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90년 1월 14일 |
경상도 상주목 산남면 존하리 (현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존도리[2] 30번지) | |
사망 | 1922년 11월 26일[3] (향년 32세) |
경상북도 대구부 대구형무소 (현 대구광역시) | |
본관 | 풍산 유씨(豊山 柳氏)[4] |
이명 | 유병의(柳秉義)·유성중(柳性仲) 이성중(李性中)·이병의(李秉義) |
자 | 숙경(叔敬) |
가족 | 배우자 이우교[5]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231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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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1890년 1월 14일 경상도 상주목 산남면 존하리(현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존도리 30번지)에서 아버지 유광식(柳洸植, 1869 ~ 1923.8.17)[6]과 어머니 우봉 이씨(1866 ~ 1951.5.16)[7] 사이에서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919년 경상북도 일원의 3.1 운동에 참가하여 그해 7월까지 활동하던 중 일본 제국 경찰의 추격을 받자 곧바로 중화민국 상하이시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임시의정원 경북대의원(慶北代議員)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군자금 조달의 지령을 받고 국내로 잠입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음력 3월 16일 심야에, 이병한(李炳漢)·유시언과 함께 모조 권총을 소지하고 문경군 산북면 서중리 장수학(張守學)의 집에 침입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대지 않으면 살해하겠다고 협박하였고, 마침내 그로부터 2,100원을 수합하여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또한 그해 음력 10월 이민식(李敏軾)·장응규·안종운 등이 주도·조직한 주비단(籌備團)의 임시정부 공채모집에 협조하여 공채증서를 윤용구(尹用求)에게 매각하고자 하였으나 본인의 거부로 실패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1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대구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그해 10월 6일 대구지검에서의 예심에서 공판에 재차 회부되었다. 또 그해 11월 29일 1심에서 징역 10년형을 언도받았다.#
한편, 1922년 7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형(미결 구류 40일 통산)을 언도받아# 공소하여 1922년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강도 혐의로 원심 판결이 취소되어 다소 감형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그 직후 또 상고하였으나 그해 10월 2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상고 기각#, 형이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단식투쟁을 계속하다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005년 11월 1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