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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르 샤를리에 드 제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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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장 르 샤를리에 드 제르송
Jean le Charlier de Gerson
생몰년도 1363년 12월 13일 ~ 1429년 7월 12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아르덴 주 바르비 제르송
사망지 프랑스 왕국 리옹
아버지 아르눌프 샤를리에
어머니 엘리자베트 라 샤드니에르
직위 파리 대학 총장, 신학자

1. 개요2. 생애3. 신비주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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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파리 대학 총장, 신학자.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공의회수위론을 제창했으며,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의 대립 때 아르마냑파를 지지했고, 잔 다르크를 신학 이론으로 옹호했다. 신비주의 신학론자이기도 하다.

2. 생애

1363년 12월 13일 프랑스 왕국 아르덴 주 바르비 제르송에서 마을의 농민인 아르눌프 샤를리에와 엘리자베트 라 샤드니에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부모 모두 성실함과 경건함으로 유명했다고 전해지는데, 특히 어머니 엘리자베트는 "2번째 성 모니카[1]"로 일컬어질 정도로 독실한 신앙인이었다고 한다.

베델과 랭스 학교에 다닌 뒤, 14세에 파리의 유명한 나바르 대학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했다. 이때 총장 피에르 다이와 질 데샹의 강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피에르 다이와 평생 친구가 되었다. 5년간의 공부 끝에 1381년 예술 학사 학위를 받았고, 1383년 프랑스 '학생 국가'[2]의 검찰관으로 선출되었고, 1384년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387년 나바르 대학 대표로서 아비뇽으로 가서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 앞에서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를 부인하면서 "마리아도 모세의 모든 후손과 같다"라고 주장한 도미니코회 수도사 장 드 몽송을 정죄하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1395년 파에르 다이가 퓌의 주교로 선임된 뒤, 그는 32세의 나이에 파리 대학 총장직에 선임되었으며,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경에 선임되었다. 이후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로부터 브뤼헤 학장에 선출되었다. 이 당시 파리 대학은 프랑스는 물론 유럽에서 수준이 가장 높은 신학 대학교로 명성이 자자했기에, 그의 명성은 프랑스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는 탁월한 언변을 갖춘 설교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17년간 파리 대학 총장을 맡으면서 서방교회 대분열을 근절하는 데 적극적으로 관심을 받았다.

장은 논문 <분열 당시의 행동 양식에 대한 감정(Sententia de mode se habendi tempore schismatis)>에서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 모두에 대해 냉정하고 온건한 의견을 표명했으며 , 대학 의 일부 구성원들이 칭찬하는 폭력적인 절차는 어떤 경우에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기초를 두었지만 교황에 의해 파괴된 교회의 이상적인 일치는 비록 교황의 소집이 없더라도 최고이고 합법적인 총회에 의해서만 회복될 수 있다며,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공의회를 열어서 단독 교황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1398년 9월 16일,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를 더는 교황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포하고 지원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9월 1일, 프랑스 왕실 관리들은 성직자들이 아비뇽에 남을 경우 프랑스 성직자로서의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아비뇽 추기경 23명 중 18명이 프랑스로 돌아갔고, 샤를 6세는 4년 반 동안 아비뇽 교황궁을 봉쇄했다. 장은 이에 대해 베네딕토 13세를 이단자나 분열주의자로 단정해서는 안 되며, 그를 지나치게 억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오로지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을 회복하고 분열을 구성하는 모든 비정상적인 상태를 중단해야만 분열을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403년 3월 11일 밤 아비뇽에서 탈출한 베네딕토 13세는 오를레앙 공작이며 당시 프랑스 왕실의 실권자였던 루이 1세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프랑스 왕실이 일방적으로 교황 지지를 철회한 것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한 추기경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결국 샤를 6세는 봉쇄를 풀었고, 베네딕토 13세는 아비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장은 교황의 석방을 공개적으로 기뻐하는 선언서를 발표했고, 파리 대학은 그를 대표로 삼은 축하 사절단을 마르세유로 파견해 베네딕토 13세를 접견했다. 이후 베네딕토 13세는 11월 18일에 장을 파리의 생장앙그레브의 큐레로 선임해, 그가 자신을 지지해준 것에 보답했다.

1406년 파리 공의회에서 베네딕토 13세를 강제로 폐위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피에르 다이와 함께 이를 단호히 반대하고 보다 온건한 절차의 필요성을 촉구해 관철시켰다. 1407년, 장은 피에르 다이와 함께 사절단을 이끌고 베네딕토 13세를 찾아가서 모두의 화합을 위해 교황직을 사임하라고 권고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분개한 일부 사절이 베네딕토 13세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지만, 장과 피에르 다이는 베네딕토 13세가 자발적으로 물러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407년 11월 23일,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이 파리 시내에서 부르고뉴 공장 용맹공 장의 부하들에게 암살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용맹공 장은 자신이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오를레앙 공작을 암살했다고 주장했으며, 그의 변호인인 장 프티는 오를레앙 공작은 폭군이었으며, 폭군을 죽이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장 프티가 하느님의 이름을 빙자해 살인을 정당화하는 신성모독을 저지르고 있다고 규탄했다. 이로 인해 부르고뉴 공작 지지자들로부터 강한 적의를 샀다.

1409년 피사 공의회에 참석한 장은 알렉산데르 5세 선출에 기여했다. 그는 탁월한 신학자였떤 알렉산데르 5세라면 교회의 혼란을 잘 수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알렉산데르 5세가 수도사로서 몸을 담았던 프란치스코회에 과도한 편애를 보이면서 본당 성직자와 대학을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의 손에 맡기는 교서를 반포하자, 그는 깊이 실망했다. 파리 대학교는 그의 주도하에 알렉산드레 5세의 신학에 관한 맹렬한 반대를 담은 팜플렛 <교수에 대한 검열(Censura Professorum)>을 발표했다.

1413년 봄, 부르고뉴 공작을 지지하는 파리 시민들이 카보시앵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파리에 있던 장의 집은 약탈당했고, 그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아치형 지붕 아래에서 두 달 동안 피신해 암살을 모면했다. 그는 자신이 성 요셉의 보호를 받아 폭도들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고 확신했다. 피난처에서 나온 뒤, 그는 프랑스어로 '성 요셉에 대한 배려(Consideration sur Saint Joseph)' 라는 제목의 장문의 논문을 썼고 , 라틴어로 된 긴 시인 조세피나(Josephina)를 집필해 성 요셉의 미덕을 찬미했다.

1414년부터 개최된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하고자 여정을 떠난 장은 1415년 2월 21일 파리 대학 대표단과 함께 콘스탄츠에 도착한 뒤 로마, 아비뇽, 피사에서 난립하는 세 교황을 전부 물러나게 하고 모두가 인정하는 새 교황을 세워야 한다는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의 국왕이자 독일왕 지기스문트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찬성해 마르티노 5세의 선출에 기여했다. 그러면서 전체 공의회는 교황에 우선한다는 공의회수위론을 체택하도록 했고,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의 결혼을 기리는 축일을 제정할 것을 촉구했으며, 얀 후스를 이단으로 규탄해 화형에 처하도록 했다.

그러나 장 프티를 정죄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새 교황 마르티노 5세는 장 프티에게 걸린 혐의를 무효로 처리했다. 이후 장은 프랑스에서 권세를 잡은 부르고뉴 공작을 두려워해 감히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하고 콘스탄츠에서 비공식적으로 망명 생활을 하다가 티롤의 라텐베르크에서 살았다. 1419년 용맹공 장이 피살된 뒤 형제가 셀레스티나 수도원의 원장으로 지내던 리옹으로 갔고, 그곳에서 마니피캇[3]에 관한 12권의 논문과 아가 주석서의 모음집 등 문학 활동에 몰두했고, 신비주의 신학론을 제기했다.

1429년 잔 다르크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장은 <잉글랜드에 맞서 프랑스 왕의 군대의 지도자가 된 처녀의 기적적인 승리에 대하여>를 집필했다. 그는 이 글에서 잔 다르크에 대한 몇 가지 주요 비난, 즉 여자가 남성의 의복을 입는 문제, 머리를 짧게 깎는 문제, 무기를 착용하는 문제 등은 잔 다르크가 하느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반박했다. 이 글은 훗날 잔 다르크의 복권 재판의 기본적인 논리가 되었다. 1429년 7월 12일 리옹에서 사망했다.

3. 신비주의 신학

그는 자신을 사도 바울에 의해 개종한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테스로 소개한 5세기 ~ 6세기의 기독교 신학자 위 디오니시우스가 제창한 신플라톤주의 성향의 신비주의 기독교 사상의 부활을 꾀했다. 그는 둔스 스코투스와 조반니 다 리파의 주의주의[4] 이론을 비판하면서, 사랑을 통해 자기 안에서 인식하는 하느님 에 대한 경험적인 지식을 추구했다. 그는 순수한 사랑은 무한한 자유 속에서 작용해 모든 이론적 학습을 능가한다고 여겼다. 그의 신학은 대단한 과학적 성취를 요구하지 않으며, 하느님과의 사랑을 통한 연합을 통해 인간의 영혼이 완전한 만족을 얻게 된다고 봤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하느님과의 교감을 이룰 12가지 조건 및 수단을 제시했다.
1. 하느님의 부르심을 기다려라.
2. 자신의 기질을 잘 파악하라.
3. 자신의 직업과 상태에 주의를 기울여라.
4. 더 큰 완벽함을 향해 끊임없이 목표를 세워라.
5. 가능한 한 다양한 직업을 피하고 어떤 경우에도 딴 곳에 몰두하지 마라.
6. 배움에 대한 모든 헛된 욕망, 즉 모든 쓸데없는 호기심을 제쳐둬라.
7. 침착함을 유지하고 인내심을 실천하라.
8. 애정과 열정의 근원을 파악하라.
9. 필요한 시간과 장소를 선택하라.
10. 자고 먹는 데 있어서 금욕이나 지나친 극단적인 행동을 피하라.
11. 경건한 애정을 자극하는 생각에 몰두하라.
12. 명상을 통해 사람의 마음에서 모든 이미지를 없애라.

장은 신비주의 신학을 택함으로써 스콜라주의가 인간의 이성에 집착하는 우를 범하거나 샤르트르의 아모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적용하여 전개한 범신론적 이론[5]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현대 가톨릭 계열에서는 그의 신학을 일반적으로 높이 평가하지만, 공의회수위론을 주장한 것에 대해서는 교황무류성을 부정한 오류를 범했다고 본다.


[1] 히포의 모니카(Monica of Hippo).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로, 부도덕하고 난폭한 행실을 보이는 남편을 기독교로 개종시켜 신실한 신앙인으로 변화하고, 방탕한 아들을 회심시킨 인물로 유명하다. 1566년 교황 비오 5세에 의해 성녀시성되었다.[2] Nation, 프랑스 태생의 대학 학생들을 가리키는 용어[3] Magnificat, 성모 마리아 송가[4] Voluntarism, 신적 이성에 대한 신적 의지의 우선성을 주장하는 이론. 신을 믿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고 주장했다.[5] "신은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은 하나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임을 믿어야 하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