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2:43:07

정유나(방송인)

남북통일 코리아 악단
윤설미 김소연 이채원 최리나 정유나 이은별
정유나
파일:이만갑 정유나.jpg
출생 1988년 11월 18일[1] ([age(1988-11-18)]세)
평안북도 강계군 화경면 신적동[2]
(現 자강도 전천군[3] 신적로동자구)
국적
[[북한|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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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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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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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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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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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가족 아버지 정명운, 어머니 김신애, 1남 1녀 중 막내[4], 딸[5]
신체 160cm[6]
종교 개신교 (장로회)
학력 김정숙교원대학[7] (음악과 / 바이올린 전공)
대학교[8] (재학)
데뷔 2017년 이제 만나러 갑니다 (채널A)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9]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네이버 카페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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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이탈주민 출신 방송인, 사회운동가.

신은하, 유현주, 김아라 등과 함께 이제 만나러 갑니다의 고정 출연진이기도 하다.

2. 생애

1988년 11월 18일 출생이며, 고향은 이북 5도 기준 평안북도 강계군 화경면 신적동(新積洞).[10][11]

정유나는 군복무를 하던 아버지 정명운을 따라 자강도 전천군, 자강도 룡림군 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워낙 춥고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라 어렸을 때 스케이트랑 스키[12]를 많이 탔었다고 한다. 10대 초반이었던 1998년 길을 잃어 9월부터 12월까지 함경북도에서 꽃제비로 지낸 적이 있었다.[13]

2006년 3월 2일 탈북 당시에 정유나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의 국경에 위치한 함경북도 회령시에 있는 김정숙 교원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 이 학교에는 북한 학생 뿐만 아니라 화교 학생도 있었고 이 지역에는 중국의 무역상들을 통해 세계 각국의 정보와 한국 드라마, 영화 등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고 한다.[14] 학교를 다니면서 남자친구를 사귈 기회도 몇 번 있었지만 보수적인 아버지한테 걸려서 머리를 2번이나 짤렸었다고 한다.

대학에서 2학년으로 재학하고 있었던 18세의 정유나는 대학 동기의 한국 드라마를 보자는 제안에도 화를 낼 정도로 세뇌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부한다 치고 한 번만 보자는 생각에 얼떨결에 접한 가을동화라는 한국 드라마를 보고 큰 문화적 충격을 받았고 3개월도 되지 않아 드라마를 통해 세뇌가 풀린다.[15] 이윽고 탈북해서 한국에 있던 고모와 연락을 한 후 탈북을 결심하였다. 아버지와 오빠는 당시 북한 정권에 충성심이 워낙 투철했었기에[16]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혼자 몰래 탈북하려고 했다. 새벽에 몰래 집을 나오다가 어머니한테 걸렸는데 뜻밖에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알고도 정유나를 기차역까지 바래다 주었다.[17] #

정유나는 브로커와 함께 중국 국경 근처의 기차역에서 내려 국경경비대에 뇌물을 주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간 후 다른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18] 다른 10여명의 일행과 함께 중국 대륙을 횡단하고 미얀마를 거쳐 태국으로 건너갔다. 원래는 태국 경찰에 일부러 잡히고 난민 신청을 해서 수용소에서 수개월 이상 기다리며 난민 재판을 받고 나서야 대한민국 임시 여권을 받아 한국으로 올 수가 있는데, 운이 좋게도 우연히 친절한 한국 선교사 일행을 만나 그들의 특별한 도움을 받고 남들보다 빨리 한국에 올 수 있었다고 한다. 7월 중순에 항공편을 통해 한국에 입국했다.

정유나가 북한을 떠나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당하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풀려났고, 2008년 4월 중순 아버지는 정유나를 다시 북한으로 데리고 오려고 중국으로 건너 갔다. 그러다가 결국 딸을 찾지 못하고 4일만에 북한 정권 수배에 올라 중국 공안에 체포되었는데 달리던 차에서 목숨을 걸고 뛰어내렸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다시 잡혔지만 기적적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가까스로 지인의 집으로 가서 상처를 치료하면서 대한민국 행을 결심하고 수배를 피해 새벽 시간에만 몰래 1,000km 넘게 걸어서 다롄에 도착했다. 이후 브로커가 만들어준 가짜 대한민국 여권으로 대한민국행 배를 타고 인천항에 들어와 지나가던 경찰에게 바로 자수하였다.

결과적으로 아버지는 1주일 차이로 정유나와 비슷한 시기에 대한민국으로 오게 되었다.[19] 당시 아버지는 '안기부'[20]에서 여러 고문을 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따뜻한 환대에 마음이 녹았다고 한다. 담배는 물론이고 같이 외출을 나가 양주까지 대접했다고 하는데, 당시 한국에서는 거의 정보가 없었던 특수부대의 참모장교였으므로 그에 걸맞게 대우를 해줬던 것 같다.

국정원과 하나원을 거쳐서 대한민국 국민이 된 후 정유나는 미용 기술을 배워서 수년 동안 미용사 생활을 시작했고, 아버지는 공기업 직원[21]으로 일을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로, 정유나의 아버지가 북한에 돌아올 수 없게 되자 정유나의 어머니는 브로커를 통해 홀로 탈북을 시도했지만 보위부가 이 사실을 알게 되어 탈북에 실패하고 잡히게 되었다. 한 달 동안의 고문을 버티며 끝까지 탈북 시도 사실을 시인하지 않았기에 다시 짧은 6개월 형을 받고 나서 다시 풀려났다. 이후 어머니는 더이상 혼자의 힘으로는 탈북이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중국인에게 몸값을 받고 파는 인신매매단에 자기 발로 갔었다고 한다.[22] # 이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정유나와 아버지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지인들에게도 돈까지 빌려가며 마침내 꿈에 그리던 어머니를 대한민국으로 데리고 올 수 있었다.

핵심 부대 군인으로 복무하면서 당에 충성심이 높던 정유나의 오빠는 정유나의 탈북 때문에 오지의 한직으로 밀려났다. 어머니가 전화 통화를 했을 때는 정유나를 쫓아가서 총으로 쏴죽이겠다고까지 하면서 펄펄 뛰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6개월 정도 지나니 마음이 바뀌어 탈북을 결심하고 브로커를 통해 대한민국에 들어왔으며, 이후 연세대와 해외 유학을 거쳐 현재 외국계 기업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정유나는 2017년부터 이만갑에 출연하기 시작했고 큰 인기를 얻게 된 이후 지금까지 유튜브와 여러 방송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가고 있다.

3. 여담

  • 다른 탈북자와 달리 영어 회화를 어느 정도 잘하는 편이며, 유명 투자자 짐 로저스대한민국 방문 때 통역을 맡기도 했었다. 영어를 잘하게 된 이유는 특이하게도 어렸을 때부터 북한 학교에서 스파르타식 영어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 탈북 무렵 자강도 출신 탈북민이 50명이 채 되지 않았다. 2020년 3월 기준 238명. 인구가 자강도보다 적은 옆동네 양강도 탈북민이 5,916명인 것을 감안하면 자강도 탈북민은 매우 적은 셈이다. 그래서 북한 관련 연구 기관에서 자강도 관련 연구를 할 때마다 문의 전화가 온다고 한다.
  • 간혹 유튜브 방송 중에 북한 말투가 나오기도 하는데, 신은하와 같은 갭 모에가 느껴진다. 남한에서도 인지도가 제법 있는 평안도 말투이기 때문에 독특한 어감의 함경도 말투와 달리 들으면 딱 북한 말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만갑 출연 결정에 꽤 오랜 고심을 했었다고 한다.[23]
  • 자강도의 부잣집 출신이면서도 꽃제비 생활까지 겪어 그야말로 양 극의 인생을 다 살아본 셈. #
  • 1998년 꽃제비 시절에 무리 꽃제비들로부터 보호[24]를 받고, 마지막에는 한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서 가족의 곁으로 겨우 돌아갔었는데 이때 자신을 도와준 아저씨에 대해 무척이나 감사하고 있는 중.
  • 그녀를 도와준 무리 꽃제비가 석사학위를 취득한 이성주(이형석)이 있던 꽃제비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1998년 당시에 이성주 역시 청진시 수남 장마당에 있었다고 하며, 그 무리가 7명이라는 숫자도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인데 20년도 더 된 일인 탓에 정유나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다.[25]
  • 탈북 이후 아버지와 함께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월북 제의를 받은 적이 있다. 차에 누가 권유하는 글을 붙이고 갔는데 굉장히 공포심을 느꼈다고 한다.
  • 북한에서의 본명은 정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유나의 출생 1년 전인 1987년에 영화 명령 027호를 본 어머니가 이 영화의 여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본명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
  • 탈북 직후에 한국에서 딸을 낳았으나 이만갑 출연 시점에서 딸이 완강하게 반대하여 결국엔 딸의 존재를 오랫동안 공개하지 못하고 있다가 본인과 관련한 루머에 대응하기 위해 딸의 존재를 공개했다.
  • 라이브에서 본관이 연일 정씨임을 밝혔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본관을 폐지했지만 할아버지가 정몽주 후손임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1] 2021년 본인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라왔다.[2] 대한민국· 산하의 1988년에 모두 로 일원화하였지만, 휴전선 이북에는 이것이 적용되지 않아 대한민국 관할 행정구역과 달리 읍·면 산하의 동이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3] 전천군은 전천면, 화경면, 입관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4] 가족이 모두 탈북에 성공했다.[5] 2024년 6월 24일에 유튜브에서 처음으로 밝혔다.#[6] 다만, 공식 프로필 상 158cm로 알려진 김아라보다 작아 보인다 (...) 김아라가 실제 160cm 이상일 가능성이 있다.[7] 함경북도 회령시에 있는 대학이며, 2학년으로 재학 중 탈북했다.[8] 탈북 후 재학 중.[9] 본래 개설 초창기에는 "휘파람 TV"라는 이름의 4인조 채널이었으나, 이후 정유나 본인만 남게 되면서 "한반도 공주"라는 이름을 썼다가 지금은 "정유나 TV"로 바꾸어서 활동하고 있다.[10] 북한 기준 자강도 전천군 신적로동자구[11] 김길선 기자 유튜브 참고[12] 아버지가 복무했던 스키여단에서 스키장비를 빌려와서 탔을 듯 싶다.[13] 이때가 하필 고난의 행군 시기인 데다 당시의 대한민국보다도 인프라가 열악한 당시의 북한이어서 살아난 것만 해도 천운이다.[14] 실제로 북한에서 가장 탈북이 흔한 지역이다.[15] 다만 이 당시까지는 완전하게 풀린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에서 조사 중 김정일의 사치와 향락에 대해 언급하자 "장군님에 대해 거짓중상 하지말라"며 반항하자 조사원이 말없이 김정일의 개인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가 쓴 자서전을 건내주며 읽어보라 권유받고 읽던 중 김정일의 실체에 대해 알고 난 후 세뇌에서 완전히 풀렸다고 한다.[16] 한 번은 아버지한테 일부러 남한 얘기를 살짝 꺼낸 적이 있었는데 바로 불호령을 냈다고 한다. 다만 아버지 또한 북한 정권의 충성심이 강했던 시기에도 남한 매체도 접하고, 북한과 김씨일가의 실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7] 기차역에서 어머니는 "이 나라 북한에는 비전이 없다, 우리 유나는 바윗돌 위에 놓아도 잘 살 것이다"라고 격려까지 하며 씩씩하게 정유나를 보내주었지만 이별 후 기차가 출발할 때 몰래 뒤로 훔쳐보았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땅바닥에 털석 주저앉아 망연자실했던 모습이었다고 한다. #[18] 당시 아버지가 숨겨놓았던 미화 1,200불을 몰래 가지고 나왔었다고 한다. 아직도 안 갚은 듯. #[19] 국정원 독방에 있었는데 갑자기 밖에서 딸 목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랐었다고 한다. 정유나는 다른 탈북인 친구들과 농구를 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랬었다고 한다. #[20] 북한에서는 국정원보다 안기부 시절의 이야기가 많아 안기부로 통용되고는 한다.[21] 한국도로공사 요금소 수금원. 유명세를 타기 전에는 KBS 2TV에도 나온 적이 있었다.[22] 당시 굶어죽기 직전의 북한 사람들은 차라리 중국에 팔려가는 게 낫다고 생각해 일부러 찾아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23] 의외로 북한이탈주민들이 방송 출연을 주저하거나 꺼린다고 하는데 정착을 위해 노력하느라 시간이 없는 점도 있고, 최근에는 대한민국의 방송들이 북한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진 데다 이만갑의 경우도 그 중 하나라 북에 남겨둔 가족의 안위 때문에 주저하는 이유가 있기도 하다. 다만 현재는 북한의 실상에 대해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인식이 탈북민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는 추세여서 유튜브와 같은 SNS 활동에 적극적이며 보충 설명과 같은 역할로 패널로서의 참여도 하고 있다.[24] 청진시 수남 장마당에서 보호를 받았는데 한 번은 젊은 여성이 유괴하려고 할 때 나타나서 자기들이랑 같이 다니는 아이니까 그냥 가라며 보호해주었다.[25] 다만 이성주가 자기 무리들은 여자 꽃제비들을 보면 도와주기도 했다고 한다. 단신 꽃제비들, 특히 여자들은 겨울에 얼어죽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무리에 받아들여주고 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정유나 역시 무리 꽃제비들이 자신을 무리에 받아주는 일은 결코 없었지만 멀리서 지켜보면서 위험할 때 도와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