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5 12:08:44

율산그룹


1. 개요2. 역사3. 역대 회장4. 계열사 목록5. 여담6.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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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율산그룹 로고.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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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율산실업을 주축으로 했던 무역중심 기업집단으로, 제세, 대봉, 원기업과 더불어 1970년대 재계의 '앙팡테리블'로 손꼽힌다.

2. 역사

1975년 6월 17일,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한 신선호(申善浩, 1947. 5. 6. ~)[2]가 27세에 오퍼상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광주서중학교-경기고등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차례로 함께 졸업한 동창생들과 함께 자본금 5백만 원으로 '율산실업'을 세운 게 효시이다.[3] 초기에는 중동 붐을 타고 건축자재 수출을 하면서 사세를 신장시켜 부실기업 신진알미늄을 인수했고, 동원건설을 인수해 건설업에도 손을 뻗었다. 이에 따라 기획, 조달, 관리, 지휘 등 4개 본부를 조직한 후 1976년 회장직에 장인인 원로언론인 부완혁(夫琓爀)[4]을 추대해 그룹 모습을 갖췄다.[5]

​1977년 에 경흥물산을 인수해 패션업에도 진출하고 동아공업을 합자 형식으로 인수하는가 하면, 율산엔지니어링, 호텔내장산, 율산제화, 율산공업전문학교 등 여러 기업이나 기관을 각각 세워 계열사 수를 11개로 늘렸으며, 1978년에 율산실업이 정부로부터 종합상사로 지정됐다. 심지어 이천 부지를 통일그룹에 팔고 서울 잠실 석촌호수 부지까지 사들여 부동산 장사로 돈을 벌었다.

​그러나 1978년 박정희 정부가 전격적으로 '8.8 투기억제 조치'를 단행하면서 율산의 주력사업이었던 건축자재수출을 금지하면서 심각한 자금압박을 받게 된다. 자금난 해결을 위해 서울신탁은행에서 무신용장 방식 'DA제도'를 이용해 돈을 빌려다가 부실기업 대한전자 및 광성피혁을 불하받으면서 빚은 점차 늘어갔다.[6] 그해 추석에는 남성 기성복 '밤빔' 판매직원들이 중앙청(현 정부서울청사)에서 선물티켓을 마구 뿌리다 청와대 사정반에 적발되는가 하면, 사우디아라비아 주택성 아파트 공사 입찰마저 경쟁 업체들의 방해로 무산되고 자금난으로 종합상사 자격을 잃었다.

​게다가 1979년 2월 신선호 대표가 청와대 직원들을 사칭한 괴한들에게 납치됐다가 풀려난게 언론에 알려져[7] 이래저래 청와대의 눈 밖에 났고, 이후 각 계열사들이 은행관리에 들어가자 그룹 차원에서 진의종 전 의원을 새 회장으로 추대했으나, 신선호가 비리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면서[8] 그룹은 해체 수순을 밟았으며 계열사들은 대부분 다른 회사에 넘어갔고 일부는 소멸되었다.

​해체 후 신선호는 그나마 서울종합터미널을 지켜 1994년 '센트럴시티' 착공에 들어가 2000년에 완공해 재기에 성공하는 듯 싶었으나, 다 짓고 보니 채무가 많아져 본인은 대주주로만 남고, 경영권은 2002년 애경그룹에 넘기면서 사실상 명을 다했다.

3. 역대 회장

4. 계열사 목록

  • 율산실업: 그룹의 모태로, 1996년 서울종합터미널에 합병됨.
  • 율산건설: 구 동원건설. 이하 동일함. 이명박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는 유독 박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만큼 당시 율산건설과의 경쟁이 만만치 않았다는 방증이며, 이명박이 이런 경쟁자들에게 매우 냉혹했다는 걸 추정하게 되는 대목이기도.[9]
  • 율산알미늄: 원래는 신진그룹 계열사였다. 은행들의 농간으로 흑자 도산을 하게 될 상황이었는데, 은행장 중 하나가 당시 200억원을 예치시켜준 신선호에게 신진 알미늄 인수를 제의, 거래가 성사되었다고 한다. 율산 측에서는 그때(70년대 중반) 돈으로 현금 5억원을 인수대금으로 건네, 오히려 신진측에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또한 노동자들을 불러모은 자리에서 "(어려움 겪는 동안) 밀린 임금은 모두 지불해주겠다. 그리고 월급 역시 기존의 두배로 인상하겠다. 다만 한가지 부탁드릴 게 있는데, 불량률을 줄여달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후 시장에서 강자로 군림했지만, 1979년 모기업 몰락의 여파로 효성그룹으로 넘어갔다가 1982년경 대전피혁의 분가로 같이 넘어간 뒤 1988년 효성금속으로 합병됨. 이 율산알미늄이 우량 기업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해체된 율산 산하 계열사들 가격이 뛰었다는 후문이다.[10]
  • 율산해운: 1979년 범양전용선(현 팬오션)에 인수합병됨.
  • 율산엔지니어링: 1979년 해산됨.
  • 한국PRC: 미국 PRC 사와의 합작사로, 과천 서울대공원 설계를 맡았다.
  • 율산중공: 1979년 효성그룹에 넘어간 후 '효성금속'이 되어 1980년대 이후 대전피혁이 분가할 시 합류했으나, 1997년 모기업 효성기계가 부도나 법정관리를 거쳐 2006년 C&그룹에 매각돼 'C&효성금속'이 됐다가 이듬해 C&진도에 합병됨.
  • 율산전자: 구 대한전자. 1979년 대화전자로 넘어갔으나 모기업의 부도로 같이 사라졌다.
  • (합)동아공업: 1979년 박규삼에게 매각됐다가 1989년 갑을그룹으로 넘어가 주식회사로 변환됐으나, 2003년 그룹 해체 후 이듬해 생산라인을 (주)코람으로 매각함.
  • 경흥물산: 남성 기성복 '밤빔'으로 알려졌으며, 1979년 해산됨.
  • 율산제화: 1979년 라이프그룹에 매각된 후 '라이프제화'가 됐다가, 1987년 라이프유통으로 합병됨.
  • 광성피혁(현 유니켐): 1979년 신진수출산업에 매각됨.
  • 서울종합터미널(현 신세계센트럴시티): 2002년 이후 애경그룹을 거쳐 통일그룹으로 넘어갔으나, 2012년 신세계그룹에 매각됨. 율산 해체 후 고급 기술을 가진 이들은 일찌감치 다른 대기업으로 이직하였지만, 문과들은 이 신선호와 함께 터미널에[11] 남아 고생을 같이 했다고 한다. 이 터미널 부지는 서울시와의 계약 관련 문제가 남은데다, 남은 율산 경영진들이 "부채상환 수단"이라 채권단을 설득해 계속 운영할 수 있었다는 후문. 여전히 신선호 일가가 지분 일부분을 쥐고 있는 상태다.
  • 내장산관광호텔: 1979년에 한국합판(세풍그룹)으로 넘어갔으나, 1999년 모기업의 부도로 2001년에 호텔이 경매로 넘어가 법인이 청산됨.

5. 여담

  • 당시 입사한 신입사원들의 입문교육 과목으로는 다른 기업들과 달리 예술과 문학 등 각종 교양 교육 위주로 진행되었는데, 율산그룹의 구성원으로서 어딜 가도 당당할 수 있는 인문학적 교양과 품격을 갖추게 할 목적이었다.
  • 이 대기업은 특이하게도 정주영 회장의 바지선 자재 운송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대담하고 기발한 방식을 이용했다. 대표적으로 바이어들의 오퍼를 수주받은 물건을 수출할 때 국내에서 노는 선박을 자신들이 직접 임대해서 화주가 선주를 겸하거나,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법 체계의 허술함을 이용하여 화물선 선장실에 진압이 가능한 규모의 화재를 고의로 일으켜 순서보다 훨씬 빨리 부두에 접안하여 물건을 내린다거나, 전차상륙함에 물건을 실은 트럭을 임시도로가 깔린 해안에 상륙시켜 운송하거나 헬기까지 동원하여 상품을 하역하는 등 현재 시점으로 봐도 상상을 뛰어넘는 각종 방법을 동원했다.
  • 해당 그룹의 흥망사는 1988년 KBS2 미니시리즈 <훠어이 훠어이>로 드라마화됐으며, 탤런트 나한일 등이 출연했고 이환경 작가가 각본을 맡았다. 이 당시에는 이환경이 박정희 정권에 부정적인 성향을 보였다는것을 알수있는 대목이었다.

6. 출처

  • 한국기업흥망사 - 공병호 저. 명진출판. 1993. p110~119.

[1] 해당 로고는 설립 초기부터 해체 전까지 사용되었다.[2] 아내의 족보에는 평산 신씨라고 오기되어 있으나 고령 신씨 족보에 등재되어 있으므로 고령 신씨가 맞다. 다음은 출처 사진들이다. 파일:신선호 처가 족보.png파일:신선호 족보.jpg[3] 나한일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 <훠어이 훠어이>에는 6사람만 나오지만, 창립발기인 포함 10여명이 함께 시작한 것이라 한다. 중간에 타향살이 자금, 가족 부양 등의 사유로 낙향하게 된 사람들이 있었고, 버틸 수 있는 사람들만 남아 회사를 꾸려나가던 중, 아랍에서 Offer를 받아 성장을 시작한 것이라고.[4] 다음은 이하 출처 사진이다. 파일:신선호 처가 족보.png 그러나 사위의 족보에는 이름의 한자가 '夫完爀'이라고 오기되어 있다.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파일:신선호 족보.jpg[5] 신선호는 부완혁의 장녀 부정애(夫貞愛, 1947~)와 결혼했다.[6] 당시 서울신탁은행에서 대출을 해주면서 골칫덩이였던 대한전자와 광성피혁을 강제로 떠넘긴 측면이 크다.[7] 당시 율산그룹과 경찰은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은행 직원을 사칭한 괴한들'한테 납치됐던 걸로 사전에 말을 맞추었다. 그런데 긴장한 신선호 대표가 기자회견장에서 "재벌 총수가 일개 은행 직원의 전화에 움직였다는게 이해가 안간다"는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지자, 순간 당황해서 '청와대 비서실이라고 해서 나갔다'고 이실직고 해버리는 사고를 친다. 이 때문에 신선호는 경찰한테도 까이고, 청와대에서도 까이는 신세가 된다.[8] 당시 신선호 대표는 외국환관리법(1999년 폐지) 위반과 횡령죄로 구속되었는데, 이에 대해 당시 신선호 대표가 광주서중 출신이고 상기한 장인 겸 회장 부완혁 씨가 장준하국회의원 당선 이후 사상계의 2대 발행인을 맡은 야당 성향의 인물이어서, 한마디로 김대중과의 커넥션이 의심되어 당시 정권이 조진 거 아니냐는(...) 음모론이 돌기도 했다. 이와 연관해 비호남계 정재계 인사들이 많은 당시, 호남 기반의 대기업이 나오는 걸 못마땅하게 여긴 일부 인사들이 나섰을 거라는 식의 음모론도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9] 위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율산이 유력했던 사우디 공공주택 공사 수주가 무산된게 국내 재벌건설사들의 로비 때문이었다는 썰이 돌았다.[10] 풍산에서 인수했다고 아는 이들도 있으나, 효성그룹에서 인수했다고 한다.[11] 센트럴시티 개발 전에는 가건물과 플라스틱 좌석 수십석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