따지고 보면 유긍달이 원 역사와 본작에서 그 정도로 전횡할 수 있던 것도 다 왕건이 알면서도 방관한 것이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