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켄데룬 만에서 바라본 시가지 전경 | 하타이 병합을 기념하는 아타튀르크 동상 |
튀르키예 주요 항만 중 하나인 이스켄데룬 항의 모습
시내의 19세기 법원 건물
1. 개요
튀르키예어 İskenderun그리스어 Αλεξανδρέττα
아랍어 إسكندرونة
터키 남부의 도시. 안타키아에서 북쪽으로 35km, 오스마니예에서 남쪽으로 40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25만명으로, 주도 안타키아를 근소한 차이로 앞서는 하타이 도의 최대도시이다. 옛 지명은 '작은 알렉산드리아'란 의미인 알렉산드레타로, 기원전 333년 이소스 전투에서 승리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전장 남쪽 25km 지점의 자신이 주둔했던 언덕에 도시를 세우고 '이소스의 알렉산드리아'라 명명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킬리키아 평원과 시리아 북부를 이어주는 전략적 요충지로써 고대부터 중시되었다. 다만 항구로써는 안티오크의 외항인 남쪽의 셀레우키아 피에리아에 밀려 중간 규모에 불과했다가, 오스만 제국기 알레포의 외항이자 유럽과 이라크-인도를 잇는 중간 기착지가 되어 경제적으로 번영하였다.
20세기에는 (프랑스 위임통치 하의) 이스켄데룬 산작, 하타이 국을 거쳐 1939년 터키에 병합되었다. 본래 도시에는 튀르크 / 아랍 순니 무슬림, 아랍계 알라위파, 아르메니아 / 아랍계 기독교도가 공존했으나 19-20세기 아르메니아 인들은 대부분 학살되거나 추방되었고 나머지 비튀르크계 역시 1939년 터키 병합 당시 다수가 망명하였다. 현재 시내의 기독교도들은 대부분 그리스 정교회 혹은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을 믿는 아랍계이다. 시가지는 지중해와 누르 산맥 사이의 평지에 조성되어 있으며, 각종 항만 시설 및 공장 등으로 북쪽의 파야스와 이어져 있다. 시내에는 근대 시기 건물들이 다수 남아있고, 시가지 남쪽의 공터와 언덕에는 고대의 항구와 도시 유적이 있다. 남쪽 13km 지점의 바흐체 고개에는 십자군 시절의 바그라스 성채가 있다.
2. 역사
1900년경 시내 풍경
본래 이스켄데룬 만 동안 지역의 중심지는 현 도심에서 서남쪽으로 5km 떨어진 해안에 있던 미리안도스 (Μυρίανδος)였다. 기원전 333년 이소스 전투 직전 알렉산드로스 3세는 미리안도스에 주둔했으나 폭풍으로 더 북쪽의 언덕 (에센테페)으로 이동하였고, 승전 후 전장에서 남쪽으로 30여 km 떨어진 에센테페에 도시를 세우고 알렉산드리아라 명명한 것이 이스켄데룬의 시초이다. 다른 알렉산드리아들과 구별하기 위해 이소스의 알렉산드리아 혹은 알렉산드리아 스카비아사 혹은 알렉산드리아 미노르 (작은 알렉산드리아)라 불린 도시는 미리안도스를 대체하여 일대의 중심 도시로 성장하였고, 항구임과 동시에 킬리키아와 시리아 북부를 잇는 가장 안전한 통로인 아마누스 관문과 시리아 관문으로 향하는 교통의 요지로써 중시되었다.
한편 건설 당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운 청동 전승 기념물은 로마 제국기인 3세기까지 남아있었다고 한다. 기독교화 후에는 킬리키아 세쿤다의 아나자르부스 대주교구 휘하 알렉산드리아 미노르 주교구가 설치되었다. 현지 주교들은 활발히 활동하여 기록된 첫 주교 헤시키오스는 니케아 공의회와 345년의 안티오크 총회에, 필로모소스는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바라네스는 445년의 안티오크 총회, 바실리오스는 성직 매매를 규탄한 459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회에 참석하였다. 다만 518년 알렉산드리아 미노르의 주교 파울로스는 야곱파인 안티오크의 세베루스 지지한 혐의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에 의해 파면되었고, 7세기 이슬람 정복 후 주교구는 자취를 감추었다. 지명 역시 아랍식인 알 이스칸다룬 (الإسكندرون)으로 바뀌었다.
7-8세기 무인 지대로 버려졌던 이스칸다룬에는 압바스 왕조 시기 성채가 세워졌으나 타르수스에 비해 중시되지 않았고, 셀주크 제국을 거쳐 1097년 1차 십자군과 함께 안티오크 공국령이 되었다. 라틴식인 알렉산드레타로 불린 도시는 12세기 중엽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령이 되었으나 1153년 안티오크 섭정 르노 드 샤티용이 재점령하고 템플 기사단에 넘겼다. 다만 1272년 이후 맘루크 왕조가 정복하였고, 15-16세기 둘카디르 왕조를 거쳐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다. 지명은 이스칸다룬의 튀르크식 발음인 이스켄데룬으로 정착하였다. 그러던 1606년 인근 벨렌에서 젤랄리 반란을 진압한 오스만 장수 쿠유주 무라트 파샤는 재차 성채를 세웠고, 점차 동지중해 교역이 활성화되며 알레포의 외항으로써 도시는 부활하였다.
얼마후 베네치아 공화국에 이어 영국 레반트 회사가 이스켄데룬에 상관을 세웠고, 풍토병과 열악한 위생에 의한 높은 사망률에도 이집트의 쿠세이르를 통한 대체 교역로가 활성화되기 전까지 유럽과 인도를 이어주는 창구로써 1825년까지 유지되었다. 1675년 영국의 항해가 헨리 텡게가 방문하여 기록을 남겼다. 1832년 메흐메트 알리 파샤의 이집트 군이 점령했으나 1839년 반환되어 아다나 산작에 편성되었고, 근대화와 함께 알레포와의 신작로가 놓였다. 1872년에 지진을 겪었으나 곧 복구되었고, 1881년부터 추진한 끝에 1912년 알레포와의 철도가 개설되었다. 19세기 말에는 유전도 발견되었으나 극소량에 불과하여 채굴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한편 주민의 대다수를 이루던 아르메니아 인들은 아르메니아 대학살로 수적 우세를 잃게 되었다.
한편 철도와 함께 더욱 성장한 도시는 1차 대전 당시 영국군의 시리아-이라크 진격에 있어 하이파와 함께 상륙지로 논의되었으나 프랑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이에 독일 제국의 힌덴부르크는 (방어가 취약했던) 이스켄데룬에 상륙이 실제 이루어졌다면 오스만 측에 치명타였을 것이라 평가하였다. 1차 대전 후 하타이 지방은 시리아 위임통치령에 포함되었고, 1921년 이스켄데룬 (알렉산드레타) 산작이 설치되었다. 다만 산작 베이 (총독)는 알레포 국에서 임명하였고, 터키어 교육이 금지되고 아랍어 교육으로 대체되는 등 튀르크계 주민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 1936년 위임통치를 종료하며 프랑스 당국은 터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시리아 측의 반발에도 하타이국 수립을 지지하였고, 결국 짧은 독립기를 거쳐 (시리아가 여전히 인정 안하는) 주민 투표를 통해 터키 공화국에 병합되었다. 1938년 7월 터키군이 이스켄데룬에 진주하였고, 알라위파 아랍인들과 아르메니아 인들 상당수가 추방되었다.
2023년 지진이 이곳을 강타해 이스켄데룬 항구의 부두가 무너져 불타는 등 도시의 많은 구역이 파괴되었다.
3. 갤러리
- [이스케데룬 기타 사진들]
3.1. 시내 풍경
고급 아파트 단지
니할 아타카스 자미
메흐메트 파샤 자미 |
울루 자미
그리스 정교회 성당
1871년에 세워진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의 성모 수태 성당
해안 시내 풍경. 바다 건너편 육지는 메르신 일대이다
북쪽 6km 지점의 사리스케시 성채 유적
동쪽 12km 지점의 관광지인 알란 야을라스 (Alan yaylası)
3.2. 에센테페 (옛 알렉산드리아)
옛 항구 유적
옛 알렉산드리아 도시가 있던 에센테페 일대의 언덕들
3.3. 바그라스 성채
바그라스 성채. 동로마 제국기인 965년 처음 세워진 후 1153년 템플기사단이 현재의 모습으로 증축하였다. 1268년 맘루크 왕조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