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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르네 에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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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ddd,#000><colcolor=#000000,#dddddd> 자크 르네 에베르
Jacques René Hébert
파일:Jacques_René_Hébert.jpg
출생 1757년 11월 15일
프랑스 왕국 알렁쏭
사망 1794년 3월 24일 (향년 36세)
프랑스 제1공화국 파리
국적
[[프랑스 왕국|]][[틀:국기|]][[틀:국기|]] → [[프랑스 제1공화국|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제1공화국]]
가족 배우자 마리 마르게리테 프랑수아 에베르 (1792년 결혼)
시피옹 베르지니아 에베르 (1793년 출생, 1830년 사망)
직업 정치인, 작가, 출판인, 기자
종교 무종교 ,(무신론),
최종 당적

서명
파일:Jacques-René_Hébert_(signature).jpg
1. 개요2.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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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혁명 당시 급진적 공화주의를 표방한 자코뱅파에서도 가장 강경파였던 인물. 자코뱅 집권 당시 상퀼로트의 대중적 지지를 받으며 자코뱅 내의 온건파와 대립했으나 결국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숙청당했다. 독창적이고 극단적인 사상과 추종자들로 인해 에베르파라는 명칭이 따로 생겨났을 정도다.

2. 일생

자크 르네 에베르는 1757년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꽤나 곤궁하고 불우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청년 시절에는 보헤미안적인 삶에 푹 빠지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에 열광하여 성직자와 귀족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하며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790년 11월에는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부어 <늙은이 뒤셴>[1]이라는 신문을 발행했는데, 대중적인 언어로 기득권을 향한 신랄하고도 날카로운 풍자로 인기를 끌었다. 이후 클뢰브 데 자코뱅에 발을 들여 '클뢰브 데 코르들리에'라는 공화파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열성적인 활동을 펼쳤다.

자코뱅 내에서도 매우 급진적인 성향을 띠었다. 로베스피에르에 대해서도 변호사 집안에서 태어나 은근히 귀족같이 구는 점을 싫어해서 지나치게 온건하다고 비판했을 정도로 급진 좌파였다. 온건파인 당통과도 당연히 사이가 나빠, 당통 파벌에 속한 카미유 데물랭의 주 업무가 에베르와 추종자들의 언론인 <늙은이 뒤셴>에 대한 반박이었을 정도.
에베르는 공포정치를 지지하고 선도했다.[2] 그는 왕족, 귀족, 성직자 등을 포함한 기득권층과 반혁명 세력을 증오했으며, 반기독교적인 말과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지롱드당, 푀양파, 자코뱅 내의 온건파들과 늘 충돌했다. 하지만 기득권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찼던 파리 민중, 특히 상퀼로트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아 파리 코뮌에서 주도권을 휘두를 수 있었다. 자코뱅 내에서는 에베르를 지지하는 '에베르파'가 형성되었다. 에베르파의 주요 구성원과 지지층은 상퀼로트였다. 반혁명 세력을 격렬하게 성토하는 에베르의 프로파간다는 혁명의 열성분자인 상퀼로트에게는 사이다나 마찬가지였기 때문.

혁명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한 그는 1792년 8월 10일 봉기, 9월 대학살, 1793년 5월 31일 봉기(지롱드당에 대한 공격) 등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관여하며 자코뱅의 집권을 도왔다. 자코뱅 집권 후에는 온갖 과격한 정책들을 주장하며 조르주 당통, 로베스피에르와 대립하였다.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그녀의 아들 루이 17세와의 근친상간 누명을 씌워 사형을 주도한 것도 에베르였다. 그러나 이 죄목은 너무 어설프게 급조되어 그 누구도 마리 앙투아네트가 근친상간을 저질렀다는 의심을 할 수가 없었다. 이를 추궁받게 된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전까지 묵묵히 침묵을 지키던 것을 깨고 재판장에 있던 모든 여성들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뻣뻣히 세우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증오를 표출하던 여성들조차도 이 막무가내만도 못한 고발에는 부정적이었기에 그녀에게 동조하며 고발한 혁명 정부 측을 비난했다. 결국 에베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물러났고, 이를 전해들은 로베스피에르"에베르 그 자식이 혁명을 완전히 망쳐놓았다!"[3]라고 소리치며 접시를 깨트리고는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의 이런 과격한 행보는 다른 자코뱅 내 파벌들의 우려를 가져왔다. 조르주 당통은 에베르가 너무나 과격하다고 비판했고, 로베스피에르는 이신론자였기에 에베르의 무신론을 비판했다. 당통과 로베스피에르는 에베르를 '초혁명적인 인물'로 규정하고 그와 가까이 하기를 꺼렸다. 에베르도 당통과 로베스피에르를 향해 '온건주의자'라며 그들의 혁명성이 부족하다고 깠다.

에베르는 1794년 파리 민중의 배고픔을 이용해 또다시 봉기를 일으킬 계획을 짰다. 하지만 이는 다른 파벌들에게 알려졌고, 에베르는 그를 따르는 상퀼로트들과 함께 체포된다. 결국 자신이 죽였던 왕과 왕비와 마찬가지로, 1794년 3월 24일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그 시체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묻힌 곳에 버려졌지만 나중에 빈민들이 몰래 묻어주었다고 한다.

다만 에베르의 처형으로 인해 그를 지지하던 상퀼로트들은 더 이상 로베스피에르를 지지하지 않았다. 이는 테르미도르 반동에서 로베스피에르파가 몰락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된다.
[1] Le Père Duchesne[2] 그는 로베스피에르를 피바람을 몰아올 미치광이라고 비난했으나 정작 본인이 훨씬 더 심한 공포정치를 이끌었다.[3] 정확히는 "에베르라는 바보가 그녀에게 또 한 번 승리를 안겨주고 말았다!"라며 소리쳤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