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8 22:05:02

이수철

이수철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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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前 축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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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이수철
李壽澈 | Lee Soo Chul
출생 1966년 3월 15일
사망 2011년 10월 18일 (향년 45세)
경기도 성남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종교 가톨릭 (세례명: 요셉)[1]
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현대 호랑이 (1988~1995)
코치 상무 축구단-광주 상무 불사조 (1996~2010)
감독 부산 상무 (2007)
상주 상무 피닉스 (2011)

1. 개요2. 클럽 경력3. 지도자 경력4. 승부 조작 누명과 금품 수수 혐의5. 조사, 그리고 자살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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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감독.

2. 클럽 경력

대구 청구고 3학년 시절 화려한 실력으로 팀을 무패로 이끌며 모든 대회에서 우승했다.
하지만 동기들을 위해 명문대가 아닌 영남대로 진학을 했으나 [2] 1,2학년때는 감독과의 마찰로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3학년때 부터 마음을 고쳐먹고 훈련에 임해 4학년때 약체 였던 영남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며 89년 드래프트에서 현대 호랑이에 1차지명[3] 되었다. 하지만 프로 입단 후 감독과 마찰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으며 7년간 프로 통산 91경기 9골을 기록하고 주변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95년 조기 은퇴한다.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고재욱 감독의 권유로 상무 실업 축구단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상무 코치진은 군무원 신분이라 처우가 최악이였지만 이수철은 저연차 선수들의 코치하며 재능 및 흥미를 발견하고 계속해서 상무에 남게된다.

2002년 프로화를 선언한 상무가 광주로 이전하면서 수석코치 역할을 수행했다. 2007년에는 국군체육부대의 여자 축구팀인 부산 상무의 창단 감독으로 1년간 지휘봉을 잡기도 했다.[4]

이후 2010년 11월 1일 이강조 감독의 후임으로 상주 상무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16년간 상무에서 고생했던 결실을 맺게된다.
선임 후 파격적인 패션[5]과 화끈한 언변 및 팬서비스와 소통으로 상무에 신선한 바람을 넣었으며, 기존의 잠그기 후 가끔 역습만 하는 상무특유의 수비축구가 아닌 김정우를 공격수로 전환시키는 등 공격축구를 보여주며 시즌 초 상무를 1위에 올려놨다. 후에도 순위가 내려가긴 했지만 7월까지 상위권 순위를 유지하며호평을 받고 있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성공적인 지도자 생활을 오랫동안 이어갈 줄 알았다. [6]

4. 승부 조작 누명과 금품 수수 혐의

상무 감독인 이수철 감독이 승부조작에 가담한 선수의 부모를 협박해 금품을 갈취했다는 죄목으로 군 검찰에 소환되었다는 소식이 나와 축구계에 많은 충격을 주었다. 곧바로 상주 상무는 사실 무근을 주장했고 이수철 감독과 상주 상무의 주장에 따르면 김동현의 아버지가 2차례 구단을 방문하여 이수철 감독에게 면담을 요청해 만나 음료수 한박스를 주며 10분정도 얘기를 나눴고 헤어진 뒤 확인해 보니 봉투에 돈이 있어 이수철 감독은 돌려드리려고 수차례 전화를 했지만 김동현 아버지가 회식비 명목으로 받아 달라고 해 그것을 선수단 회식 때 사용하였다는 것이라고 했다.[7] 이후 군 검찰의 조사 결과,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기간 중 김동현의 아버지가 사실은 공갈협박은 없었다고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결국 금품수수 및 뇌물 혐의로 군 검찰에 구속되어[8]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김태완 코치가 감독 대행으로 남은 시즌을 맡았다.

5. 조사, 그리고 자살

1심에서 공갈 및 협박은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금품 수수는 유죄가 선고되어 징역 2년 및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결국 10월 18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자택에서 자살한 채 발견되었다.

검찰의 항소로 인해 확정판결이 되지 않은 채로 사망했기에, 법적으로는 공소기각[9]으로 마무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이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항소심 준비 중이라 확정판결이 아니다.즉 법적으로는 범죄자가 아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명문고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주목 받던 이수철 감독의 아들은 대학 입학이 돌연 취소되고 승부조작에 가담한 감독이라는 오해를 샀으며, 법정 다툼 비용으로 재정적 문제까지 심해졌으니 이수철 감독이 받았을 심리적 고통이 얼마나 컸을 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상무 감독직을 위해 타팀의 좋은 조건을 마다하고 상무에 적은 연봉으로 코치직을 해오다 이제서야 감독이라는 결실을 맺었는데 보통 수십년을 하는 상무 감독직을 몇달만에 짤렸으니 상실감도 컸었다. 이 일이 이수철 감독이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을 것으로 본다.

슬픔 속에 발인이 엄수되었으며, 장지는 안성천주교 공원묘지가 되었다.

이수철 감독도 마냥 잘못을 피해갈 수는 없는 게, 비록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고 선수단 회식비로 쓰는 등 좋은 의도에서 받은 것이었다 해도 [10] 군무원 신분으로서 그런 돈을 함부로 받은 것은 당연히 잘못된 행위이며 범죄이다. 괜히 공무원에게 남이 돈봉투를 건넬 때 절대 봉투에 손도 대지 말라고 교육하는 게 아니다.

6. 여담

  • 청구고등학교 선배인 변병주를 2011년에 상주 상무의 전력 분석관에 앉혀서 대차게 까인 흑역사가 있다. 관련 기사 참고.
  • 아들 이광민 군은 1993년생으로 전남 드래곤즈 유스인 광양제철고 축구부 주전 멤버 였으나[11] 사건 여파로 예정된 서울의 유명 대학 입학이 취소되고 현재는 근황이 들리지 않는다. [12] 하지만 이걸 보면 선문대에는 진학한 것으로 보인다.#


[1] 생전에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사후 안성 천주교 공원 묘지에 안장됐다.[2] 훗날 인터뷰에서 당시 명문대 진학을 하지 않은걸 후회하지 않냐는 질문에 "영남대를 가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기 때문에 영남대를 간건 좋은 선택이였다." 라고 말했다.[3] 영남대 최초의 1차지명이다.[4] 광주 상무 코치를 2010년까지 했다. 사실 군 내에서 장교급이나 중,상사급 이상의 인물이 내부겸직하는건 하루이틀일이 아닌데 상무라고 크게 다른건 없다.[5] 아내가 미술을 전공해 패션에 일과견이 있었다고 말했다.[6] 이강조 전임감독을 봐도 당시 상무감독은 군무원 신분으로 성적에 크게 상관없이 오랫동안 감독을 했다.[7] 생전 이수철 감독의 말에 따르면 1,000만원의 대가성에 대해 알지 못했고, 그것을 받아 선수단의 회식비 등에 사용했다고 한다. 선수를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지만, 이로 인해 김동현의 죄를 피하기 위한 비열한 술책에 당한 것이다. 멀쩡한 감독을 누명을 씌우고 자살에까지 이르게 한 것까지 보면 그냥 인간 폐기물들이다.[8] 상무의 감독직은 대한민국 군무원 신분이다.[9] 재판이 기각되어서 피고인의 유무죄를 따질 수 없음.[10] 당시 상무는 고액을 받다가 입단하게 된 선수들이 사기 진작을 위해 회식비 명목으로 감독이나 코치들에게 돈을 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11] 당시 광양제철고는 엄청난 멤버를 자랑했다.#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이 프로에서 한 자리씩 얻었고 국가대표도 몇 번 왔다갔다했다. 당시 이광민도 아버지와 무관하게 유망주로 언급됐었다. 즉 이광민도 프로에서 밀릴 실력은 아니었을 거라는 이야기.[12] 이수철 감독은 축구인이 면회를 오면 자신 때문에 아들의 진학이 취소된걸 하소연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