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1 05:25:56

적개공신교서

파일:손소 적개공신교서.jpg
손소 적개공신교서

1. 개요2. 내용3. 목록
3.1. 장말손 적개공신교서3.2. 정종 적개공신 교서 및 관련 고문서3.3. 적개공신논상록권3.4. 김교적개공신교서

1. 개요

敵愾功臣敎書. 조선 세조 13년, 1467년에 세조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적개공신들에게 내린 교서. 대한민국의 보물 제604호, 1835호,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유산 제13호,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유산 제313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세조에게 적개공신의 지위를 받은 이들은 총 45명이다.

1등 공신은 강순, 남이 등 10명, 2등 공신은 장말손, 손소 등 23명, 3등 공신은 한계미, 정종, 정준 등 총 12명이다. 세조가 이들에게 내린 공신 교서 중 장말손, 정종, 손소, 허종, 김교의 것이 최근까지 전해지고 있었는데 이중 허종의 교서는 6.25 전쟁 당시 멸실되었다.

조선 초 1400년대에 만들어진 우리나라의 공신녹권과 교서로 당시 한국의 상훈 제도의 양식과 구성, 전공에 대한 포상 형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3. 목록

3.1. 장말손 적개공신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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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물 寶物
}}}
보물 제604호. 경상북도 영주시의 후손 장덕필 소장.

장말손 적개공신교서(張末孫 敵愾功臣敎書)은 세조 13년(1467)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수훈을 세운 45인의 공신들에게 내린 교서로서, 그 가운데 장말손은 2등공신으로 선정되어 적개공신의 교서를 받았다.

장말손의 후손인 장덕필씨가 소장하고 있으며, 이것 외에 적개공신문헌으로 『적개공신회맹록』도 같이 보존되어 왔으나 이 회맹록은 불에 타서 그 일부가 훼손되고 45인의 적개공신에게 내린 교서가운데 유일하게나마 확인된 것은 이 것뿐이다.

이 교서의 크기는 가로 150㎝, 세로 30㎝이며, 공신들 전원의 이름이 적혀있고, ‘시명지보(施命之寶)’라는 국왕의 직인이 찍혀있다.

장말손가에는 적개공신교서 외에도 대한민국 보물 제501호인 장계 홍패 및 장말손 백패·홍패(張桂 紅牌 및 張末孫 白牌ㆍ紅牌), 보물 제502호 장말손초상(張末孫肖像), 보물 제881호 장말손 유품(張末孫 遺品), 보물 제1005호 장말손 종가 고문서(張末孫 宗家 古文書) 등의 여러 장말손이 남긴 문화재들이 함께 내려오고 있다.

3.2. 정종 적개공신 교서 및 관련 고문서

보물 제1835호. 경북 고령군의 대가야박물관 소장.

정종 적개공신교서(鄭種 敵愾功臣敎書)는 1467년에 발급된 매우 이른 시기의 문서로서 공신의 녹훈 사실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교서는 1467년(세조 13) 5월에 함길도 길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1467년(세조 13) 11월에 鄭種에게 내린 것이다. 적개공신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신하들을 공로에 따라 3등으로 나누어 모두 45명을 녹훈하였는데, 1등은 李浚 등 10명, 2등은 金國光 등 23명, 3등은 李溥 등 12명이다. 정종은 3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정종 무과홍패(鄭種 武科紅牌)는 1442년 발급된 이른 시기의 교지로서 무과 급제 교지 가운데 발급 시기가 앞서는 귀중한 자료로 보인다. 특히 조선시대 고신(告身)의 서식이 왕지(王旨)에서 교지(敎旨)로 바뀌는 시기에 발급된 교지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3.3. 적개공신논상록권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호. 경북 경주시의 후손 손동만 소장.

공신록권은 나라에 공이 있는 인물에게 공신으로 임명하는 증서를 말한다. 이 녹권은 조선 세조 13년(1467)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문신 손소(1433∼1484)에게 내린 적개공신논상록권이다.

손소는 세조 5년(1459)에 문과에 급제한 후 주부, 병조좌랑을 역임하였으며, 세조 13년(1467)에 길주에서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자 종사관으로 출전, 공을 세움으로써 적개공신 2등에 올랐다. 그 후 내섬시정, 성주목사, 공조참의를 거쳐 안동목사, 진주목사를 지냈다. 시호는 양민이며 글씨를 잘 썼다.

적개공신들에게 하사한 논상록권으로서 보관자에 의하면 현존하는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이 녹권과 함께 세조가 내려준 벼루 옥연적과 구슬장식인 산호영락 그리고 상아가 새겨진 칼 등이 전해오고 있다.

3.4. 김교적개공신교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13호. 경남 함양군의 후손 김영철 소장.

조선 전기의 무신인 김교(1428∼1480)가 세조 13년(1467)에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강순의 비장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우고 적개공신 1등에 책봉되어 받은 교서이다.

김교는 세종 32년(1450)에 무과에 급제하여 세조 6년(1460)에 신숙주의 군관으로 모련위 토벌에 공을 세우고, 세조 13년(1467)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적개공신에 책봉되었다. 그 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성종 2년(1471)에 어린 성종을 옹립하는데 공이 있어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평안도 절도사가 되었다. 성종 10년(1479)에는 명나라 요청으로 건주야인을 토벌시 출전한 공으로 명나라 황제로부터 은대를 하사받고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이 교서는 가로 76cm, 세로 28cm 크기의 명주에 쓴 것으로, 제작연대는 세조 14년(1468)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