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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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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행적
2.1. 에필로그
3. 기타

1. 개요

파일:임연우.jpg

林蓮佑[1]

웹소설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진히로인 주인공.
"왜 손을..."[2]
"시간이 잘 가고 재밌는 일"[3]

2. 행적

간절히 작품의 클리셰대로[4] 전생에는 사학과 석사 출신 취준생 "김선우"였다. 김선우는 어릴 적 '삼한일통기'라는 드라마[5]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고려사에 심취하고, 자연스레 사학도로 진로를 잡아 명문대 사학과 졸업 후 고려사 전공으로 석사까지 받지만 사학은 교수 임용 TO가 없어서 평생 강사만 하다 죽을 수 있다는 현실을 깨닫고 박사과정을 그만둔다. 이후 취업 전선에 뛰어들지만 현실은 냉혹했고, 게다가 체력이라도 챙기려고 걷기 운동을 하다 싱크홀에 빠진다(...).

그랬더니 925년경의 후삼국시대로 트립, 상산의 호족[6]이자 고려 초기 병부령을 맡았던 임희, 임연우에게 빙의했다.[7] 임희는 태조 왕건이 궁예의 시중으로 있을 때엔 동료였고 현재는 휘하 호족이자 친구로, 그 딸 임연우는 고려 혜종약혼자, 미래의 의화왕후 임씨이다. 고려가 후백제와 한창 전쟁중이던 혼란한 시대에 떨어진 것도 모자라 강제적 여성화까지 당한 연우는 명색이 고려사 전공이다보니 혜종은 즉위한 뒤 2년만에 죽고, 그 처가인 임씨 가문도 숙청당하는 걸 아는데다, 무엇보다도 남자랑 결혼할 생각이라곤 털끝만치도 없었기에 이 예정된 미래를 피하기 위해 분투한다.

그를 위한 포석으로 우선 당장 임박한 결혼의 연기 요청을 하기 위해 왕건에게 은혜를 입혀야 한다고 생각하여 혼사를 위해 개경으로 올라가는 길에 아버지를 설득해 사벌주로 길을 돌려[8] 공산 전투에서 패주하던 왕건을 구원하고 2년 유예를 받아내는 데에 성공하지만, 왕건이 내건 조건으로 인해 개경에 기거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혜종, 현재 정윤[9]인 왕무와도 계속 만나야 하게 되었다. 이후 개경에 와서 자신의 결혼을 둘러싼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주변 인물들이 연우 자신이 정윤비임을 인정하도록 유도하려고 상황을 조성하는 와중에도 이를 피해가기 위해 미래 지식을 활용한 여러 계책을 부려 결혼에서 도망치려는 모습이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비범한 인물로 인식되게 하며[10]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11], 그 과정에서 비범한 여성으로 주목을 받게 되어 왕건에게 있어 연우의 조건이 너무나 완벽한 큰며느리로 비치게 되어[12] 저 녀석을 반드시 내 큰며느리로 들여야겠다왕건의 결심을 확고하게만 만든다.(...)

왕후부인, 공주들이 모두 미녀, 미소녀들인 것을 보고 속마음으로 왕건을 질투(...)하는 생각을 한다. 45화 기준으로 궁내에서는 사실상 본인을 정윤비로 대우하고 있는 것을 본인만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보이며, 꾀는 많으나 허점이 많아보인다는 평이 돌고 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본인도 모르게 여성화가 진행되어가고 있는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독자들이 보기에는 왕무가 자신에게 반한거 같은데, 본인은 선우 시절에 미남이었던 적이 없으니 왕무같은 미남이 지금의 자신같은 평범한 여성을 좋아할까 의문을 가지는 생각과, 말투와 비명소리가 여자처럼 변하고,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본인을 꾸미기 시작하는 것 등.

46화에서 유금필의 간청을 받아들인 왕건의 명을 받아 유금필의 휘하에서 종군문관으로 일하게 되며, 청주에 가까이 주둔지를 옮기려 호족들을 설득하려는 유금필을 돕는다. 49화에서 왕무를 부석사에 보내려는 왕건이 조력자로 가장 먼저 호명을 해서 같이 가게 되며, 부석사로 향하는 도중에 왕무에게 올린 진언이 거절당하자 차선책을 진언하면서 유금필의 휘하에서 일할때 같이 일했던 석공들을 계략을 위해 불러올거를 요청하여 무차대회가 열리는 기간까지 남은 시간동안 일행들과 같이 계략을 짠다.

시간이 지나 명지성에서 군대를 이끌고 찾아온 왕충의 군영에서 일행들과 계략 실행에 대한 각본을 만들면서 석공들에게 바위를 깎으라고 지시한다. 부석사에 도착하여 석공들이 조작을 가해둔 바위를 새벽에 몰래 가져다놓고, 다음날 견훤의 후원을 받은 남악파 승려들의 종정 선출을 부석사의 기원이 된 선묘에게도 물어봐야 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나오면서, 북악파의 수장격인 희랑대사[13]에게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으라 부탁하여 그 직후 자신이 조작을 가해둔 바위를 밀어 절벽 아래로 굴려버림으로서 "희랑이 법력으로 힘을 주어 바위를 밀어버렸다"며 일행들과 같이 선동하여 남악파 외에는 관혜를 화엄종의 종정으로 인정하지 못하게 만듬으로서 견훤의 계획을 파토내버린다.

그 직후 후백제인들의 분노를 피해 다급히 도망치면서 "화엄종이 앞으로 계속 분열된 채로 있어야 하냐"는 낙산사의 주지인 명법의 질문에 "수십년 후에 누런빛이 나는 땅에 노래 잘하는 화상이 화엄종을 통합시켜줄 겁니다"라고 외치고 직후 선묘가 떠났다는 식으로 말하고 도망을 간다. 분노한 견훤의 명령을 받은 백제군의 맹추격에 계략을 혼자서 다 짜고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바위까지 밀어야 하면서 혼자서 체력부담을 안게 되어 말을 몰고 도망가던 중에 기절을 하나, 바로 왕무가 구해주게 되고, 왕건이 있는 충주로 돌아갈 때까지 백제군의 집요한 추적에 진절머리를 치고 개경으로 돌아와서 아버지한테 앞으로 자신을 전장에 나가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나, "어려울 거 같다"는 답을 듣고 좌절한다.

그리고 학관에서 "앞으로 전황이 어떻게 될거 같냐"고 묻는 시누이 오지수에게 "머지 않아 신라왕이 귀부하고 견훤이 항복할거 같다"는 말을 한다.[14] 집에 돌아와서 자신을 초대하기 위해 아들을 보낸 윤신달의 초청을 거절하려 하나 아버지가 인맥을 쌓기 위해 가라는 지시를 하여 파평현으로 출발을 하게 된다. 파평현에서 동행한 셋[15]과 같이 윤신달을 만나고 초대한 이유를 듣고 표천현으로 향해서 표천현에서 좌도들의 행적과 왕 노인한테 들은 단서를 참조해서 대학원생때 조선사를 공부한 지식을 참조해서 표천현에 은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 윤신달에게 알린다. 이후 왕건이 직접 2천 병력을 이끌고 은광에 대해 파악하던 중에 표천현 주민들이 앞으로 은광을 캐는 부역에 시달리게 되었다는거를 알게 되어 자기 때문에 백성들을 힘들게 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자책하던 와중에 왕건에게 제안을 하여 은광석에서 은을 추가로 추출할 수 있게 하면 그 은으로 표천현 백성들을 도와주겠다 말하여 왕건이 이를 받아들이고,연은분리법을 이용해 추가로 은을 추출하여 왕건에게 소유권을 인정받고 은제련소의 건립을 허락받는다.

이 소식을 들은 유긍달, 황보제공이 연우의 먼 친척인 임명필과 진주원 부인을 통해 만나기를 원해 만나서 임희와 유긍달 황보제공이 자신과 왕무의 파혼에 합의한다.유긍달이 이 자리에서 제안한 방안인 국선 선발전에 출전하여 만 백성이 알수 있게 선발되어달라는 요구를 받고 수행하기 위해 참가신청서를 내고, 이 와중에 가문의 힘을 이용해서 선발전 준비를 해선 안된다는거를 알게 되어 어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배수현을 필두로 하는 정윤파 아이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나 파혼으로 이들을 배신하게 될 거라는 생각에 미안해한다.

왕건에게 국선선발전 출전으로 인한 휴가를 신청하여 승인받고, 국선선발전 전날 배수현의 주도하에 법왕사로 왕무와 같이 놀러간다. 법왕사에서 배수현이 팔관회 이후에 박술희의 아들인 박제안과 결혼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연우와 왕무에게 박제안을 소개시켜 준다. 그 와중에 배수현이 결혼하게 되면 만나기 더 힘들어질 텐데 왕무와 파혼할 생각을 가지고 배수현과 거리를 두려 한 거에 대해 마음속으로 미안해한다. 데이트 와중에 왕무의 호의가 진심이라는 거를 느끼고 파혼으로 배신하게 될 거라는 생각에 망설인다.

다음날 국선선발전에서 이규보의 시로 가사를 만들어 불러 국선으로 선발된다. 그러나 다음 날 상산저에 몰린 극성팬들에게 가족 전체가 시달리는 와중에 학관에서 최언위에게 시의 출처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 한림원에서 왕무의 외가인 나주가 사실상 멸문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후 임희에게 유긍달과 황보제공 등이 파혼을 위한 여론을 일으킬거라는 통보를 받는다. 이후 나주원에 조문을 가서 오지수가 본인을 껴안고 우는거를 보고 자신은 빠져나가려 하는 죄책감을 강하게 느끼면서 남자의 마음을 가진 자신이 왕무랑 결혼할 수 없다고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괴로워한다.

파혼 여론이 올라오는 와중에 임희가 상산부인에게 연우가 다시 혼사를 추진하려면 4~5년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언급을 하는 와중에 남자의 정체성이 남아있는본인은 그때도 계략을 써서 평생 독신으로 살거라 결심을 한다. 그 와중에 배수현이 혼사가 이대로 깨지면 안된다고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하나 거절하고, 한림원에서 왕건이 절세미남인 왕무와 결혼을 못하면 네가 손해가 아니냐며 현재의 연우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다. 그리고 퇴근해서 집에 돌아갈 때 오지수에게 립밤 제조 사업을 넘기려 하면서 왕 노인에게 시의 출처에 대한 질문을 받고 뭔가 눈치 챈 것 같은 행동을 한다.

집에 돌아오니 동양원부인이 구산사에서 보자는 서신을 보냈고, 서신을 가져온 시녀에게 내일 유시에 만나자는 답을 전해준다. 다음날 동양원 부인에게 구산사가 창립된 이유에 대해 듣게 되며 그 속사정을 말해주지 못하는 거에 안타까워 하고, 연등회 전날 다시 구산사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한다. 이는 왕건이 미리 동양원부인과 짜고 친 계획으로 왕건의 사기쇼에 말려들어 강제로 왕무와 결혼하는 것이 확정되어 버린다.

75화에서 작중 시간으로 929년 1월 18일[16]에 왕무와 결혼을 하게 되어 정윤비가 되었다. 왕건의 사기쇼로 강제 결혼을 피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혼인 직전 왕건과 단둘이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왕건은 삼국통일 때까지는 호족들이 자신의 외손자를 왕으로 올릴 희망을 가지고 있어야 자신의 밑에서 싸워줄 것이기 때문에 삼국통일 때까지는 정윤을 밀어줄 수 없지만 삼국통일에 성공하면 그 뒤에는 확실히 정윤을 다음 왕으로 만들어줄 것이며, 임연우는 그런 정윤에게 가장 걸맞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서 상산 임씨와 임연우의 반대 의사를 무릅쓰고 혼인을 강행시켰고 삼국통일 이후에는 정윤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임연우가 하는 행동을 대부분 막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다.

혼인 이후에도 남자의 정신성이 남아있어 왕무와의 잠자리를 기피하는 모습을 보이며, 왕무를 위해 저평가된 인재들을 포섭하며 백제와의 예성강 전투를 준비하는 중이다. 왕건에게 미리 견훤이 수군으로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왕건은 태봉 시절부터 견훤이 수군으로 고려를 이긴 적 없는데 가능하겠냐고 무시해 버렸고, 결국 예성강 전투를 사전에 예상한 유금필과 암호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따로 준비를 하게 된다. 원 역사에서 수군이 예성강 전투로 갈려나간 뒤 수군 지휘관들이 대부분 교체되었고 그 과정에서 왕건의 사촌 왕만세가 떠오르게 되었음을 떠올린 임연우는 당시에는 별로 주목을 받지 않았던 왕만세에게 접근해 아군으로 끌어들인 뒤 예성강 전투를 준비하고, 호족들과 친한 왕식렴과 호족들 사이를 이간질하면서 예성강 전투의 피해를 줄이고 유금필의 중앙정계 복귀를 도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양원부인 건으로 나름 친한 편이었던 유금필이 원 역사와 달리 정윤파(정확히는 임연우의 편)에 들어오게 되나, 원 역사에서 유금필이 왕건보다 빨리 죽는 것을 알고 있기에 왕건 사후 도움을 받을 수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89화 고창 전투를 위한 작전회의에서 본인이 미끼가 될 고창성으로 가겠다는 말을 하였고, 아내가 위험해질 것을 걱정한 왕무가 반대하며 잡았던 손을 놓자 서운해한다. "왜 손을.."이라며 따지지만 왕무와 첫 키스하자 서로 진정되어 연우는 고창성으로 떠난다. 시간이 지나 왕무에 대한 연심이 깊어져 가면서 91화에서는 좀 더 가면 남자로 못 돌아온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96화에서는 남자 시절의 이름을 속마음으로 외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으려 하지 않으면서 왕무와 1년여간 쇼윈도 부부로 지내면서 왕무에게 못할 행동을 한 거에 미안해 하면서 이제는 어찌 해야 하냐고 마음속으로 갈등을 심하게 한다.

101화에서 왕건의 명을 받아 해량원부인이 되는 최정혜의 처소를 짓는 거를 지휘하고 무심결에 동양원에 찾아온 자신을 책망하는 동양원부인이 왕무가 이후에 을 들이게 되면[17] 내가 지금 느끼는 기분을 겪을수 있을거라는 말에 결혼 첫날 밤에 왕무의 대는 을 들여 이으면 된다는 생각을 했으나, 1년여의 시간이 지난 지금에는 지금의 왕무가 그럴리 없다고 충격에 빠지는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울음을 터뜨린다.

106화에서는 자신을 유부녀라 무의식적으로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진한 딥키스를 몇시간에 걸쳐서 할 정도로(!) 왕무와 진도를 나가며 점점 수위를 높여간다.

145~146화에서 예전에 마후라 대사와 최치원이 남긴 쪽지를 보고는 본인의 정체성을 정하고 마침내 결혼 6년 만에 왕무와 첫 경험을 한다. 3일 내리 침실에서 했단다.(...) 본인은 이를 재밌고 시간이 잘 가는 일이라 말한다. 그것도 여러 번 언급되면서 한림원에 출근하기 싫고 왕무랑 재밌고 시간 잘 가는 일을 하고 싶은데 그랬다간 남편의 앞날을 위해 억지로 출근하는 묘사도 있다.

통일이 이뤄진 뒤에는 본격적으로 정윤파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암약하며 정주원 공주의 생일 날, 반정윤파의 핵심인 유긍달이 수꽃을 이용해 호족들을 감시했다는 사실을 폭로, 반정윤파를 무너뜨린다.

180화에서 임신을 하게 되었다. 185화에서 아들을 출산했고 정주원 공주가 광주원군과 결혼하면서 정윤파의 입지가 확고해진다. 본인은 북벌이라는 모험을 하지 않고 남편과 아들과 함께 오순도순 사는 걸 은근히 원했지만 시아버지인 왕건이 북벌하지 않으면 왕무와 헤어지겠다는 맹세를 시키자[18] 백두산 폭발을 북벌에 이용하고자 왕건과 짜고서 전국구 사기를 치게 된다.

왕건 사후에 왕비가 되고 나서는 남편과 합을 맞춰 거란과의 전쟁을 준비 중이다. 그 과정에서 호족 모두가 연우를 실세로 여기고 연우의 말만 기다리는 건 덤.

백두산이 폭발하자 친정하는 남편을 따라 같이 출정한다. 백두산 부근에서 화산재가 섞여 쇳물로 보이는 강물에 군사들이 겁을 먹자 라이덴 프로스트 효과를 이용해 쇳물에 손을 담그는 사기쇼를 다시 해서 위기를 넘긴다. 상경용천부를 지나 부여진에서 거란과 야전을 벌이는데 후방에서 대기하다가 상황이 고려군에게 불리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부석을 이용해 도하, 후방에서 거란군을 급습해 거란 태후를 사로잡으면서 승전에 크게 기여한다. 종전 후에는 서경으로 천도해 왕무와 함께 나라를 다스리다가 왕무가 세상을 떠나자 태후가 된다. 이때를 노려 침공한 거란을 막아내고 나랏일을 도왔으나 얼마 안 가 병에 걸린 것을 계기로 개경으로 내려가 나주원에서 왕무와의 추억을 그리워하며 세상을 떠난다.

후대 기록에 따르면 시호는 '의화태후'인데, 원 역사처럼 의화(義和)인지는 불명이다. 후대 기록에서 고려가 칭제건원했다는 언급이 있기 때문에 사망 당시 황태후의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원 역사 고려시대 때 왕태후 신분으로 사망한 인물은 시호로 왕태후를 쓴 전례에 따라 후대 사서에서는 의화태후로 표기된다.

작중 삼국유사에 따르면 연우가 자신의 전생이 김선우라고 외친 일을 지나가던 왕건의 주치의가 듣고 연우의 전생을 김씨 성을 쓰는 흉노 선우로 알아들었고,[19] 북벌에 성공한 뒤 주치의가 이를 왕무와 임연우에게 고해 "내가 선우는 맞는데 이래도 괜찮은 건가?"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흉노 선우 전설이 세간에 퍼져 그녀의 전생이 사학과 대학원생이라는 것은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20] 작중 서술을 자세히 보면 주치의가 잘못 알아들어서 이런 오해를 산 거지 해당 대화는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김씨 성의 흉노 선우가 거란 야율씨의 조상에게 살해당해 야율씨에 복수를 결심하고 환생했다'라는 썰은 창작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작중 21세기 학계에서는 이 전설이 왕건-왕무로 이어지는 고려 왕조의 신화에 연우를 추가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시기에는 이미 왕건과 왕무의 신화가 완성된 뒤였기 때문에 왕건과 왕무에게 신화를 덧붙인 것이 아니라 연우에게 신화를 추가했다는 것이다. 불교적 환생 신화의 특성상 혈통이 다르더라도 상관없다는 이점도 있고, 당대에는 삼국뿐만 아니라 거란과 여진족도 불교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던 만큼 고대 군주의 환생이라는 설화가 마냥 허무맹랑하게 들리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삼십삼천을 통해서 환생했다는 말은 최치원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임연우와 대화할 때 임연우가 "내가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이라 믿나?"고 묻자 최치원이 "신라인들은 김유신이 삼십삼천에서 온 사람이라 믿듯이 정윤비도 그런 사람 같다"고 대답한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현대 경상북도 경산시 출신으로 원효와 동향이며, 자연히 신라인들 사이에서 내려오던 임연우의 전승을 주로 듣고 자랐을 것이다. 유학을 배웠던 최치원조차 임연우를 보고 삼십삼천을 떠올렸음을 고려하면 최치원뿐만 아니라 당대 많은 신라인들이 임연우를 그렇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삼십삼천에 대한 서술은 당대 신라인들이 임연우를 보던 시각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후대에는 이 "설화"를 고려가 신라계와 여진계를 포섭하려고 만들었다고 본다. 거란은 그렇다 쳐도 신라는 뭐냐 싶을 수도 있는데, 현대 고고학계와 역사학계에서는 와전된 것으로 보지만 당대 신라 김씨 왕조는 흉노 선우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전승이 있었다. 왕건에게 항복한 경순왕이 김씨 왕조이기 때문에 김씨 왕조의 조상의 환생 설화를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왕무가 연우의 전생이 김선우라는 말을 듣고 '그래서 나와 7년간 잠자리를 피했냐'고 한탄한 것과 왕건이 연우 덕분에 환생을 확신했다는 등의 여러 언급을 보아 당대 고려인들은 단순히 용비어천가로 지어낸 설화가 아니라 진지하게 연우를 흉노 선우의 환생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21]

고려군이 '돌을 띄워 강을 건넜다'는 구절은 21세기에서도 해석이 분분한데, 돌을 띄웠다는 서술이 작중 삼국사기와 최지몽의 저서뿐만 아니라 요사에서까지 확인되기 때문에 비슷한 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폭발 중인 백두산에 가서 돌을 채취했다고 서술했으면 부석이라 바로 알았을 텐데 21세기에도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을 보아 사서에서는 정확히 서술되지 않았던 것 같다.

작중 고려사에 따르면 임 태후 덕분에 고려가 삼국통일을 완수하고 북벌에 성공했다고 칭송하고 있으며, 임 태후를 아예 본기(本紀)에 분류하고 있다.[22] 정치도 단순한 비선실세를 넘어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고 표기될 정도.[23] 후대 사관들이 보기에도 임연우의 공적이 대단하기는 했던 모양이다.[24] 왕무가 죽자 임연우가 못 나설 거라 생각해 거란과 주변국들이 쳐들어왔다 임연우가 압록강에 오자 거란군이 물러났다는 기록만 보더라도 임연우의 당대 존재감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25]

그녀가 남긴 업적과 설화가 너무 많았지만 교차 검증되는 부분이 많아 상당수가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지진 측정과 백두산 폭발 사전 예측에 대해서는 당대 기술상 정확한 예측은 불가능하다며 21세기에도 논란이 심하다고 하며, 1990년대 수능에서 해당 문제를 냈다가 학계와 일반인들 간의 대소송까지 간 끝에 유야무야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 때문에 임연우의 과학 문제에 대한 문제는 다시는 수능에 안 내게 되었다고... 과학계에서는 거중기와 열기구는 사실로 보고 있으나 지진 측정은 왕건 재위 말년에 백두산에 척후를 보낸 기록을 토대로 백두산 정탐으로 폭발 전조 증상을 발견해서 예측했을 거라는 것이 정설이다.

2.1. 에필로그

임 태후의 이름은 연우이며 상산백 임희의 딸이다. 일찍이 우리 성조와 혼약을 맺고 마침내 혼인에 이르렀다. 이 임 태후의 탄생과 관련해서 신비로운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

일찍이 우리 태조 황제께서 연로하셔서 병 중에 있을 때, 오랫동안 태조 황제를 모신 어의가 있었다. 그 어의는 젊었을 때부터 태조를 따랐기에 매일 태조의 병을 근심했다.

약초를 쓸 때도 막 캐낸 것이 약효가 좋은 법이다. 당시 우리 고려의 황궁은 송악산 위에 있었다. 궁 바로 옆에 송악산의 숲이 있었기에 어의는 그 숲속에 약초밭을 일구고 매일 약초를 캐러 갔다.

어의가 여느 때처럼 약초밭에 가니, 당시 정윤비이시던 임 태후가 소나무 숲 가운데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임 태후가 가슴이 답답해서 스스로의 신세내력을 털어놓은 것이다.

임 태후는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신인이셨다. 임 태후께서는 전생에 흉노의 선우로 성이 김씨였다. 김씨 성의 선우는 거란 야율씨의 먼 선조가 되는 자에게 암습을 당해 죽음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김씨 성의 선우는 야율씨를 멸하겠다고 맹세하고 죽었는데 삼십삼천을 거쳐 임 태후로 환생한 것이다.

어의가 이를 듣고 놀라서 태조께 이르니 태조께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다.

“정윤비가 본디 군략에 능하고 지모가 뛰어나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그랬구나. 삼십삼천이 정말 있는 것이었구나. 그래 너는 이 비밀을 지킬 것이냐?”

어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 엄청난 비밀을 알고 있으면 너무 갑갑해서 결국 털어놓을 것 같습니다.”

“그래. 너는 참 정직하구나. 그럼 이리하자. 너는 비밀을 지키고 있다가 우리 고려가 거란을 무찌르고 기세를 떨치면 그때 비밀을 말해도 좋다. 그전까지는 민심이 흔들릴 수 있으니 비밀을 지키고. 몇 년 정도는 비밀을 지킬 수 있겠지?”

“예, 폐하.”

어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당부를 남기고 얼마 뒤 태조께서 붕어하셨다. 태조께서 미리 이 어의를 잘 돌봐주라고 말을 남겼기에, 성조께서는 어의를 처벌하지 않고 그냥 궁 밖에서 편히 살게 해줬다.

태조께서 붕어하시고 3년 뒤, 성조와 임 태후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마침내 부여진에서 거란 대군을 깨뜨리고 요동과 그 동쪽 땅을 모두 차지했다.

본래 임 태후는 흉노 선우였던 만큼 말 탄 무리들을 잘 다루어 여진 기병들을 감화시키고 거란대군의 허를 찌르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 싸움에서 군사를 동원할 때 군영에 의원이 많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어의 역시 종군했는데 거란이 망하는 것을 보고 큰 짐을 내려놓듯 성조께 가서 임 태후의 비밀을 알렸다.

“연우는 남자로서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데도 나를…… 그래서 7년을……”

성조께서는 그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중에 임 태후 역시 전후사정을 모두 아시게 되었다. 어의의 말을 듣고 임 태후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씀하셨다.

“대강의 큰 줄기는 맞다. 선우는 선우니. 근데 이게 제대로 된 뒤처리인가?”

그 이후 성조와 임 태후는 태조의 유훈을 충실히 지킨 어의에게 큰 상을 내렸다. 이후 이 소문이 퍼져 민간에서도 이에 대해 알게 되었다.
삼국유사-임 태후와 삼십삼천
고려의 무리들은 간교하기 그지없어 끝내 우리나라를 망하게 하니 그에 속은 것이 원통할 뿐이다.

고려왕 건 말년에 사신들을 보냈는데 건을 만나고 온 사신들이 말했다.

“고려왕 건은 지금 풍이 들어 시간이 가는 줄을 모릅니다.”

이 보고를 듣고 황제께서 고려 쪽을 근심하지 않고 중원으로 출병하셨는데 그러자마자 고려왕 왕무와 그 아내 임씨가 국경을 넘어 침공했다.

고려의 도적들이 돌을 띄워 강을 건너 우리 대군을 격파했다. 그리하여 고려 도적들이 우리 태후를 사로잡고 요하 동쪽 수천 리를 강탈했다.

이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들을 모두 주살했다.
요사-고려전
우리 임 태후께서 성조와 함께 나라를 다스린 지 40년. 마침내 노환으로 성조께서 붕어하셨다.

성조께서 붕어하신 뒤 많은 사람들이 임 태후께서 어찌 되실지 걱정했으나 뜻밖에도 임 태후께서는 담담한 표정으로 정무를 처리하고 세종 황제의 즉위를 도우셨다.

한편 성조께서 붕어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거란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우리가 흔들린다고 여기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에 임 태후께서 제장들과 함께 압록강까지 나가니 거란이 그 이야기를 듣고 회군했다.

거란의 무리들은 임 태후께서 나이가 많고 슬픔을 못 이겨 군무를 돌보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임 태후께서 의연하게 대처하시니 거란 도적들이 후퇴했다.

임 태후께서는 이후 정무에 손을 떼고 개경으로 내려가 쉬려고 하셨으나, 세종 황제의 간청으로 계속 평양에 머물며 국정에 조언을 건네셨다.

마침내 3년 뒤 임 태후께서도 병에 걸리셨다. 임 태후께서 개경에 가고 싶다고 말씀하셔서 친위군 3천이 태후를 호위하며 개경에 이르렀다.

개경의 궁을 오르며 임 태후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이곳을 그리워하게 될 줄은.”

임 태후께서는 이후 나주원에 행장을 푸시고 지내시는데 병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셨다. 주변을 지키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는데 임 태후께서는 태연하셨다.

“지금 고려 땅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나만큼 확신하고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야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붕어하셨다. 당시 궁에 와 있던 여러 고승들도 임 태후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자신들도 죽음을 앞두고 저리 태연할 수는 없다며 감탄했다.


아! 우리 임 태후께서는 뛰어난 지모를 타고나신 분이셨다. 우리 태조께서 견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자주 패했는데 그때마다 임 태후께서 기이한 계책을 냈다. 화엄종의 무리들이 통합될 것을 예언하시고 고창에서 땅을 진창으로 만들어 성을 구하고, 견훤이 고려에 귀부하는 데도 큰 공을 세우셨다.

임 태후가 없었다면 삼한통일의 대업이 어려웠을 것이다. 태조 이후 성조와 함께 북방에 나가 세운 공은 헤아릴 수 없다. 스스로 쇳물에 몸을 던져 군사들을 독려하시고 돌을 물에 띄워 강을 건너고 고려의 이름을 하늘에 휘날리게 했다.

그 공로를 앞으로 누가 따르겠는가?
고려사-임 태후 본기

3. 기타

표지가 나온 다음엔 독자들 사이에서 "자기가 안 예쁘다며 기만했다"[26]는 분노 어린(?) 반응이 나왔다(...).

일러스트 공개 후의 외모나 국선으로 뽑힌 것, 선녀 코스프레를 해도 먹히는 것만 보아도 상당한 미소녀다. 다만 원래 웹소설 일러스트란 게 작품의 얼굴이 되다 보니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미화되어 나오는 부분이 크고, 작중에서 임희나 임연객 같은 가족들의 외모도 평범하고 연우도 자기평가로는 '평범에서 조금 위인데 매력이 있는 정도'라고 했다. 사실 이건 왕건이 본인도 미중년이고 미녀 왕후들을 수집하는 미녀 콜렉터에다 자식들도 다 미남미녀인 '아름다운 일족'의 수장이다 보니 왕건의 눈에 찰 정도의 미소녀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국선 선발전이나 선녀 모먼트도 특유의 신비성과 퍼포먼스가 높이 평가된 측면이 크다.

원래 임연우의 출생 연도는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여기서는 911년생으로 설정되어 정윤 왕무보다 1년 연상이다.

소싯적에 왕무와 함께 전국으로 모험을 하며 계략을 꾸며 적들을 골탕먹였는데, 당하는 입장에서는 영락없는 사기꾼인지라(...) 이미 부석사에서 견훤의 부하들부터 시작해서 이후 이 커플은 정적들에게 '부부사기단'으로 불렸다.[27]

집안일을 정말 못한다. 고창성 전투에서 밥 짓는 걸 도와주려다가 넘어져서 솥뚜껑에 화상을 입었고[28] 시어머니기 발해 유민들에게 잔치를 열어주려 할 때는 부엌 구석으로 쫓겨나[29] 아궁이 불 관리만 했는데도 불똥이 튀어 다쳤다.

격구단의 구단주로서는 낙제점이다. 구색 맞추기 위해 격구단을 창설해 놓고는 지원도 거의 없이 방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선수의 이름도 모른다. 심지어는 북벌할 때 난전 중에도 격구공을 날려 거란 태후를 낙마시킨 에이스의 이름이 손서당이라는 것도 몰랐다. 본인이 은혜를 입혀서 격구단으로 자진입단했고 10년 넘게 뛰고 있는 선수임에도 말이다. 다만, 격구단을 창설하자고 주장한 사람이 오빠인 임연객인데다 임연우 본인은 합법적으로 20명 가량의 사병을 기병으로 거느릴 수 있다는 메리트[30]가 있었기에 찬성한 것 뿐이고, 실질적인 운영자인 임연객의 지위가 낮은데다 임연우의 지원을 명복상이라도 받아내기 위해 구단주로 세워놓은 것이라 사실상 물주에 가깝다.

미래 역사 지식 때문에 작중 고려 최고 명장인 유금필이 병법에 해박하다고 오해(?)하기는 했지만 유금필 사후에도 여진족이 백두산 폭발 때 탈출할 수 있도록 배를 만들 때 배를 띄울 언덕 위치를 정확하게 지정하거나 거란과의 결전 당시에도 상당 부분이 과학 상식을 이용한 트릭이기는 했으나 거란군이 방심하는 위치를 정확히 간파해 후미를 공격하고 사기를 깎거나 사물을 이용해 적을 제압하고 태후 술률평을 포획시키는 등의 여러 묘사를 보면 직접 병사를 지휘할 수 없는 것뿐이지 지형지물과 심리전을 이용한 작전 고안 능력은 나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왕건의 북벌을 이루어주기 위해 백두산 폭발(946년 12월)와 석중귀의 패배 시기가 같다는 것을 이용하여 왕건 생전부터 온갖 밑밥을 다 깔아놓는 모습을 보아도 전술은 몰라도 전략적 식견은 있음을 알 수 있다.

작중 내내 그야말로 대학원생 캐릭터가 그대로 드러난다. 겉으로는 사회생활에 응대하는 스킬이 있으나 속마음은 성격적으로 일단 까칠하고 비판적이다.[31] 시아버지인 왕건은 마치 교수실의 교수님처럼 한림원 학사들한테 과제를 내어주며 임연우에게는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를 잔뜩 쥐어주고 임연우가 이걸 갖은 고생 끝에 해결하는 에피소드가 잔뜩 나온다. 그렇지만 완전히 매정하지는 않은 것이, 왕건이나 호족들이 갖은 퀘스트를 내줘도 툴툴거리며 결국은 수행하게 된다. 심지어 처음에는 속마음으로도 자기가 손해본다며 안 할 것처럼 마음먹어도, 사정을 들어보고 결국 하게 되는 경우가 대다수. 어찌 보면 츤데레다.


[1] 원작에서는 한자 명칭이 나오지 않으나 웹툰 11화에서 최승우와 글씨 대결을 할 때 공개되었다.[2] 고창 전투에서 미끼 역할이 되겠다는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은 남편에게 했던 말[3] 왕무와 부부관계를 3일 동안 가지고 난 다음에 내린 한 줄 평.[4] 주인공은 역사 전공자가 많다.[5] 태조 왕건이 모티브.[6] 현재의 진천군.[7] 임연우도 구덩이에 빠지는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8] 그간 여러번 비범함을 드러내 보여 아버지의 신뢰를 얻어둔 상태였다.[9] 조선세자와 비슷. 왕건은 모든 왕자를 태자라고 불렀기에 왕위 후계자는 구분하여 정윤으로 불렀다.[10] 세상에 비범함을 드러낸 첫 사건이 무명의 학관 학생으로서 국가의 자존심이 걸린 서예 대결에서 후백제의 대학자 최승우를 기지로 찍어눌러 패배시킨 건이었다. 이 일로 여성임에도 한림학사로 제수되기까지 한다. 이후로도 불교계의 요인이 모두 모인 앞에서 선녀의 현신이 되어 불교계의 통합을 예언하거나, 고려 최고 아이돌 신녀국선으로 당당히 뽑히거나 하나같이 비범한 일들뿐이다.[11] 본인 집안인 상산 임씨의 세력이 애매한 수준이라, 강대한 호족들이 정윤 왕무에게 임연우를 붙여줘야 한다는 계산으로 연우를 미는 이상, 자신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면 호족들이 막으려 들 거라는 계산이었다. 참고로 왕건 역시 결혼동맹으로 이어진 강대한 호족들이 자기 외손자가 왕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저렇게 열심히 뛰어주는 것이니, 자신은 정윤에게 너무 강대한 세력을 붙여주어 미리부터 후계를 확고하게 해 줄수는 없다고 연우에게 말하며 절벽에서 새끼를 던지는 사자같은 면모를 보인다.[12] 정윤 왕무에게 너무 강대한 외척을 붙여주지 못하는 것을, 저렇게 유능하고 꾀도 잘 부리는 연우를 붙여줌으로써 상쇄하며 밸런스 조정을 하면 되겠다고 결심한다.[13] 이 작품 등장인물 대부분이 그렇듯 이 사람도 실존 인물이다. 가야산 해인사에 속한 암자인 '희랑대'가 아직도 남아있다.[14] 지금 하는 말들이 수 년 후에 적중하는거를 보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밑밥을 까는거라고 설명을 했다.[15] 최지몽, 왕 노인,자인 대사[16] 927년 11월에 왕건에게 간청하여 2년 연기를 받았으나, 실제로 연기된 거는 14개월 정도였다.[17] 실제로 역사서 상으로 왕무는 첩이 3명 있었다.[18] 왕건이 말하길 왕무는 그렇다고 대답만 받아내면 무조건 할 사람이지만 주인공은 이런저런 정황을 들어 나서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19] 신라 김씨 왕조가 조상을 자칭한(당연히 거짓말이다. 신라 김씨 왕조는 서북한 고조선계다) 흉노 김일제의 전설 때문에 김씨 성의 흉노 선우로 알아들은 모양이다.[20] 임연우는 자신이 대한민국에서 왔다고 말했는데, 이 한자로 한(汗)으로도 표기되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대칸국'이라는 뜻으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높다.[21] 백제계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는데 왕무의 외가인 나주 오씨와 임연우의 친정인 진천 임씨 모두 백제계이기 때문에 따로 언급하지 않은 듯하다. 나주 오씨는 서기 500년에 중국에서 한반도로 건너왔다고 전해지는데 족보의 진위 여부와 별개로 백제계인 건 확실해 보이며 진천 임씨는 대성팔족 목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22]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거냐면 정사 역사서에서 황제였던 적이 없는 여성이 본기에 분류된 사례는 여후밖에 없다.(측천무후는 한때 진짜 황제라서 제외)[23] 원 역사에서 이런 공치(共治)의 사례로는 수문제-독고가라당고종-측천무후가 있는데, 이들은 선비족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일어난 특수한 사례이다. 한국사에서는 공치라 표기된 사례가 없다.[24] 임연우 본인이야 삼국통일까지는 원 역사를 토대로 한 사기쇼였지만, 이를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임연우의 공으로 보였을 것이다. 북벌은 정말 임연우 본인의 순수한 기지로 성공한 일이고.[25] 여담으로 고려사가 편찬되었다는 것은 왕조와 국호가 전근대에 1번 이상 바뀌었다는 뜻인데, 정황상 원나라의 침공, 원말명초기의 혼란, 홍건적의 난,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의 여파를 못 버티고 왕조 교체가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26] 왕건이 평소에 언급하기로는 너랑 결혼하기에는 왕무가 아깝다는 식으로 틈틈히 디스를 했다.[27] 기출변형으로 남매사기단과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고부사기단이 있다.[28] 참고로 전투에서 이기고 고창성에 입성한 왕무가 연우 팔에 붕대가 감겨있는 것을 보고 눈에 불꽃이 튀는 묘사가 있다.[29] 정작 본인은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한다고 의기양양했다.[30] 이들 덕분에 오지수를 개경에서 빼돌려 김장명이 있는 명주까지 데려다 줄 수 있었고, 정윤파가 힘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31] 물론 이렇게 만든 원인의 9할은 왕건이고 나머지 1할은 호족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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