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1 17:34:49

비육지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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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
넓적다리 비 고기 육 갈 지 탄식할 탄
저는 늘 말안장 위에 올라앉아 있어 허벅지에 살이 찔 새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너무 오래 말을 타지 않았더니 허벅지에 살이 많이 쪘습니다. 세월만 덧없이 흘러 이렇게 늙어가서 아무 것도 이룬 것 없이 끝나나 하는 생각에 잠깐 슬퍼진 것입니다.
- 유비(삼국지연의)

1. 개요2. 유래3. 뒷이야기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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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삼국시대유비의 발언에서 나온 말로, 허벅지에 살이 찐 것을 슬퍼하다. 사내 대장부가 세상에 나와 이룬 일 없이 세월이 흘러감을 탄식하는 말로 이룬 것 없이 세월을 보내는 것을 한탄한다는 뜻이다.

2. 유래

유비는 유표에게 객장으로 의탁하여 신야에서 4년 동안 별일 없이 지냈는데 어느 날 유표의 초대를 받아 잔치에 갔는데 우연히 화장실에서 일을 보다가 자신의 허벅지가 살이 쪄서 굵어졌음을 알게 되고는 눈물을 흘렸다. 유비의 눈물 자국을 본 유표가 깜짝 놀라 유비에게 묻자 "내가 옛날에는 몸이 안장을 떠나는 법이 없어서 허벅지에 살이 붙을 틈이 없었는데 요즘은 말을 타지 않아서 평소에 붙지 않던 허벅지살이 붙은 것을 보고서, 세월은 흐르고 몸도 늙어가는데 아무것도 이룬 게 없으니 슬퍼한 것입니다."라고 했다.[1]

당시 유비의 나이는 40대 중반이었다. 현대인의 기준으로 봐도 이룬 것 하나 없이 객장이란 위치에서 40대 중반이라면 자괴감이 들 만한데 60세까지만 살아도 제법 오래 살았다고 생각한 그 시대의 수명을 보면 유비의 절망감은 더했을 것이다.[2]

유비가 말을 타지 않아서 허벅지가 늘어졌다고 탄식하게 된 이유는 삼국지의 배경이 되던 당시 중국의 삼국시대에서는 아직 등자가 개발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3]
파일:external/www.erminestreetguard.co.uk/cav.jpg
로마군 기병대로 분장한 재연배우
위의 사진과 같이 등자 없이 말을 타면 굉장히 어정쩡하고 불안정한 자세로 타게 되는데 가만히 있거나 느리다면 어찌 버틸 수 있지만 속도를 내거나 무기를 사용한다면 떨어지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허벅지로 말등을 꽉 붙들고 있어야 한다. 또한 기병의 주 역할이 빠른 기동력과 돌격 시의 충격력을 이용해 적의 진영을 붕괴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등자 없이 이를 한다는 것은 등자가 있을 때보다도 훨씬 힘들고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당시에 말을 타고 전장을 누볐다면 매일 허벅지 운동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허벅지에 군살이 찔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일화를 통해 연의에서 나오던 것처럼 유비가 인의만 주절거리며 부하들에게 다 맡긴 것이 아니라 본인도 싸움을 곧잘 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유비 패왕설 수준은 아니겠지만 그의 무예가 일정 수준 이상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일화. 애당초 유비는 의용장에서 커리어를 시작했으니 무예가 안 받쳐줬으면 그 자리까지 올라갈 수도 없었다.

3. 뒷이야기

그런데 정작 유비가 허벅지에 살이 찌게끔 세월을 허비하게 된 건 바로 유표 때문이다. 당시 조조원상원담이 서로 싸우는 걸 틈타 하북을 야금야금 먹어가고 있었고 유비는 유표에게 조조의 뒤를 쳐야 한다고 계속 진언했다. 하지만 유표는 조조의 북진을 그저 방관했고, 조조는 배후의 위협에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이 하북 공략에 집중할 수 있었다.[4] 원씨 형제한테 서로 화해할 것을 권유하거나, 유비가 박망파로 하후돈을 유인해 격파하기도 했지만 끝끝내 직접적인 행동은 없었고 결국 조조는 하북을 완전히 평정해 버린다. 그제야 유표도 조조의 뒤를 치지 않은 걸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유표가 행동에 나서지 않은 이유는 본인의 성격, 친조조파인 채모 일파의 존재, 손권의 지속적인 강하 공격[5] 등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유표는 유비를 잘 대접해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유비가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 독립할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곽가도 이런 점을 간파하고 조조에게 유표는 유비를 제대로 쓰지 못할 테니 배후를 공격당할 걱정은 할 필요 없다고 진언했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여담으로 이렇듯 나이가 50이 되도록 이룬 것 하나 없이 자신의 처지에 비통해하던 유비에게도 한 줄기의 광명이 비춰지며 도약의 기회를 얻게 된다.

4. 대중매체

4.1. 삼국전투기

이 말을 살 빼는 덴 전쟁이 최고라는 식으로 해석해서 유비살 빼려고 전쟁이나 일으키려는 악마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삼전 특유의 유비를 나타내는 묘사긴 하지만.

유비는 유표에게 조조와 전쟁을 벌일 타이밍이라고 말하지만, 거절당하고 대신 형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도적 떼들을 소탕하러 가게 된다. 허나 장비조운이 너무 쉽게 적장을 잡아버려서 너희가 이러면 내가 살을 어떻게 빼냐고 화를 내던 중 서서를 만나게 된다.

4.2. 삼국지톡

파일:살찐유비.jpg
시즌 7 5화에서 나름 마른 체형이던 유비모 히어로의 살찐 시절만큼 비대한 체형으로 재등장. 유비의 언급 등을 조합해 보면 형주 망명 후 전투에 나갈 일이 줄어든 데다가 유표 등의 눈치를 보느라 스트레스를 받아 폭식해 지금의 체형이 된 모양이다.[6]

난생처음으로 서서를 등용하며 전문 참모의 지략을 통한 소름 끼치고 완벽한 승리[7]를 맛보나 조조의 계략으로 서서가 유비에게 이별을 고하고 조조에게 투항하러 떠나게 된다. 그가 가기 전 동문이 있는 곳을 알려주자 전쟁 중에 자신이 너무 방심했다며 귀한 사람을 놓치는 일 같은 것은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며 관우와 장비의 트레이닝으로 혹독하게 체중 감량을 하여 예전 몸을 되찾는다.

4.3. 연희 시리즈

애니메이션 진 연희무쌍 소녀대란에서 관련된 에피소드가 나온다.

장비가 무릎이 통통하고 부드럽다는 말을 해 다이어트에 돌입하고 마초와 마대를 따라 운동을 하다 엄청난 운동량에 단식 다이어트로 바꿨다가 굶주림에 상한 멘마를 먹어서 고생하게 된다. 거기다 배탈이 난 걸 다른 사람들이 임신했다고 오해해서 소동이 벌어지지만 지나가던 화타가 바로잡아줘서 일단락된다. 이후로도 살찌는 거에 대해 신경 쓰는 묘사가 가끔 나온다.

[1] 당시 유비 본인의 숙적이었던 조조는 유비와 달리 파죽지세로 세력을 착착 확장시켜서 원씨 세력을 격파하고 하북 4주를 병합하는 등 사실상 천하통일이 기정사실화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유비는 몰락의 정점을 찍으며 기껏 이룬 기반도 죄다 날려 먹고 다른 사람의 객장으로 들어가는 등 줄곧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하다 유표에게 흘러든 비참한 상황이었다.[2] 다만 이룬 게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것도 어폐가 있는데, 어찌 되었든 간에 예주자사, 좌장군이라는 높은 관직을 조정으로부터 받아 전국구적인 명성을 날린 스타급 인물이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기의 세력이 없는 객장에 불구하다는 사실이 비참한 것은 맞았지만. 물론 유비에겐 황실의 종친이라는 정당성이나 권위가 있었지만 후한 황실은 사실상 형식적인 절차였기에 존재했던 거지 이미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각 지방의 실권자들이 서로 다툰다는 것은 중앙 시스템이 이미 붕괴해서 유명무실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유비가 비록 단발적인 사건들로 이름을 날렸어도 후한 황실의 종친이니, 좌장군이니 하는 것들은 그렇게 큰 의미가 있다고 보긴 힘들다. 다만 그런 형식적인 권위 때문에 사람이 모이고 만담을 나눌 수 있는 것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아예 의미 없는 건 아니지만.[3]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등자 유물은 서진시대의 유물이다. 한쪽에만 있는 등자는 한나라 때에도 있었다.[4] 실제로 원소는 병력 세력 등 모든 면에서 조조보다 윗줄이었기에 조조는 어떻게든 원소를 막아내기 위해 세력을 쥐어짜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최소한의 수비를 제외하곤 후방에 돌릴 여유 병력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다.[5] 결국 208년황조가 죽고 강하가 함락당한다.[6] 당시 가장 높은 추천수를 받은 베댓에선 이렇게 표현했다. 같이 임신했나...?'[7] 말 그대로 모든 게 계획된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