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 총리대신 | |
<rowcolor=#373a3c> 초대 | 제2대 |
정샤오쉬 | 장징후이 |
만주국 초대 총리대신 | ||
이름 | 정체: 鄭孝胥 | |
간체: 郑孝胥 | ||
한국식 독음: 정효서 | ||
영문: Zheng Xiaoxu | ||
호 | 해장(海藏) | |
자 | 소감(蘇戡) | |
출생 | 1860년 5월 2일 | |
청나라 강소현 소주부 | ||
사망 | 1938년 3월 28일 (향년 77세) | |
만주국 신경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만주국 | |
학력 | 청나라 향시 급제 | |
직업 | 서예가, 정치가 | |
총리 임기 | 국무총리: 1932년 3월 9일 ~ 1934년 3월 1일 총리대신: 1934년 3월 1일 ~ 1935년 5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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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의 외교관, 예술가. 청나라 소조정을 섬겼으며 만주국 건국 후 초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이후 일본에 붙은 대한간으로 싸잡혀 욕을 먹고 이후 차후의 재평가도 문예 활동 부분에 국한되어 있지만 살펴보면 한간과는 거리가 좀 있는 이상주의자에 해당한다.2. 생애
2.1. 초기 이력
1860년 강소성 소주에서 출생했다. 원적은 복건성 복주이다. 1882년, 향시에 장원급제하여 청나라의 주일 공사관원을 거쳐 고베 공사를 지냈다. 귀국 후 한커우 철로총판, 호남포정사를 역임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항전을 주장하였으며 문무 양면에서 고관대작을 역임하여 광서변방대신(廣西邊防大臣), 광동안찰사(廣東按察使), 호남포정사(湖南布政使) 등을 지냈다. 이홍장, 장지동의 막료로 일하며 양무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변법자강운동, 입헌운동에도 개입했다. 이때 청조의 부패를 비판하면서 내각책임제, 입헌군주제의 실시를 주장했고 헌법제정, 국회개회, 삼권분립, 군주권 제한을 실시를 주장했다. 하지만 정샤오쉬는 단순한 개혁론자라기보다는 인간의 본성도 다스릴 수 있는 왕도정치를 주장하였다.1911년 신해혁명 발생 후 선통제의 퇴위를 슬퍼하는 시를 지으며 혁명은 치명적인 실수이자 재난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나진욱, 왕국유 등과 함께 정부에서 일하라는 위안스카이의 제의를 뿌리치고 10여년 동안 상하이에 은거하며 한동안 서예와 문학에 열중했다. 1917년 장훈복벽이 발생하자 공화국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인정하면서도 현재 중화민국을 가짜 공화국으로 규정하고 전제군주정과 입헌군주정 사이의 과도기적 정체로 현능전제(賢能專制)를 주장했다.
"현능전제의 정부가 아니면 난을 평정하고 논쟁을 무마시키기에는 부족하다. 입헌군주정체는 20년 만에 이룰 수 있지만 공화정체를 하고자 할 경우 수십년이 걸린다고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샤오쉬의 현능정체론.
정샤오쉬의 현능정체론.
2.2. 청나라 소조정을 섬기다
그러다가 1923년, 동향사람 진보침의 소개로 처음으로 선통제를 알현하였다. 선통제는 정샤오쉬의 인격에 감명을 받아 스승이 되어주길 청했고 이후 선통제의 교육을 맡았다. 선통제의 서양인 사부였던 레지널드 존스턴과도 친하게 지냈다. 선통제가 레지널드 존스턴에게 정샤오쉬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레지널드는 중국에서 생활한 25년 동안 정샤오쉬만큼 존경스럽고 칭찬하고 싶은 중국인이 없다고 높이 평가하였다.1924년, 선통제는 청나라 소조정 내무부 개혁을 실시하면서 정샤오쉬에게 내무부 총관직을 제의하였고 이로 인하여 정샤오쉬는 청나라 건국 이래로 첫번째 한족 내무부 수장이 되었다. 이에 만청의 왕공들이 즉시 사임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했으나 정샤오쉬는 협박편지를 찢으면서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에 만청 왕공들은 정샤오쉬가 자금성의 보물을 빼돌리기 위해 내무부 총관이 된 것이라고 북양정부에 음해를 하였으나 정샤오쉬가 평소에 부귀를 하찮게 여기는 삶을 살아서 명성이 높았기 때문에 북양정부는 이를 무시했다. 이후 정샤오쉬는 내무부 총관으로 재임하면서 자금성의 경비를 대대적으로 감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타고르와 선통제의 만남을 수행했으며 자금성의 수입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키기 위한 계획을 작성했으나 북경정변이 일어난 후 핍궁사건으로 자금성에서 쫓겨나면서 허사가 되었다. 핍궁사건 후 선통제를 계속 모셨다.
1927년 8월, 일본을 방문하여 고노에 후미마로, 우가키 가즈시게, 요나이 미쓰마사, 스즈키 간타로, 미나미 지로, 히라누마 기이치로, 기요우라 게이고 등 일본의 거물 정치가들을 만나 푸이의 복벽을 논의했다. 1929년에는 고모토 다이사쿠, 고이소 구니아키 등과 논의하여 만주에서 복벽을 행할 음모를 꾸몄다. 고모토는 뤼순에서 이타가키 세이시로, 이시와라 간지 등과 논의하여 정샤오쉬와 접촉한 후 "얼굴은 마련된 것 같군요."라고 만족을 표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샤오쉬는 톈진 거주 시기 푸이가 만주로 떠나는 것은 반대했다.
2.3. 복벽을 위해 한간이 되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관동군은 선통제를 만주국의 수괴로 세우기로 결정하고 공화국 건국을 주장하는 장징후이, 짱스이, 국민정부 잔류를 주장하는 마잔산, 장쭤샹, 완푸린의 주장을 물리치고 푸이를 집정에 추대했는데 이때 정샤오쉬는 만주국 초대 국무총리 겸 문교부 총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복벽파로부터 국무총리 자리에 눈이 멀어 푸이를 황제가 아니라 집정이라는 해괴한 자리에 올렸다고 욕을 두고두고 먹었다. 물론 정샤오쉬가 이때 손놓고 있던게 아니라서 푸이, 뤼전위 등과 함께 도야마 미쓰루, 미나미 지로, 오가와 헤이키치 등에게 복벽을 실시할 것을 간청했고 1932년 2월 16일에 개최된 건국최고회의에서 공화파와 극렬히 대립했다.1932년 3월 9일, 정부조직법이 발표되고 집정 취임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때 이타가키 세이시로가 요구하는 서한에 서명하여 혼조 시게루 관동군 사령관에게 제출했다. 푸이는 이후 회고록을 통해 반년 후에 그 사실을 알고 정샤오쉬가 독단전횡을 했다고 호되게 문책했다고 주장했으나 정작 그 편지에는 푸이의 서명이 있었다는 게 함정이다. 푸이의 이 서명서는 훗날 일만의정서의 부속문서가 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만주국은 국방 및 치안 유지를 일본에 위탁하고, 그 경비는 만주국이 부담한다. 2. 만주국은 일본군대가 국방상 필요로 하는 철도, 항만, 수로, 항공로 등의 관리 및 신로의 부설, 개설을 일본 또는 일본이 지정하는 기관에 위탁한다. 3. 만주국은 일본군대가 필요로 하는 각종 시설을 극력 원조한다. 4. 달식명망 있는 일본군을 만주국 참의에 임명하고, 또 그 외 중앙, 지방관서에도 일본인을 임용하며 그 선임, 해직에는 관동군 사령관의 추천, 동의를 요건으로 한다. |
이는 만주국이 그 잉태 단계에서 일본의 괴뢰국이 될 수밖에 없는 자인이나 다름 없었다. 정샤오쉬는 명색이 만주국 총리대신이나 일본인 총무장관 고마이 도쿠조로부터 턱짓으로 지시를 받는 등 볼품없는 대우를 받았다. 정샤오쉬는 이에 불만을 품었고 만주국 건국의 포부를 묻는 일본인 고문 야노 진이치에게 "나는 고용되어 온 떠돌이 배우일뿐이지 무대 감독이 아니다. 또한 각본도 다른 사람이 쓴 것으로 나는 다만 그 줄거리를 통보받기만 할 뿐이어서 당신의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다."라고 조소했다. 게다가 일본도 일본이지만 기존 만주의 군벌들인 짱스이, 장징후이, 아이신기오로 시치아 등의 견제로 인하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특히 복건성 출신의 정샤오쉬는 만주에 인맥이라곤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2.4. 만주국 초대 국무총리
"인류는 필히 도덕을 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나 종족 간에 견해 차이가 있어 남을 억누르고 자기를 드높이려 하니 이에 도덕이 타락해진다. 인류는 필히 인애를 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나 국제 간에 분쟁이 있어 남에게 해를 끼치고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니 이에 인애가 박하여졌다. 오늘 우리나라를 세움에 있어, 도덕과 인애를 주로 하여 종족 간의 마찰과 국제 간의 분쟁을 해소하여 왕도낙토를 이루고자 하니 마땅히 이를 실행할 것이라. 무릇 모든 국민은 이를 위해 힘쓸지어다."
정샤오쉬의 취임 연설.
정샤오쉬의 취임 연설.
국무총리 취임 후 미병설을 주장하며 왕도정치에는 군대가 필요하지 않으니 만주국의 치안은 경찰로만 유지하고 만주군은 창설하면 안된다는 입장을 보이고 교육 중시론을 내세우는 등 만주국 건국 초기 이상주의자들의 구상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1932년 7월 만주국 협화회가 조직되면서 만주국 협회회장에 추대되었다. 이후 총무장관 고마이 도쿠조와의 알력 끝에 10월에 그를 몰아내고 만주국에서 출국시키는데 성공했다. 1932년 6월 14일, 일본 중의원 본회의가 만주국 승인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하면서 8월 19일, 일만의정서가 결정되었고 신임 관동군 사령관 겸 주 만주국 일본 특명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가 만주국에 부임했다. 무토는 정샤오쉬와 회담하여 철도, 항만, 수로, 항공로 등의 관리를 관동군에게 위탁할 것, 일만합작의 항공회사를 설립할 것, 광업권을 일본 내지 일만 합병회사에 허여할 것을 합의하였다.
9월 15일, 일만의정서가 체결될 때, 언론에는 정샤오쉬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고 보도했지만 정작 무토의 수행원인 요네자와 기쿠지 일등서기관은 정샤오쉬가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울 것 같은 얼굴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하타 슌로쿠의 일기에도 정샤오쉬는 7월 10일, 갑자기 국무총리 사직 의사를 표명하였으나 일본 측의 만류로 그만두었다고 하는 등 정샤오쉬는 만주국이 일본의 괴뢰국이 되는데에 상당한 괴로움을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일만의정서 체결 직전인 9월 9일에도 사의를 표명하여 일본 측이 정샤오쉬와 사이가 좋지 않은 고마이를 쫓아내주겠다고 약속해서 겨우 달랠 수 있었다. 조인식에서도 정샤오쉬가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본 일본 측이 갑자기 정샤오쉬가 일만의정서 조인을 거부할까봐 걱정돼서 날짜 기입조차 하지 않고 허겁지겁 서명을 시켰다.
결국 일만의정서 체결 이후에는 푸이와의 관계도 매우 나빠져서 푸이는 정샤오쉬 경질을 논하게 된다. 하지만 정샤오쉬는 국민정부에 반역자로 지정된 상태라서 중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정샤오쉬는 국제연맹에서 파견한 리턴 조사단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리턴 조사단이 만주국의 독립성을 인정하여 국제적인 공조를 통해 만주에서 제국을 건국할 희망을 품었지만, 리턴 조사단은 만주국이 일본의 괴뢰국임을 당연히 알아채고 건국 당위성을 부정했다. 이에 일본은 1933년 열하사변을 일으켰고 급기야 국제연맹도 탈퇴한다. 만주국 국정도 일본인들이 장악한 총무청이 다 해먹는 꼴을 본 정샤오쉬는 날이 갈수록 의기소침해져 국무회의에도 침묵을 지키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묵언 시위로 일본인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8시에 출근하고 4시에 퇴근하고 꼼꼼하게 근무일지를 작성하는 근면한 삶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1934년 3월 1일, 일본을 조르고 졸라서 마침내 만주국을 집정제에서 제정으로 바꾸고 자신은 국무총리에서 총리대신으로 거듭났다.
2.5. 경질
정샤오쉬의 고민은 괴뢰국의 총리라는 것도 있고 왕도정치를 행한다는 이상을 펼 수 없다는 것도 있었지만 정작 자신을 내세운 일본인들로부터도 매국노로 욕을 먹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 중의원 오자키 유키오는 5.15 사건 이후 1933년 <묘비를 대신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정샤오쉬를 사리사욕을 위해 나라를 판 불량한 매국노로 비난했다. 평소에도 "한 사람도 나를 따라오는 자가 없고 감화의 힘도 없다."고 자괴감을 표출하던 정샤오쉬는 큰 충격을 받았다. 성질 같아선 진작에 총리직을 때려쳤겠지만 청나라 복벽이 가능할 것이라는 마지막 희망 때문이었는데 만주국 건국 1주년 기념식에서 정샤오쉬가 그간 참고 참았던 분노가 폭발하게 된다. 정샤오쉬는 만주국을 스위스같은 영세 중립국으로 삼고, 황제의 권력을 강화할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군은 이를 모두 묵살했다. 결국 정샤오쉬는 기념식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만주국은 안겨 있는 어린애와 같다. 지금 손을 놓아 이것을 걷도록 해야 한다. (...) 그러나 아이를 안은 자, 만약 오로지 오랫동안 이것을 수중에 품어두고 있으면 자립의 날은 없다. (...) 이에 이르러 우리 만주국이 아직 잘 서지도 못하는 상황, 일본 정부가 기어이 손을 놓아 서도록 하지 않는 상황, 이것이 오늘날 명백한 바이다."
발언을 마친 정샤오쉬는 "용렬무능"이라고 스스로를 비판하고 퇴장했다. 관동군은 격노하여 정샤오쉬를 탄핵했고 푸이는 "마음 속의 불만을 드러내는 것은 총리 대신으로 아주 신중하지 못한 행동이다. (...) 총리으로서의 수완과 태도에 결여된 바가 있다."고 비판했다. 어차피 정샤오쉬도 1935년 일본을 방문하여 쇼와 덴노에게 온갖 아첨을 하고 있는 푸이를 보고 정나미가 다 떨어진 상태였고 '즐겁도다, 옥두를 내던진 것과 같다.'라는 시를 지으며 기뻐했다. 이는 범증이 항우와 연을 끊은 후 옥두를 바닥에 던져 울분을 푼 일화를 인용한 것이기 때문에 주변의 비난을 샀다.
1935년 5월, 정샤오쉬는 푸이가 일본으로 간 사이에 관동군 사령관 미나미 지로와 내각 개조에 대해 2차례 논의했다. 정샤오쉬는 푸이가 사임을 승인하자 미나미 지로에게 자신의 후임으로 젠다오 성장 차이윈성을 추천했다. 하지만 일본 측은 조종하기 쉬운 참의부 의장
2.6. 말년
퇴임 후 정샤오쉬는 일본에 저항한 미운털이 박혀 일본의 엄중한 감시 아래에 살았다. 은행에 저축해둔 은행 공로금을 찾을 수도 없었고 베이징 방문도 금지당했다. 결국 정샤오쉬는 헌병의 감시 아래에서 시 조차 짓지도 못하고 붓글씨로 세월을 보내다가 1938년, 창춘에서 급사했는데 훗날 푸이조차도 일본인에게 암살되었다는 소문이 있다고 언급할 정도 였으나 병명 자체는 장질에 감기가 겹친 거라서 확실하긴 했다. 만주국 정부는 국장을 거행하여 정샤오쉬를 매장하였는데 정샤오쉬의 사인을 확인해주는 것은 거부하여 암살 의혹을 부추겼다. 또한 무덤을 고향에 만들어달라고 유언했으나 일본은 유해를 중국에 보내는 것조차 금지했다.이후 그의 비서를 지낸 일본인 오타 도요오가 정샤오쉬를 기리는 고학사와 태이 신사를 만들어 정샤오쉬를 모셨다.
3. 매체에서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내무총관에 임명되는 씬, 만주국 건국 씬 등에서 간간히 등장하지만 푸이의 일본 순방 이후 장징후이에게 밀려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진다. 최악의 오역으로 악명이 높았던 블루레이의 한국어 자막은 정샤오쉬를 '친차슈'라는 근본없는 괴명으로 번역한 흑역사가 있다. 황석희가 재번역을 맡으면서 제 이름을 되찾았다고 한다.4. 주요경력
만주국 역대 총리대신 | |||||||
만주국 건국 | → | 1대 | → | 2대 | |||
정샤오쉬 (1932년 3월 9일 ~ 1935년 5월 22일) | → | 장징후이 |
5. 참고문헌
- 키메라 만주국의 초상, 야마무로 신이치, 소명출판.
- 자금성의 황혼, 레지널드 존스턴, 돌베개.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만주사변기 중일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 노준수, 滿洲國과 鄭孝胥(1860-1938)의 政治思想, 영남대학교 석사학위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