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실존인물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게 포로로 잡혀 있다가, 노예로 팔려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를 따라 유럽으로 가게 된 인물. 메디치가 사람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가 12년 동안 세계를 여행하면서 쓴 기행문 <나의 세계 일주기>에 짧게 언급된다.그러나 그의 성이 꼬레아라는 근거는 없으며, 카를레티의 일기에는 세례명 안토니오로만 언급되어 있다. 후대의 연구가 전해지는 과정에 오해가 생겨 안토니오 꼬레아로 알려진 것. 또한 서양에 가끔씩 보이는 Corea(또는 Correa, Chorea 등)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이 사람의 후손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나, 원래 이베리아 반도에 존재하는 성이다.[2] 재즈 피아니스트 칙 코리아, 축구선수 앙헬 코레아, 호아킨 코레아, 라파엘 코레아 전 에콰도르 대통령 등등 의외로 많지만 전혀 한국계와는 무관하다.
한때 루벤스의 작품 한복 입은 남자가 그의 초상화라는 이야기가 아래의 소설 때문에 널리 퍼졌으나 최근 연구 결과 조선인이 아니라 1600년 네덜란드를 방문한 명나라 상인 이퐁의 초상화라는 주장에 더 힘이 실리고 있다.
2. 가상인물
베니스의 개성상인의 등장인물로 16~17세기 편의 주인공. 본명은 유승업(柳承業). 자남산과 남문루 아래 개성상인 유씨 집성촌 출신. 아버지는 최 부호 댁에서 일을 하며, 2살 아래의 여동생 명이가 있다. 그의 이름 안토니오는 세례명 안토니오를, 성인 꼬레아는 외국인들이 고려를 부른 말을 땄다. 압축해서 표현하면 "이역만리에서 만들어낸 샐러리맨의 신화"라고 할 수 있다.2.1. 조선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에 의해 가족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고 분의복수군으로 지원했는데, 경상우수영에 배속되었다. 고참 수졸들과 싸움이 날 판에 만난 사람이 유능한 화포장인 하만대. 그리고 첫 출진이 하필 조선군이 굴욕적으로 패배한 칠천량 해전. 패배 후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다.2.2. 일본
포로로 끌려가 사쓰마에서 다른 포로들과 함께 농사를 짓는데 이때 정낙일을 만남. 글공부도 했고 똑똑해서 통역을 맡았는데 사사건건 태클 거는 이가 생겼는데 그는 신봉구. 훗날 그 때문에 자리를 빼앗길까 염려한 도모나카 때문에 오해가 생기지만 간신히 해결했고 하만대, 정낙일과 탈출을 기도하지만 신봉구의 고변에 모두 잡히고 몸싸움이 나서 죽음의 순간 하만대의 프렌드 실드로 살아남고, 이누가와의 기리스테고멘에 죽을 뻔 했으나 사카이로 압송된다. 사카이 압송 후 이치로와 함께 창고지기를 맡는데 거상 도시오와 서여스님을 만난다. 조선의 도자기와 관련해서 도시오와 한판 붙지만 노련한 상인인 도시오의 지혜에 밀려 패배.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후 담 대인을 통해서 귀향하기로 한다.2.3. 명
담 대인은 피렌체의 카를레티 부자의 노예란 명분으로 그를 빼내서 명의 지인을 통해서 그를 조선에 보내려 했으나, 불과 약간의 차이로 담 대인의 지인은 근무지가 옮겨지고 다른 사람이 부임되어서 일이 꼬인다. 그래서 시간을 끌다가 천주교 수도자인 스테파노 수사를 만나서 라틴어, 로마법, 천주교를 접하게 되고 세례성사를 받는데 그 세례명이 안토니오.2.4. 유럽행
동남아와 인도를 통해서 가는 중에 병에 걸려 고생도 하고, 개신교 신자인 네덜란드 군인에 붙잡혀 고초를 겪는다. 개신교 신자인 네덜란드 사람들은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가톨릭 신자들을 무조건 나포했다.2.5. 베니스
카를레티 부자의 노예 해방과 델 로치의 조카인 스테파노 수사의 추천으로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델로치 상사에 입사해 산 마르코 창고의 창고지기로 상사원 생활을 시작한다. 완전히 귀화해서 이름을 안토니오 꼬레아로 바꾼다. 그의 후견인은 루셀라니 수석 부지배인으로 그의 집에서 얹혀 살며 그의 외동딸 줄리에타와 조금씩 정을 쌓는다.[3]사개치부법이란 조선, 정확히 말하자면 송상 고유의 복식부기법을 활용해 낙서(?)를 했다가 뒷정리를 제대로 못해서 이를 보고 경악한[4] 루셀라니에게 걸렸지만 오해를 풀고 그것을 이용해 그에게만 따로 보고를 하고 사건을 겪으며 그의 측근이자 후계자로 커간다. 상사에서 안토니오를 따르는 사람들은 대체로 루셀라니에게 일을 배운 사람들이다.
2.5.1. 교황청 성 베드로 대성당 유리입찰
별로 어려울 게 없던 일이었지만 난데없는 교황청의 베네치아 공화국 파문 선고와 피렌체 메디치가의 공작에 궁지에 몰린다. 하지만 나폴리 왕립 공작소와 힘을 합치는데 같이 임무를 수행한 로셀리노의 누설과 상대의 회유에 안토니오는 위기를 겪게 된다.안토니오는 메디치 가의 공작에 잘못 걸려 사기 혐의를 받게 되면 회사에서 쫓겨날 것은 물론이고 심하면 노예 신세가 되어 줄리에타에게 돌아갈 수 없다는 두려움에 떨었지만 이내 침착하게 마음을 먹고 나폴리의 신뢰를 사서 일을 풀어나간다.
안토니오를 믿은 나폴리 측에서는 코미션 없이 응찰해서 몇천 두카트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입찰을 받고 안토니오는 무사히 베네치아로 돌아가게 된다. 돌아가는 길에 메디치 가의 루치아니 데 메디치 공녀에게 비르투오조(대가)라는 인정을 받았다.
2.5.2. 동방무역부(사파비 조 페르시아 이스파한 상관) 대리인 시절
사파비 조 페르시아의 이스파한에서 대리인으로 근무한다. 이 시점부터 서서히 드러난 라이벌이 알베르토. 이 때의 상대는 잉글랜드 알비온&칼레도니아 상사의 지배인 알프레드 머레이.[5]독일 지역에서 알베르토가 한자동맹을 상대로 공동 조치를 취하는 것을 설득하지만, 알프레드 머레이가 이미 조치[6]를 취해서 이를 안 알베르토는 크게 낙담한다.
안토니오 또한 자신의 안이함으로 아바단 상인들을 놓치는 바람에 베니스가 무리해서까지 독점하던 인디고 블루를 영국으로 유출시키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자신의 상사인 루셀라니[7]에게 말하여 베니스 정기상선대로 하여금 대륙산 물품을 거래하는 동방상인들을 그냥 보내게 함으로써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조가 국경지역인 타브리츠에서 충돌하게 만들어[8][9] 오스만 투르크, 그리고 그 뒤에 있던 영국과의 무역분쟁을 해결한다.
2.5.3. 신항로 개척
여러 해외 상관에서 근무를 하고 부지배인으로 승진한다. 그 사이에 줄리에타와 결혼을 하면서 아이들도 생겼는데, 잦은 해외 파견 근무 때문에 살짝 바가지를 긁히기도 한다.
세비야 상관 근무 시절 생각한 신대륙 직교역을 추상적인 아이디어 단계에서 조르지오 델 로치에게 말한 것을 안토니오와 알베르토가 같이 있는 자리에서 마치 세부기획안이 수립된 것처럼 조르지오가 부풀려 말하고, 이에 안토니오에게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여김과 동시에 조르지오가 경영에 직접 나서려는 것을 간파한 알베르토 또한 모든 일에는 책임이 뒤따른다는 경고성 멘트와 현재 심상찮은 유럽의 정세[10]를 언급, 최대한 현금을 확보해둬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안토니오에게 그의 계획에 필요한 것보다 적은 자금을 넘겨준다. 안토니오로서는 뜻하지 않은 협공을 당한 셈이다.
그래도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고자 한 다리 건너 아는 사이인 갈릴레오 갈릴레이[11]로부터 위치측정 방법과 참고 자료들을 넘겨받아 사르가소 해를 항해하지만, 풍랑을 만나 화물의 절반을 버리며 본 사업을 안 한 것만도 못한 상황이 되어 커리어에 흠집이 나게 생긴다.
하지만, 연지벌레[12] 교역의 대박[13]으로 서열로 보면 부지배인 말석이지만 업적과 성과[14]로 알베르토와 맞먹는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2.5.4. 30년 전쟁
개신교와 가톨릭 양쪽 중 어디에 손을 댈지 고민하던 델 로치 상사는 주식회사 형태인 캄파넬라 상사를 설립해서 델 로치 상사는 개신교를, 캄파넬라 상사는 가톨릭교회를 지원하는 양다리를 걸친다. 안토니오는 가톨릭 동맹 지원을[15][16] 알베르토는 개신교연합 지원을 주장하게 된다.[17] 이로써 안토니오와 알베르토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본격 라이벌전이 시작된다.안토니오는 캄페넬라 상사의 지배인으로 파견을 나가 가톨릭 동맹과 계약하여 보헤미아방면의 군수 지원을 맡고, 알베르토는 델 로치 상사에 남아서 개신교연합과 계약, 라인란트 팔츠[18]에 물자를 공급한다. 그런데 캄파넬라 상사 설립은 극비리에 이루어져 사실상 델 로치 상사의 1인자로 서려는 야심을 가진 알베르토의 뒤통수를 제대로 친 셈이 되었다. 이 사실을 양다리로 결정하는 자리에서 안 알베르토는 멘탈이 반쯤 나갔고, 안토니오 역시 찜찜함을 느꼈다.
초기에는 일본산 총을 대량으로 수입해서 알베르토를 골탕먹인다. 다만 당시 일본산 총이 유럽산 총보다 좋을 리가 없기에 재현 오류다.[19] 파격적인 고리로 자금을 끌어들이는 알베르토의 공작에 돈줄이 말라 위험에 처하지만 프랑스와 사보이아 공국의 정치 상황을 이용한 발렌슈타인의 도움[20]으로 다시 자금을 수급하고[21] 승리하게 된다. 그리고 알베르토는 몰락하여 피렌체에서 집사 노릇이나 하면서 근근이 살아가게 된다.
2.5.5. 프랑스 군함 수주 vs 인쇄소 인수
이때 델 로치 상사는 개신교연합에 전쟁채권이 물리면서 망할 뻔한 것을 캄파넬라 상사가 가톨릭동맹으로부터 배당받은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바탕으로 합병했기에, 델 로치 캄파넬라 상사로 활동.베니스의 유리산업이 내리막길에 접어들자[22] 그 자금을 어디로 투자해야 하는지 결정해야 하는 문제.
최측근인 포르타와 은인의 아들로 마음에 빚이 있는 상사의 대표 조르지오 두 사람에 대한 안토니오의 내적 갈등이 생기는 시기기도 하다. 내심으론 후계자로 적격인 포르타도 도와주고 싶고, 한편으론 조르지오가 경영에 관여 않고 여생을 편안히 보내게 하고 싶어서[23] 갈등한다.
포르타가 프랑스를 방문해서 군항 툴롱까지 시찰했는데 그건 다 영국의 첩보기관을 속이기 위한 프랑스의 페이크. 프랑스는 스웨덴과 손잡고 대형 케렉선 바사 호를 인수하려던 것이었다. 이에 프랑스 조선소에 자금이 묶이고 조르지오는 인쇄소에 투자해서 그런대로 재미를 보고 있어서 궁지에 몰린다. 하지만 발렌슈타인의 도움으로 바사 호의 설계도를 입수하고, 스페인에서 달려온 디에고의 판단으로 바사호는 겉보기 회전점 때문에 포격 후 급선회에 약점이 있을 거라 생각해 프랑스를 설득해 진수식에서 그것을 실험했는데, 디에고의 예상대로 바사 호가 그 자리에서 침몰함[24]으로써 막판 뒤집기에 성공해 마침내 400만 두카트나 되는 군함 발주를 따냈다. 한편 자기 지분을 모조리 빼내간 조르지오는 교황청의 성서 인쇄 수주도 못 받고 모든 자금을 날리는데[25] 안토니오의 부탁으로 그를 명목상 대표의 자리에만 머물게 하였다.
이 일을 마지막으로 은퇴하는데, 캄파넬라 상사의 상사명을 꼬레아 캄파넬라 상사로 되어 자신의 이름을 상사명에 쓰이는 영광을 안고 떠난다. 후계자는 포르타, 그의 보좌는 팔라디오가 맡는다. 은퇴 후엔 아내 줄리에타와 함께 장인 루셀라니의 고향 알비로 내려가 조용히 여생을 보낸다. 그리고 이때 재봉사를 시켜 한복을 만들고 루벤스를 불러 한복 입은 남자를 그리게 했다는 설정.
슬하엔 1남 1녀를 두었으며 2살 터울
3. 관련 문서
[1]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꼬레아' 가 아니라 '코레아' 가 맞다.[2] 이것과 관련된 일화가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 책의 1995년 개정판인 '정말, 경찰을 부를까?' 에 실려 있다.[3] 그 전까지는 거처가 마땅히 없어 상사 창고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4] 사개치부법에 물건과 자금의 흐름 등을 정확히 기입하면 회사의 경영 전략까지 누설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5] 훗날, 영국 정부의 핵심 요직, 정확히 말하자면 재무경(영국 총리의 효시!!!)의 보좌관이 된다. 이 같은 지위를 활용하여 안토니오 꼬레아에게서 사르가소 해 항해 자료를 받는 조건으로 30년 전쟁에 대한 유럽 정세를 제공한다. 당시 영국은 북미 지역 식민지 사업 때문에 사르가소 해 항해 자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6] 한자동맹 요인과의 협상에서 점점 밀리던 알베르토는 철광석과 소금이라도 막아달라고 했지만, 머레이가 이미 높은 값으로 두 품목을 수입하겠다고 한 마당에 알베르토의 부탁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사회생활의 비정함이 제대로 드러나는 부분.[7] 델 로치 상사의 수석 부지배인. 동방무역부를 총괄하기 때문에 안토니오의 상관이기도 하다. 훗날 안토니오 꼬레아의 장인이 되고, 이 일을 계기로 안토니오의 능력을 확신한 그는 다음 세대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상사원 생활을 마무리 짓고 고향인 알비로 돌아간다.[8] 동방상인들은 중동과 중국을 육지로 오가는 이들로, 거래를 못하는 것은 그들에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 따라서 이들은 어떻게든 물품을 팔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아제르바이잔 지역인 타브리츠가 물자 집산지로 변할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에 오스만 투르크와 사파비조 페르시아 사이의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던 그 황폐한 땅이 노른자위 땅으로 변하면 두 세력이 이를 두고 충돌할 것을 노린 안토니오는 그 시점에 베니스 해군함대가 이스탄불에서 무력시위를 하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새로 생긴 분쟁에서 베니스와 강화(정치적, 경제적 모두)를 우선적으로 맺을 것이라 예상한 것이었다.[9] 사실, 이러한 수는 오스만 제국 예니체리군 사령관 부관인 야유브타이가 현재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대외관계 현황을 설명하면서 넌지시 흘린 힌트[27]를 안토니오가 제대로 해석한 결과였다.[10] 17세기 보헤미아에서의 무력 충돌. 바로 30년 전쟁이다.[11]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한 그 사람이다.[12] 이 녀석을 산 채로 열탕에 넣고 끓인 다음 짓이겨 낸 진액을 건조시키면 코치닐이라는 붉은 색 염료가 나오는데, 다들 친숙한 염료다. 바로, 딸기우유 색을 내는 원재료다!!! 우리는 여태까지 벌레 진액가루가 들어간 우유를 좋다고 먹은 거다. 그렇지만, 사르가소 해 항로가 개척되기 전까지는 비둘기의 피라고 불릴만큼 선명한 붉은 색을 내는 데 반드시 필요하지만 공급량이 너무 딸려서 비싸기 짝이 없는 최상급 염료로 취급됐다.[13] 연지벌레는 온도에 민감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항로를 타면 많아야 10%만 살아남는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연지벌레 매입비의 3배를 건졌다는데, 기온이 높은 사르가소 해 루트를 선택해 연지벌레를 모두 살려서 가져온 안토니오는 무려 30배의 수익을 남긴다. 레알 소설판 대항해시대[14] 연지벌레 매입비에 투입한 자금이 7천 페스타, 두카트로 5천이었는데 30배 대박이었으니 15만 두카트를 벌면서 순수익만 14만 5천 두카트가 나왔다. 처음 배정된 예산 5만 두카트를 기준으로 해도 순이익이 200% 가까이 났고, 당시에는 풍랑이 통제불능의 변수였기에 정상참작됐을 것이며, 남들이 접근할 수 없으면서도 더 빠른 항로까지 개척했으니 충분히 차고 넘치는 실적을 낸 셈이다.[15] 사르가소 해 항해 정보를 은유적인 표현으로 편지에 담아 알려주는 대신, 영국 정부의 요직에 앉은 알프레드 머레이로부터 받은 편지에 은유적으로 표현된 정보를 근거로 한 결과였다.[16] 당시 영국은 표면상으로 신교를 지지하며 물밑 공작을 벌였지만 구교 쪽에도 용병을 파견하는 등 적당히 손해보지 않도록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결국 프랑스를 끌어들여 막판에는 신교의 인정을 받게 되지만.[17] 자신이 각 지역 상관 대리인으로 돌아다니던 시절에 구축한 유대인 정보망을 통해 수집한 정보에 근거한 결과였다.[18] 지금의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이다.[19] 정확히는 델 로치 상사 세비야 상관 대리인인 팔라디오가 일본산 총을 캄파넬라 상사, 즉 안토니오 꼬레아에게 빼돌린다. 이때가 유럽에서 무기가 거의 동났다는 설정인데, 그 때문인지 개신교 연합의 군대는 대부분 소지하고 있는 총이 불심지식 머스킷이고 심지어는 골동품인 루미 총도 있었다. 팔라디오는 포르타, 구에르치노와 더불어 안토니오의 사람이었지만 캄파넬라 상사로 옮기지는 않았고, 자신의 담당지가 가톨릭 지역, 그것도 가톨릭 동맹의 주축인 스페인이었던 덕분에 이런 일을 하는 게 가능했다. 또한 알베르토가 군수 지원 계약을 맺은 개신교 연합 서부 사령부의 상대가 플랑드르-프랑슈콩테-밀라노로 이어지는 스페인 통로에 주둔했던 스페인군이어서 적군에게 무기를 넘기려는 시도를 방관하지 않았을 것이다.[20] 프랑스 첩보부 책임자인 조제프 드 트랑블레 수사와의 접선을 주선하여 사보이아 공국의 독일 진출을 반대하는 프랑스에게 공작금을 주는 대신, 사보이아의 친프랑스 인사들로 하여금 반 프랑스 노선을 걷는 사보이아 공국의 군주에 대한 반란을 꾸미게 한 것. 당시에 알베르토가 개신교연합에 배팅한 이유는 사보이아 공국 소속의 용병대 때문이었고, 이들의 최우선 순위는 당연히 사보이아 공국이다. 요약하면 발렌슈타인이 꾸민 공작은 개신교 연합 서부전선의 사보이아 공국 용병대를 전열에서 이탈시키는 것이었다.[21] 관련 대목을 보면 급한 대로 50만 두카트(!)의 군자금을 들고 온 포르타가 '그 동안 투자요청을 외면했던 유태인들이 쉬쉬하면서도 가장 먼저 돈을 싸들고 와서는 줄을 서서 기다린 것 때문에 선별해야 할 지경이었다.'고 말한다.[22] 안토니오의 첫 번째 고비였던 교황청 유리납품 프로젝트를 이 에피소드의 복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실제로도 유리산업에 진출한 피렌체는 세계 최초로 유리백과사전을 출판할 정도로 베니스를 따라잡았다.[23] 델 로치 상사가 도산직전까지 간 것을 캄파넬라 상사와의 합병으로 회생시킨 대신, 조르지오 델 로치의 캄파넬라 상사 지분이 대폭 줄어들어 최대주주의 자리는 캄파넬라 상사 설립에 가장 많은 자금을 출자한 베니스의 부호이자 유력자인 구스토디가 차지했다고 한다.[24] 바사 호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이 날 이 충공깽한 사건을 직접 보고 멘탈이 나간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그 참상을 잊고 싶어서 돛대는 잘라내고 대포는 건져서 녹여다가 다시 주조하라고 했다. 바사 호의 침몰 원흉이 본인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을 터이다.[25] 교황청 성경 인쇄는 읽기 좋은 고딕체를 쓰는 네덜란드 인쇄업자들이 수주했다고......[26] 안토니오와 여동생 명이의 나이차도 2살, 안토니오와 줄리에타의 나이차도 2살, 줄리오와 줄리아의 나이차도 2살이다. 심지어 조르지오 델 로치도 안토니오보다 2살 어리다. 콩드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