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삼국에서 유비가 손부인과 칼싸움을 하는 장면에서 나온 대사.[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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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연의 드라마 영상[2] |
관우: 이 남자, 얕볼 수 없는 녀석이다.
장비: 이 녀석, 상당한 실력이로군.
(유비, 대치중인 관우와 장비를 힘으로 갈라놓은 후)
유비: 두 분 모두 훌륭하신 무예를 지니고 계십니다, 감복하였습니다.
관우: 아닙니다,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삼국지의 진정한 무력 최강은 바로 유비이며, 삼국지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사건들은 오직 유비에게 두들겨 맞아서 혹은 유비에게 맞기 싫어서 일어난 일이라는 인터넷 밈. #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유비가 나약하고 무능하다는 통설을 한 번 반대로 꼰 개그다.장비: 이 녀석, 상당한 실력이로군.
(유비, 대치중인 관우와 장비를 힘으로 갈라놓은 후)
유비: 두 분 모두 훌륭하신 무예를 지니고 계십니다, 감복하였습니다.
관우: 아닙니다,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2. 유래
디시인사이드 삼국지 갤러리에서 시작된 우스갯소리가 엠엘비파크에 올라온 걸 시작으로 다른 사이트에도 많이 퍼져나갔다.당연한 말이지만 그냥 우스갯소리로, 끝까지 읽어보면 단박에 개드립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간에 작정하고 낚기 위해서 무예도보통지 짤방을 대거 투입하여 이른바 "기마쌍검술"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삼국지와 전혀 관계 없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리면 중간 부분까지는 낚이는 사람이 꽤나 많다. 그러나 손상향이 맛을 알았네 어쩌네 하면서 정력 드립이 나오는 부분부터는 전형적인 인터넷 밈.
하지만 나름의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수많은 삼국지 팬들로 그럴싸하다며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든 밈이기도 하다.
2.1. 의외의 무력?
유비의 이미지는 흔히 '본인의 능력은 보잘것없지만 인덕이 있어 뛰어난 사람들이 주위에 모이는 군주'로 알려져 있다. 유비가 이렇게 유약한 이미지가 된 것은 초창기부터 맹장과 책사들을 밸런스 있게 모집한 조조, 아버지와 형이 물려 준 인재를 그대로 받아써서 티가 안나는 손권과는 다르게, 유비는 뛰어난 책사를 얻고 자기기반을 굳히는 타이밍이 늦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조나 손권 모두 직접 싸웠다는 묘사가 있는 반면[3] 유비는 직접적으로 적진을 돌파했다던가 군략을 짜냈다던가 하다못해 사냥을 열심히 했다던가 하는 모습이 별로 없다. 여기에 더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자체가 유비의 군략이나 무력보다는 인덕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이미지가 붙었다.하지만 정사를 포함한 각종 사료들을 세세히 살펴보면 유비도 상당한 군재가 있는 인물로, 흔히 알려진 것처럼 관우나 장비같은 훌륭한 동생들이나 책사 잘 만나 인생 얻어걸린, 인덕밖에 모르는 바보는 아니다. 유비가 활동한 후한은 대규모 반란군(황건적)에 이어 군벌들이 난립하던 전란의 시대다. 이런 시대에 마땅한 근거지도 없는 약소 군벌이 오랜 기간 동안 패퇴하지 않고 세력을 유지했다면 그 수장 또한 나름의 군사적 능력[4], 그리고 전쟁터에서 필요한 무예와 완력이 어느 정도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국가의 기틀이 다져지기 전까지 조조의 세력이 체계적인 관료제 국가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면, 유비의 세력은 인의를 강조한 협객 집단에 가까웠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유비는 입촉 전까지 고달프게 전장을 뛰어다닐 일이 많았고, 삼국지 초중반에 유비는 관우/장비/조운이 일종의 돌격대장 역할을 하는 동안 전쟁터 한복판에서 병력을 지휘하는 전선 지휘관[5] 역할을 하는 묘사가 많다. 지휘 능력과 무예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유비의 무예 또한 마찬가지로, 정사에서 유비의 무예가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사료가 다수 존재한다.
- 청년 시절 유비는 호걸들과 친분을 맺고 함께 다녔으며 자경단이라 할 수 있는 유협 집단을 결성하여 스스로와 마을의 안전을 지키는 활동을 했다고 한다. 이는 웬만큼 싸움 실력이 없다면 버거운 일이다.[6]
- 황건적의 난 당시에 유관장 삼형제는 교위였던 추정 휘하에서 부장으로 활동했는데, 교위가 지휘하는 부대 규모는 많아봐야 800명 남짓이다. 이를 감안한다면 유비는 동시기 로마군으로 따져본다면 켄투리오와 같은 직책이거나, 용병 대장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리고 이런 하급장교 역할은 예나 지금이나 사상률이 굉장히 높은데, 동생들과 같이 이를 수행하면서도 끝까지 살아남았다.
- 안희현 현위 시절 독우를 묶어 매질한 것은 연의에서는 장비로 묘사되고 있지만, 정사에서는 유비로 기록되어 있다. 그 정도의 완력과 성질머리는 있었던 청년이었다는 이야기.
- 헌제 일행과 사냥할 때 활로 짐승을 맞힌 일이 있는데 황제가 직접 그 솜씨를 칭찬했던 일화가 있다. 남부끄럽지 않을 수준의 궁술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을 듯.
- 입촉까지 수많은 전투에서 패배해 달아났지만, 자발적으로 타 세력에 목숨을 의탁할지언정 목숨을 잃거나 포로로 잡힌 적이 없다. 삼국지 내에서 수많은 맹장들이 전장에서 붙잡혀 포로가 되거나 난전 중에 전사하는 걸 생각하면, 단순히 도망을 잘 치는 수준이 아닌 평균 이상의 승마술과 무력이 보장되어야 가능한 것.
- 유자평이 유비의 무력을 알아보고 유비를 유우의 관군에 종군시켜 장거, 장순의 난을 제압한다.
소설인 연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유비의 무예가 뛰어나다고 설정된 듯한 부분이 여럿 있다. 일단 마상쌍검 자체가 실전에서의 효율과 별개로 뛰어난 승마와 무예 실력을 요구한다. 동탁 토벌전에서도 삼형제가 여포와 대결을 펼치던 중 여포가 가장 만만해 보이는 유비를 공격했는데, 유비는 여포의 공격을 피했으며, 여포가 이를 틈타서 빠져나가자 가장 적극적이고 끈질기게 만큼 여포를 추격했다.[7] 또한 적로를 타고 세 장 너비의 강을 건너뛰어 목숨을 건졌다는 서술이 있는데, 그 성격 더러운 적로를 다룰 정도로 기마술에 뛰어났다는 서술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8] 그 외에도 주유가 유비를 무력화하고 관우와 장비를 자기 수하로 삼아 천하이분을 완성시키는 발판으로 삼겠다는 이야기를 손권에게 건의할 때 '유비는 용맹하고 영웅의 자태를 갖췄다.'고 평한다. 심지어 후한때는 등자도 반쪽짜리였던 만큼[9] 순수 근력으로 마상쌍검을 해야 했다는 말이다.
이후 실제 유비의 검술은 고응법이라고 하여 명나라 가정제 시절까지 5대 검법의 하나로 이어진다. 출전은 명나라 대의 장수이자 군사가인 하량신(何良臣)의 저서 《진기(陣紀)》 인데 '변장자의 분교법, 왕취의 기락법, 유선주(유비)의 고응법, 마명의 섬전법, 마초의 출수법 등 오가의 검이 일반적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2.2. 현대 창작물에서 유비의 무력
이 때문인지 삼국지 시리즈(12를 기점으로), 삼국군영전 등 적지 않은 게임들이 유비의 무력을 나쁘지 않은 수준[10]으로 책정하거나 전투 관련 특기들을 괜찮게 부여한다.진삼국무쌍 시리즈의 유비는 1~4편까지는 오히려 자체 성능이 아우들보다 강했다.[11] 이후 시리즈에서는 아우들이 더 강하게 성능이 책정됐지만 4편까지는 빠른 공속과 전체적으로 좋은 모션의 시너지로 강캐에서 최강캐 라인에 있었다. 하지만 2, 3편의 유니크 무기는 부실한 효과를 보유해서 그 좋은 성능을 까먹는다. 4편은 그래도 괜찮게 나와서 좋은 모션과 비룡갑이라는 찰떡궁합 아이템까지 더해 준 최강캐 라인에서 놀고 있다. 이후 시리즈에서는 아우들 성능이 당대 최고의 용장에 걸맞게 큰형보다 강력하게 나왔다. 그렇다고 유비가 약하다는 건 아니고, 여전히 검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인물 중 최상급 성능이다. 빠른 속도와 더불어 빈틈이 적은 동작 덕분에 초심자부터 중수, 고수까지 인정하는 강한 성능을 가졌다. 비슷한 위치의 조조와 손권과 비교해봐도 유비의 성능이 한 수 위이며[12], 쌍검이기 때문에 플레이도 즐겁다.
토탈 워: 삼국에서는 장수 유형이 지휘관으로 나오지만 자체적인 전투력이 클론 장수들보다 좀 더 괜찮게 부여됐다.
84부작 삼국지 이후 실로 오랜만에 중국에서 다시 제작 방영된 삼국지 관련 드라마 신삼국에서 유비가 진짜 패왕스런 모습을 자주 보여줌에 따라 많은 촉빠들이 만세를 외쳤다. 특히 검술이 예사롭지 않은데 당연히 기본적인 완력은 관우나 장비에 못 미치지만[13] 검의 정교함은 웬만한 명장 못지 않다.[14] 이를테면 여포와의 대결에서 관우의 청룡도가 여포를 아작내려는 순간 그걸 밀쳐내고, 장비가 장팔사모로 여포를 꿰 뚫으려는 순간 장비의 사모도 밀쳐냈다. 이건 여포를 설득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한편 도겸을 지원하여 조조군과 맞서는 장면에서는 유비의 무력이 역대급으로 무시무시하게 표현되는데 같이 싸우는 동생들인 관우, 장비, 조자룡, 또는 여포나 허저 정도나 보여주는 잡졸 5~6명을 무더기로 갈아버리는 연출을 유비가 장병기도 아닌 칼로 보여준다.[15]
삼국지톡에서도 유비가 관우와 장비만큼은 아니어도 무예를 어느 정도 할 줄 알며 활솜씨도 준수한 걸로 묘사된다. 검도를 배웠다 언급했으며 초반부 황건적이나 원술군을 상대로 직접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포를 상대로 한 삼영전여포 때도 비록 여포에겐 셋 중 '구멍'으로 표현되긴 했지만 그래도 할 만큼은 한 편. 다만 역시 관우와 장비 만큼은 못하다 보니 유비가 직접 싸우는 장면에선 적의 공격에 당해 위기에 처하는 장면도 같이 나오곤 한다.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도 연타형 장수로 나오는데, 명중률만 보장된다는 가정하에 1:1상황에서 한 명은 확실히 보내는 준수한 성능을 자랑하는 군주계의 1등 딜러였다. 이를 이용해 캠페인 전용 아이템으로 '명중률 100%' 아이템과 '적을 사살시 옆에 적도 다시 공격하는(파진 스킬)' 아이템을 먹이면, 위나라 군대가 빽빽히 등장하는 강하로 도망치는 시나리오에서 오히려 위나라 군대 20~30명을 한 턴에 전부 썰어버리는 기행을 보일수도 있다(...). 아예 IF물로 유비가 압도적인 무력으로 장비와 관우를 때려패서 그들의 1년치 벌이를 모두 빼앗고 아예 그 둘을 자신의 노예로 삼았다는 공식 외전도 있다.
3. 기타
유비 패왕설에서 더 나아가서 "애당초 유관장 모두가 깡패여서 그러했다"는 유관장 갱스터설이 있다. 하지만 겉으로만 의리 타령을 하지 실제로는 누구보다도 의리 없는 족속들이 조폭이나 갱스터인 반면 유비 세력은 의를 진짜로 중시하는 동시에 민간인들을 괴롭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조폭과 똑같이 보기 힘들다. 협객과 조폭은 다르며 유비는 오히려 용병단과 비슷한 방식으로 규율있게 조직을 운영했다. 진짜 조폭에 해당하는 것은 아예 백파적이라는 도적 출신으로 노략질을 일삼았던 한섬, 양봉같은 이들이다. 실제 유비가 여포와 조조에게 연속으로 깨져 거점지마저 빼앗기고 빈털털이가 된 후 다시 사람을 모으는데, 이 때 모인 사람들 중에서는 산적과 흉적들도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유비와 장비는 당대의 조직폭력배들을 힘으로 누르고, 개화시켜서 협객으로 개심시켰다는 얘기다.[16][17]또 다른 자매품으로 "사실 유비가 예쁜 엘프였기 때문에 그렇게 뭇 영웅호걸들을 이끌고 다녔다."는 유비 엘프설이 있다. 연의에서 유비가 자기 귀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귀가 크다고 묘사한 것을 부처님 귀가 아닌 엘프 귀로 재해석한 것에서 출발한, 200% 유머에 가까운 설이다. 가령 삼국지 유튜버 삼칠이는 유비를 엘프로 그리고, 토탈 워: 삼국에서 유비 세력의 고유 병종이 익주 궁병이라서 유비는 우드 엘프라는 개그가 나오기도 했다.#[18]
또한 조조 여자설, 관우 코로나 19 최초 슈퍼 전파자(...)[19]라는 병맛 설도 존재한다.
창천항로에서는 유비를 유협집단의 두목으로 묘사하고, 관우 및 장비가 이끄는 집단과 충돌하여 그들을 흡수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히토리는 쾌락 히스토리에에서 유비 엘프설과 비슷한 발상에서 유비 갸루 여고생설[20]을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개그.
파생 밈으로 공명패왕설도 존재한다.
유비 최면술사 설도 있다.
백마장사로 불리던 맹장 공손찬과 유비는 노식 문하에서 동문수학했는데 노식은 삼국지게임에서는 학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는 8척 2촌이나 되는 거한이었고 문무에 뛰어났다는 기록이 있고, 비록 환관이긴 했지만 하태후를 납치해가던 단규에게 창을 낀 상태로 호통을 질러 단규를 도망치게 만든 기록도 있었다.(여담으로 하태후도 7척 1촌의 장신이다). 노식은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병력열세를 극복하고 수만명을 죽이는 전공을 세웠고 노식의 후임은 무력돼지 동탁이었던 것을 보아 노식의 무예도 준수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이 때문에 공손찬과 유비가 노식에게 배운 것이 학문이 아니라 무예였다는 개드립도 있다.
사실 이런 재평가 설의 원인은 상술했다시피 연의에서 유비를 유방급의 무능함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정사를 보면 연의나 소설의 유비가 맞나 싶을 정도로 문무겸비이기 때문이고 타 삼국의 지배자인 조조, 손권도 무력보다는 지략형 군주였던데다가 옆에 만인지적이 둘이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패왕의 자질을 타고난 유비이기에 자체 군벌을 이뤘고 황제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연의나 그걸 기반으로한 스토리들은 모두 소설이고, 소설이라는 것이 역사를 기반했다하더라도 재미를 위해서 캐릭터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작가가 임의로 각색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각색 와중에 유비가 너프된 것 같다는 인식 때문에 역덕후들 사이에서 일종의 재조명이 일어난 것이다. 삼국지 팬덤 내에서 워낙에 촉빠와 위빠 간의 언쟁과 싸움이 심해지고 이를 토대로 2차창작물에서도 각종 왜곡된 이미지로 캐릭터들이 그려지는 경우가 허다해졌기 때문에, 역덕후들이 "여러분들이 알던 삼국지가 진짜 삼국지가 아닙니다"라며 이런 사실들을 널리 전파하였다. 사실 유비가 이런 삼국지의역사적 재조명에서 선두주자로 먼저 재평가를 받게 된 정도이지 실제로는 대부분의 삼국지 캐릭터들이 비슷하게 현대에 들어서서 새롭게 재조명 되고 있다. 역사에선 조조역시 연의에서 묘사된 것 만큼 간사하고 인의가 없는 인물도 아니었으며, 제갈량에 대한 버프로 덩달아 너프당한 간옹, 미축, 법정 같은 인물들도 있다. 이때문에 소설의 재미를 위해서 멀쩡한 사람 바보로 만든다고 연의 중심의 창작물들을 싫어하게 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21]
[1] 손부인 시점이며, 합성이 아니라 실제로 나온 대사이다. 3인칭 화법은 중국 고전에서 자주 등장하는 용법이다. 애당초 시기가 시기인 만큼 당시엔 전세계적으로 귀족 계층은 자기 자신을 지칭할 때 '나'라는 표현보다는 3인칭 표현을 자주 쓰는 경향이 있다.[2] 일본 더빙판.[3] 조조는 직접 커다란 개를 때려잡거나 혼자 수십마리 꿩을 사냥했다는 언급이 있고, 거병 초창기 때 단양병(서주 단양군 출신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직접 수십 명을 베어 위기를 넘겼다는 기록도 있다.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은 유비와 조조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을 듣는 손권도 사냥 때 직접 맹수들을 상대하며 때려잡는 모습이 있고, 합비 공방전에서도 직접 퇴각하는 아군 후열에 남아 싸우자 설마 손권이 직접 퇴로를 막을 거라고 생각 못한 장료가 나중에 항복한 오나라 장수를 보고 "(용모를 설명한 후) 이렇게 생긴 장수가 굉장히 잘 싸우던데 그게 누구요?"라고 묻자 그 항장이 "그게 손권입니다." 대답하자 벙쪘다가 악진과 뒷북 추격을 했으나 놓쳤다고 기록됐다.[4] 흔히 알려진 인식과 다르게 유비의 군사적 능력도 상당했다. 흔히 제갈량의 공으로 알려진 박망파 전투부터가 유비의 작품이다. 정사에서는 아예 하후돈을 야전에서 직접 상대해 승리했고, 연의에서도 제갈량이 작전을 입안했지만 실행자는 유비였다.[5] 흔히 제갈량이 이 포지션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제갈량은 일선에서 병력을 지휘하는 지휘관이라기보다는 본거지의 민정과 군정을 담당하고 보급과 작전을 기획하며 후방을 지키는 참모나 관료에 가까운 타입이었다. 유비가 죽은 이후에야 군사 사령관 역할도 겸하기 시작했다. 실제로도 제갈량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서는 다른 말이 나오기도 하지만, 내치에 대해서는 관중이나 소하에 비교될만한 명재상이라는 평을 꾸준히 받았다.[6] 쪼다 이미지를 씌운 고우영조차도 유비의 무술 실력은 상당한 수준으로 묘사했다. 초반부에 황건적이 마을을 급습하자 봉술, 검술, 심지어는 권법까지 그럴듯한 무술로 황건적을 여럿 물리친다.[7] 정확히는 여포와 장비가 맞붙자 관우가 도우러 뛰어들었고 이에 여포와 다시 대등하게 싸웠으나 유비가 참전하여 둘러싸는 형식으로 여포와 겨루었고 힘이 달린 여포는 유비를 찌르는 척 하며 도망쳤다. 유비는 이를 피했고 관우와 장비는 놀라 유비를 지키느라 여포를 놓치고 만다.[8] 사실 고대부터도 군사용 말은 숫말이 아니라 암말을 주력으로 썼다. 이유는 숫말의 경우 징발을 하면서 발정기가 오면 난폭하게 날뛰어 기수를 떨어트리거나, 성질머리때문에 초보 기수를 다치게 할수 있어서 상대적으로 온순한 암말을 타고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역사상의 명마로 물리는 알렉산더 대왕의 부케팔로스나 항우의 오추마나 여포의 적토마일화를 보면 전부 성질 더러운 숫말을 영웅이 강제로 제압해서 그걸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장마술의 달인이다.라는 이미지로 표현한다. 유비 역시도 적로 설화를 보면 난폭한 숫말을 다룰수 있을 정도의 기마술에 뛰어나단 인물이란 표현[9] 등자는 좌우에 하나씩인데 후한때는 하나뿐이었다고.[10] 일반 무관급 수준은 된다. 또한 일부 시리즈에선 아이템 보정으로 무력 80대를 찍는 경우도 있다.[11] 정작 4편까지의 관우와 장비는 이름값에 안 맞게 약캐 취급을 받았다. 4편에서야 그나마 좀 사람다운 성능이 된 것. 물론 5편부터는 강캐 취급을 해주며 못해도 중캐 정도. 사실 4편은 일부 차지 개편으로 6차지가 웬만해선 거의 다 광역기가 돼서 상향 평준화가 됐다. 더불어 비룡갑의 등장으로 차지 캔슬이 가능해지면서 더더욱. 그런데 유비는 진공서가 너프됐어도 6차지의 후딜 캔슬이 가능해지면서 더 날아올랐다.[12] 손권은 그나마 5편을 빼면 앞설 때도 있고 엄청 밀리지는 않지만, 조조는 5편, 7편에서 유비에게 심각하게 밀린다.[13] 이 둘은 수천 년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 한 손안에 손꼽히는 장수들로 적절한 비교 대상이 아니다. 유명한 만인지적이란 사자성어가 바로 이 둘을 묘사하는 표현. 그 유명한 싸움과 용맹의 상징인 패왕 항우를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후, 정사에선 처음으로 관우와 장비에게 붙은 표현이다. 아예 이 관우와 장비의 용맹함을 일컫는 표현으로 관장지용이란 말이 따로 있다.[14] 보통 삼국지를 다루는 매체에서는 유비가 등장하기 전까지 관우와 장비가 여포와 호각으로 싸우다가 유비가 가세하자 그제서야 우위를 점하지만, 삼국에서는 이미 관우와 장비 둘만으로 여포를 아작낼 수 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가끔 유튜브 댓글에는 유비가 모든 걸 망쳤다는 글도 보인다. 실제로는 유비가 가세하자 유비가 딱 한 번 위험에 처했을 뿐 손쉽게 여포를 제압했다.[15] 작중 묘사를 보면 관우가 청룡언월도로 적병을 방패째 여럿 썰고 장비가 장팔사모로 적이 타던 말까지 꿰뚫곤 내던지는 괴력을 보여주는데, 유비는 적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고 쌍검으로 베어버리는 무예를 보여준다.[16] 여기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유비의 무력이 만만치 않았을 거라는 점이다. 제아무리 장비 같은 맹장이 옆에서 있었다고 한들 이 때 당시 관우는 조조의 식객으로 있어서 부재 중이었던 걸 생각하면 산적들을 통솔할 만한 무력도 있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제아무리 유비가 인성이 좋아도 그야말로 당대의 조폭이라 할 만한 산적들이 인성만 보고 사람을 따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유비가 검술과 말타기 등 무술에 능하고, 진두에 서서 용감히 싸우는 모습에 부하들이 감복했음은 틀림없다.[17] 당시는 중앙행정부의 힘이 약한 고대였으며, 후한말은 난세라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지방의 실력자들이 자체적으로 무력집단을 구성하는 경우가 잦았다. 관군이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보호해야했기 때문. 실제로 조운 역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관직을 얻기 전부터 부하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정부의 지배를 받지 않은 세력 중 엄백호처럼 1만여 명의 무리를 이끄는 군벌까지 성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후한말 인구는 5600만 명 정도에서 삼국시대에 700만명 수준까지 죽었는데, 한 세대만에 인구가 8분의1로 줄었다는 건 (전란으로 죽은 이들도 많겠지만) 인구 대다수가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났다는 얘기다. 즉 대다수 인구는 무정부상태였으니 백성들은 지방의 유력자들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유비의 세력은 (조폭은 당연히 아니고), 우리가 생각하는 협객보다는 무정부 상태에 준하는 시대에 치안을 담당하는 지방의 실력자 중 하나일 수도 있다. 물론 유비가 인덕이 있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는 것을 보면 조직을 운영하는 방식이 양심적이고 의로웠을 가능성이 높다.[18] 작가는 좋은 영웅들 등을 연재한 '말호'이다.[19] 관우가 지키던 형주가 바로 코로나 19 최초 발생지역인 우한이며 관우를 만났거나 관우와 관련된 자들 중에서 병으로 죽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20] 팔이 길어 무릎까지 닿는다는 걸 모에 소매로, 자기 귀를 볼 수 있다는 부분을 토끼귀 코스프레로 해석했다.[21] 물론 그렇다고 연의가 폄하당해야만 하는 소설은 아니다. 일단 소설로써 재미는 챙겼고, 이로써 삼국지에 대한 역사적 관심도 역시 높아졌으니 되려 정사 삼국지입문을 위한 일종의 촉매제 역할도 해낸 셈이다. 실제 정사 삼국지는 말 그대로 역사서라서 역사적사실을 무미건조하게 풀어낸 수준이라 여기서 재미를 찾기는 힘들다(...). 이는 세상 모든 역사를 기반으로한 창작물들이 가지는 일종의 딜레마인 셈이다. 삼국지연의는 개 중에서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역사소설이라서 더 부각되는 부분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