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9 08:50:59

장 프티(신학자)

성명 장 프티
Jean Petit
생몰년도 1360년 ~ 1411년 7월 15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페이 드 코 지역 브라키
사망지 프랑스 왕국 파드칼레 에스당
직위 루앙 교구 신부, 파리 대학 총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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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신학자.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의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 암살을 정당화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2. 생애

1360년경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의 페이 드 코 지역 브라키에서 출생했다. 그는 파리 대학에서 공부했고, 1385년 예술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1389년 이전에 루앙 교구의 신부가 되었다. 1392년부터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를 섬겼다. 1395년 아비뇽으로 파견된 사절단에 파리 대학 대표로 참여했다. 그러나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전체 공의회만이 교회의 일치성을 회복하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는 내용의 공의회수위주의(Conciliarism)를 설파하는 파리 대학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파리 대학 대표들을 멸시했고, 그는 이에 반감을 품었다.

1400년 5월 신학 자격증을 받았고 1402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1406년 6월 7일 파리 대학 종장이 된 그는 삼부회에서 베네딕토 13세에 대한 성직자들의 복종 의무를 없앨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1403년 11월 성직자 회의에서도 베네딕토 13세와 추종자들을 "노새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똥이나 다름없다" 등 강경한 어조로 비난했다. 1404년 7월 로마로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이 되었고, 7월 20일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로마 시민 대표들을 모아놓고 베네딕토 13세를 성토하는 연설을 했다.

1407년 11월 23일,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이 파리의 마레 지구에서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이 사주한 라울 당크통빌 휘하 15명의 복면 쓴 암살자들에게 살해되었다. 이틀 후 삼부회 임시 회의에서, 용맹공 장은 베리 공작 장 드 베리, 앙주 공작 루이 2세에게 자신이 "악마의 꾐에 빠져서" 사촌의 암살을 지시했음을 자백한 뒤 플란데런으로 도주했다. 1407년 12월 13일, 오를레앙 공작의 미망인인 발렌티나 비스콘티가 검은 말이 끄는 검은색 천으로 장식된 마차를 탄 채 상복을 입은 대규모 수행단의 호위를 받으며 파리 시에 입성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샤를 6세 앞에 엎드리며 복수를 간청했다. 이에 파리 시의 왕족들과 고위 귀족들은 모두 동정심을 보이며 그녀를 지지했다.

그러나 막대한 세금을 뜯어가면서 가스코뉴 원정 실패 등 온갖 실책을 저지르던 오를레앙 공작을 경멸했던 북부 프랑스의 도시들과 파리 시민들은 장을 심정적으로 지지했다. 장 프티 역시 용맹공 장이 구국의 결단을 내렸다고 여겼다. 이러한 민심으로 인해 장을 섣불리 공격할 엄두를 못낸 오를레앙파 지도부는 1408년 1월 아미앵에서 장에게 협상을 제의했다. 초기에는 보복이 올 것을 두려워하고 있던 용맹공 장은 뜻밖에도 정적들이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자 기세가 살아났다. 장은 수많은 귀족과 무장한 호위대를 이끈 채 아미앵에 입성한 뒤 왕족들 앞에서 오를레앙 공작은 악인이었으니 그를 죽인 건 의로운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장 프티 역시 이에 호응해 장을 옹호하는 연설을 했다.

아미앵에서 협상이 결렬된 뒤, 용맹공 장은 기병 1,500명을 이끌고 파리로 진격해 2월 28일 파리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파리에 위풍당당하게 입성했다. 발렌티나 비스콘티를 비롯한 오를레앙 지지자들은 사전에 빠져나갔고, 국왕 샤를 6세와 이자보 왕비는 왕궁에 틀어박혔다. 그 대신, 도팽 루이가 호텔 생폴의 그레이트홀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장은 파리 대학 총장과 교수들, 파리 시민 대표 400인, 몰래 들어온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를레앙 공작을 살해한 이유에 대한 공개 변론을 했다. 이때 장 프티 역시 단상에 서서 아침 10시부터 4시간 동안 연설했다.

그는 디모테오전서 6장 10절의 라틴어 구절인 "Radix omnium Malorum cupiditas(욕망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를 인용하는 것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이후 성경,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머스 아퀴나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세네카, 솔즈베리의 존, 보카치오 등의 글을 인용하면서, 폭군을 죽이는 것은 자유인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루이 1세 도를레앙이 폭군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1. 마법 사용: 루이 1세는 휘하 수도사, 기사, 종자 및 하인이 밤에 검, 바들레르(일종의 세이버) 및 반지를 들고 라그니 인근의 빌모데 탑으로 가서 옥상에서 원을 그린 뒤, 원 중앙에 알몸으로 무릎을 꿇고 악마를 불렀다. 그러자 두 명의 악마가 나타나서 주홍빛으로 변한 세 가지 물체에 마법을 걸었다. 이후 공모자들은 몽팔콩 교수대에 시체를 매달고 기사에게 가져간 다음 입에 반지를 넣고 검, 바들레르를 시체에 찔렀다. 이후 그들은 매달린 사람의 뼈와 머리카락으로 가루를 만들었고, 이 가루와 세 가지 물건은 왕에게 사용하기 위해 그에게 주어졌다.
2. 발 데 아르당(Bal des Ardents) 사건: 1393년 1월 28일, 루이 1세는 프랑스 국왕이자 자기 형인 샤를 6세가 무도회에서 다섯 명의 젊은 귀족과 함께 튜닉 위에 송진을 바른 후 솜과 삼베 뭉치 등을 덮어 짐승 흉내를 내었을 때, 그들에게 횃불을 들이대 4명을 태워죽이고 왕을 거의 죽일 뻔했다.
3. 헨리 4세와 공모: 루이 1세는 샤를 6세의 사위였던 리처드 2세를 전복하기 위해 당시 파리에 망명 중이었던 헨리 4세와 공모했다.
4. 베네딕토 13세 지지 및 국고 탕진: 루이 1세는 왕과 그의 후손을 몰아내기 위해 베네딕토 13세를 지지했으며, 15년간 국고를 낭비하고 나라를 그릇되게 이끌었다.

장 프티는 부르고뉴 공작이 혐오스러운 오를레앙 공작이 저지른 다른 많은 범죄를 적시에 선언할 권리가 있지만, 자기가 앞서 밝힌 범죄 만으로도 오를레앙 공작이야말로 비난받아야 마땅하며, 용맹공 장은 왕으로부터 따뜻한 감사와 보상을 받아야 함을 입증할 것이라 확신한다며 연설을 마무리했다. 그 후 용맹공 장은 그의 연설 사본을 대거 복사한 뒤 프랑스 각지에 널리 배포하도록 했다. 장 프티 본인이 고급 사본과 값싼 사본을 사용해 복사 작업을 감독했다. 그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36 리브르 토너먼트를 용맹공 장으로부터 받았다.

1408년 8월 27일, 오를레앙 공작 지지자들은 용맹공 장이 반란에 직면한 리에주 주교이자 처남인 바이에른의 요한 3세를 돕기 위해 파리를 떠난 틈을 타 파리를 장악했다. 그 후 그들은 1408년 9월 11일 루브르 궁전에서 회의를 소집했고, 세리시 수도원장 토마 뒤 부르는 부르고뉴 공작의 범죄를 비난하고 처벌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다. 그해 10월 릴로 돌아온 용맹공 장은 장 프티를 불러서 반박 연설을 하도록 했다. 장 프티는 "늙은 수도원장의 말은 야만적이고, 사기적이고, 불명예스럽다" 등 격한 표현이 담긴 연설문을 작성했지만, 이 글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배포되지 않았다. 장 프티의 두번째 연설문은 현재 브뤼셀 왕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후 용맹공 장이 오테여 전투에서 리에주 반란군을 궤멸시키자, 파리 시민들이 오를레앙 공작 암살을 정당화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에 저항 의지를 상실한 오를레앙 세력은 11월 16일 투르로 후퇴했고, 장은 11월 28일 파리에 입성했다. 그 후 양자간의 협상 끝에 1409년 3월 장은 정식으로 국왕의 사면을 받고 오를레앙 공작의 유족들과 공개적으로 화해했다.

그 후 용맹공 장의 보호를 받으며 조용히 지내던 장 프티는 1411년 7월 15일 파드칼레의 에스당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논란은 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1413년 8월 22일 아르마냑파가 용맹공 장을 몰아내고 파리를 장악한 뒤, 파리 대학 총장 장 르 샤를리에 드 제르송은 9월 4일 샤를 6세 앞에서 장 프티가 하느님의 이름을 빙자해 살인을 정당화하는 신성모독을 저지르고 있다고 규탄했다. 샤를 6세는 파리 주교 제라르 드 몽터규와 프랑스 종교재판관에게 이를 조사하고 결정하라고 명령했다. 1413년 11월 30일부터 1414년 2월 23일까지 다섯 차례의 회의 끝에, 장 프티의 연설이 엄숙히 비난받았고 모든 사본은 불태우며, 사본을 가진 신자들이 이를 내놓기를 거부하면 파문받는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1414년 2월 25일 노트르담 광장에 커다란 장작 더미가 세워진 뒤, 장 프티의 글이 모조리 불태워졌다. 한 달 뒤에도 같은 행사가 반복되었다.

1414년 3월, 용맹공 장은 피사 교황 요한 23세에게 장 프티에게 내려진 파문을 무효로 처리해달라고 요청했다. 요한 23세는 이 사건을 검토할 추기경 3명을 임명했다. 1414년 11월 1일, 장 르 샤를리에 드 제르송 등은 장 프티 문제를 콘스탄츠 공의회에 제기했다. 그러나 1415년 2월,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는 아라스에서 평화 협약을 맺고, 각자의 행동을 동결하기로 했다. 장 르 샤를리에 드 제르송은 이에 굴하지 않고 콘스탄츠 공의회에 장 프티를 정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새 교황 마르티노 5세는 장 프티에게 걸린 혐의를 무효로 처리했다. 1418년 5월 29일, 부르고뉴파가 파리를 탈환했다. 이후 11월 3일에 장 프티의 유죄 판결을 취소하고 명예를 복권하기로 결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