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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호

파일:전성호.jpg
성명 전성호(全盛鎬)
이명 전성룡(全盛龍)
철주(鐵舟)
생몰 1896년 9월 10일 ~ 1950년 9월 15일
출생지 함경북도 경성군 오촌면 용포리
사망지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제1장군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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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50년 북한과 전쟁 기간 중 장사 상륙 작전의 지휘관으로 전사했다.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전해종(全海宗)의 부친이다.

2. 생애

전성호는 1896년 9월 10일 함경북도 경성군 오촌면 용포리에서 전재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0년 한일병합 후 만주로 망명했으며, 1916년 만주에서 조직된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에 가입하고 서일을 추종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에는 군자금 보충을 위해 용정은행을 습격하기도 했다. 1919년 이후 1919년 8월 서일이 길림에서 김좌진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조직할 때, 그는 북로군정서에 가담하여 사관연성소를 졸업했다. 그리고 1920년 백두산 서남쪽 무송현에서 김호를 단장으로 하는 흥업단(興業團)이 조직되자, 그는 강승경(姜承卿)과 함께 북로군정서의 파견원으로 이곳 흥업단 연무소(鍊武所)에서 군사훈련 및 작전 등을 지도하였다.

1927년 지린성에서 3부통합 대표회의가 개최되자 그는 동만 교민대표로 김동진(金東鎭)과 함께 참석하였다. 또한 김좌진, 지청천 등과 함께 한국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만몽일보(滿蒙日報), 간도(間道)일보, 간도통신 등을 경영하며 독립운동과 민족계몽에 진력하였다. 1928년에는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가 조직되자 지청천, 김좌진, 황학수, 박창식 등과 함께 군무위원으로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연변귀화선인자치촉진회(延邊歸華鮮人自治促進會) 부회장을 맡아 연변에 거주하는 한인 교포들의 자치권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석방된 전성호는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자치권 획득을 위해 마침 만주사변을 통해 만주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일제와 영합하는 모습을 보였다. 1932년 2월 15일 용정 공회당에서 열린 민생단 성립대회에서, 전성호는 개회를 선포한 뒤 형세보고를 하고 나서 "산업인의 생존권리를 확보하고 세계의 대세에 순응하여 독특한 민족문화를 건설하며 일치 단결하여 자유천지를 개척한다."는 내용의 강령을 선포했다.

이후 민생단은 간도 지역 조선인의 생존권 확보, 구체적으로는 조선인 권익 옹호, 조선인 자치를 표방하였으나 막상 설립 후에는 일본의 중국 침략 정책을 지지하며 친일, 반공 활동을 벌였고, 중국 공산당 조직과 조선인 독립군 등 반일 무장세력은 이에 맞서 민생단 가입자에 대한 살해 위협, 폭행을 가했다. 민생단은 이에 대항해 마을마다 자위단을 조직할 것을 계획하고 일본총영사관과 특무기관의 허가를 얻었다. 이어 간도자위단훈련소를 세우고 자위단원 후보들을 뽑아 7월 1일 개소하였으나, 간도에서 조선인들이 무장 단체를 갖추고 정치적 조직을 키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은 일본은 정책을 바꿔 자위단 결성에 반대하고 민생단에도 압력을 가한다. 이에 민생단은 1932년 7월 14일, 사무소 폐쇄를 신고하고 자진 해산했다.

연변 역사학자 류연산의 저서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에 따르면, 연변 역사학계는 전성호가 민생단에 참여한 행적 때문에 오래전부터 그를 친일파로 보고 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전성호가 친일단체의 두목으로서 살아왔으며, 그의 집엔 간도 성장은 물론 만주국의 거물들도 자주 찾아오곤 했다고 주장했으며, 전성호가 일본군 징병에 나간 아들이 탈주해오자 덜미를 잡고 부대로 데려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류연산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전성호가 민생단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은 <간도신보(間道新報)>, 일제 정보 기록 등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그 외에 전성호가 친일 행적을 보였음을 입증하는 기록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1]

민생단이 해산된 후, 전성호는 1935년경 중국 의용군사령관 왕덕림(王德林)과 제휴했으며,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과도 연락하며 대일항전을 지원했다. 8.15 광복 후 귀국한 그는 오광선, 김해강, 김승학 등과 함께 서울로 상경한 후 외세의 침략에 맞서 한국만의 독자적인 군사 단체를 조직하기로 하고 한국 혁명군이란 명칭 아래 동지들을 모집했다. 얼마 후,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이 한국혁명군을 "광복군 국내 제1지대"로 변경할 것을 요청했고, 그는 이를 수락하고 대한광복군 제1지대 장성으로 부임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전성호는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하여 제1사단 12연대장을 지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개성에서 조선인민군에 맞서 결사적으로 맞서 싸우다가 중상을 입은 뒤 사단장 백선엽의 명령으로 후송되었다. 그 후 1950년 9월 15일 장사 상륙 작전의 지휘관으로 투입되었다가 전사했다. 그의 유해는 1969년 국립서울현충원 제1장군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전성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사실 류연산은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에서 전성호 외에도 최진동 등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에 영합했음을 주장해 한국 대중에게 충격을 안겼지만, 소문에 불과한 것을 사실인양 포장하고 특정 기록을 확대 해석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일정부분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