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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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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李箕永 | Ri Ki-yong
파일:attachment/Minchon.jpg
<colbgcolor=#0047a0><colcolor=#fff> 출생 1895년 5월 29일[1]
충청도 온양군 동상면 회룡리[2]
(현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회룡리)
사망 1984년 8월 9일 (향년 89세)
평양시
민촌(民村)
본관 덕수 이씨[3]
필명 기영생(箕永生)·민촌생(民村生)
성거(聖居)·성거산인(聖居山人)
양심곡인(陽心谷人)·양심학인(陽心學人)
직업 소설가
학력 사립 영진학교[4] (졸업)
도쿄 세이소쿠영어학교 (수료)
소속 조선문학예술총동맹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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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기영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소설가이자 월북 인사이다. 는 민촌(民村), 본관덕수(德水)이다.

2. 생애

1895년 5월 29일 충청도 온양군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11대손인 아버지 이민창(李敏彰, 1873 ~ 1919)과 어머니 밀양 박씨(密陽 朴氏, ? ~ ?) 부부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8년에 천안군 천안읍 안서리를 거쳐 북일면 중암리로 이사하였고 서당에 다니며 《진서(晉書)》를 공부했다.

1910년에 사립 영진학교(현 천안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22년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영어학교(현 세이소쿠가쿠엔고등학교)에서 유학하였고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귀국하였다. 1924년에 《오빠의 비밀편지》가 《개벽》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담한 이후, 줄곧 경향문학의 대표적 작가로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1931년과 1934년의 카프검거사건 당시 구속되는 등 조직과 창작 양면에 걸쳐 맹활약하였다. 그의 작품세계는 자신의 가난 체험을 당대 현실의 총체성과 관련시키는 방향으로 열려져 있으며, 특히 집단성의 묘사에서 전형적이고도 탁월한 성과를 산출해 냄으로써 당대 프로문단의 최고수준으로 평가받았다.

성장기의 대부분을 보낸 충남 천안시 유량동의 이량골의 한 촌로에 의하면 시골 장날 사람들에게 전단을 나누어주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고문을 받아 시력을 잃게 되었고 근처 성불사라는 절에 들어가 40일동안 요양하여 시력을 겨우 회복하였다고 한다.[5]

《농부 정도룡》, 《민촌(民村)》, 《홍수》, 《서화(鼠火)》 등에서는 농촌현실의 발견과 새로운 인물유형의 창조를 통해, 농민문학의 새로운 형식을 창출해 냄으로써 농촌현실의 총체성을 구현하는 사실주의소설의 가능성을 확보하였다. 이러한 작가적 역량이 내적인 성숙과정을 거쳐 종합적이고도 완결하게 표출된 것이 바로 '경향소설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 대작 《고향(故鄕)》이다. 이 작품은 식민지시대 농민의 형상을 전형적으로 창조해 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농촌현실의 구체적 형상화를 통한 삶의 총체성을 확보하고 있다.

광복 이후 1945년 9월 17일에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9월 30일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을 발족하였다. 1946년 2월월북하여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을 이끌면서 북한문예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에는 조선일보에 1933년 연재한 《서화》, 1933년~1934년 연재한 《고향》, 소설집에 《민촌》(1927), 《신개지(新開地)》(1938), 《생활의 윤리》(1942), 《봄》(1942), 《동천홍(東天紅)》(1943), 《광산촌(鑛山村)》(1944), 《처녀지(處女地)》(1944), 《어머니》(1948), 북한 문학 최초의 장편소설 《땅》, 1954년부터 1961년까지 발표된 대하소설 《두만강》 등 다수가 있다. 이 가운데 《두만강》은 노벨문학상 후보로 오른 바 있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다.

한편 이기영은 김정일악연인연이 있는데, 김정일의 동거녀이자 김정남의 친모 성혜림이 바로 이기영이 북에서 둔 3남 1녀 중 장남인 리평(李平)의 전처였다. 비록 리평과 성혜림이 중매로 맺어진 탓에 사이가 소원했다한들, 졸지에 뜬 눈으로 맏며느리를 잃은 셈이다. 이기영은 북한 정권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고 작가동맹위원장까지 지냈지만 며느리를 돈독한 사이였던 김일성의 아들에게 빼앗긴 충격 때문에 이후 작품 활동을 일체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58년 9월 7일, 강량욱, 강영창, 김두삼, 김회일, 리송운, 리일경, 리천호, 리희준, 백남운, 정두환, 진반수, 최철환, 한설야와 함께 공훈이 있는 국가기관, 정당, 사회단체 지도일군으로 선정되어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1959년 5월, 김창준 장의위원,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 1963년 5월, 강진건 장의위원, 1968년 3월, 홍명희 장의위원, 1971년 10월, 박문규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후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장,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위원을 지내다가 1984년 8월 9일 6시에 9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북한은 정무원,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명의로 부고를 발표하였다.

사후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3. 기타

  • 2018년 11월 15일에 방남해 이재명 경기지사를 만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의 리종혁 부위원장이 그의 셋째 아들이라고 한다. 관련 기사. 방남했을 때 이재명 지사가 직접 남한에서 출판된 아버지의 책을 건넸다고 한다. 리종혁 부위원장이 기뻐하면서 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고 한다. 관련 기사.
  • 조선인민군 장교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평남 안주군 민주선전실장으로 일하고 나중에 남파공작원이 된 김진계가 그를 1956년에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전국 모범민주선전실장 강습회에서 만난 바 있다. 이기영은 팔도 사투리에 능해서 강연을 시작했다가 갑자기 평양말을 쓰더니 경상도 사투리, 전라도 사투리, 충청도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섞어서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승만 성대모사에도 능해서 "나 리승만은 암네다. 삼신이가 무언지.... 정치에는 등신이.... 사람 암살하는데는 귀신이.... 외교에는 망신이.... 삼신이는 나 리승만 아닙네까?"라고 그를 조롱하였다고 한다.


[1] 덕수이씨세보 신(信)편 상권 471쪽에는 1896년 5월 6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2] 이기영의 출생 시기는 1895년 6월 23일 실시된 이십삼부제 이전이다. 또한 스스로는 아산군(牙山郡) 도방면(桃芳面) 용곡리(龍谷里)로 출생지를 밝힌 바 있으나 교차검증되는 여러 자료에서는 회룡리를 출생지로 보고 있다.[3] 충무공파 24세 '영(永)'자 항렬이며, 북한에서 그가 두었던 3남 1녀 중 한 명인 리종혁(李種革) 역시 25세 '종(種)'자 항렬을 따르고 있다.[4] 천안초등학교의 전신. 관련 자료.[5] 두만강, 풀빛, 1989, 유족의 말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