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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 Concilium Nicaenum Primum |
현대 그리스어 | Πρώτη Σύνοδος της Νίκαιας |
영어 | First Council of Nicaea |
그 뒤 사도들의 전통을 따라, 교회는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자께서 성부와 “한 본체”이심을 고백하였다. 곧 성자께서는 성부와 함께 한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린 제2차 공의회에서는 니케아 신경에 포함된 이러한 표현을 그대로 지켜,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하느님에게서 나신 참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이신 분”이라고 고백하였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242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242항
지극히 영광되시는 우리 하느님 그리스도여,
교부들로 이 세상을 비추는 기초로 삼았고
그들을 통하여 우리 모두를 진정한 믿음으로 인도하셨다.
지극히 자애로우신 이여, 주께 영화로다.
정교회의 제1차 세계 공의회 참석 교부들 주일 찬양가 (한국 정교회 공식 번역판)[들어보기]
교부들로 이 세상을 비추는 기초로 삼았고
그들을 통하여 우리 모두를 진정한 믿음으로 인도하셨다.
지극히 자애로우신 이여, 주께 영화로다.
정교회의 제1차 세계 공의회 참석 교부들 주일 찬양가 (한국 정교회 공식 번역판)[들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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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기 325년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에서 공인된 후 소집된 최초의 보편 공의회.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아타나시우스파와 아리우스파 사이에서 교리 논쟁이 일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교리를 통일할 목적으로 자신이 거처하던 니케아로 주교들을 소집했다. 황제는 비록 교리에 무지했고 관심도 없었지만, 공의회를 열기 전부터 교회에서 서열이 높았던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기로 마음먹었고 본인이 직접 공의회를 주재했다. 황제는 교회가 서로 합의하기 원했고, 아리우스파 주교 5명을 제외한 주교 대략 313명이 찬성 서명을 했다. 이로써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선고 후 파문하였다.
또한 그때까지는 신자들이 사도전승으로 이어받아서 제대로 정립되지 않아 논란을 만들던 예수의 신적 본질과 성부 사이 관계[2]를 삼위일체론으로 정리하여 교리로 선포했다.[3]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 당시에 삼위일체론 개념은 이론적으로 매우 투박한 부분이 많았고 이후 오랜 세월에 걸쳐 거듭된 이론화 작업을 거쳐야 했다.
비록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파의 삼위일체론이 정통으로 인정되고 아리우스파가 이단으로 규정되었으나, 아리우스파 주교들은 회의가 끝나고 교구로 돌아가서 다시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전파했다. 이러한 상황은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국교화할 때 아타나시우스파를 정통으로 삼고 아리우스파에 대해 강력한 탄압을 실시하면서 전환되었다.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도들의 회의를 최초의 공의회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니케아 공의회가 최초의 보편 공의회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2. 배경
2.1. 아리우스주의의 대두
자세한 내용은 아리우스파 문서 참고하십시오.2.2. 콘스탄티누스의 주교 소집
정복자이신 최고 황제(Augustus)인 콘스탄티누스가 알렉산데르와 아리우스에게 고하는 바이오.
그대들의 근본적인 차이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충실하게 조사한 결과, 나는 그 원인이 참으로 사소한 것이며 격렬한 쟁점으로서는 너무도 부족하다는 점을 깨달았소 … 그러므로 이제 그대들은 인내심을 발휘하여 그대들과 같은 하느님의 종이 드리는 충고를 받아들여 주기 바라오.
이 충고란 다름이 아니오. 실은 이런 질문을 제기한 것도 잘못이었고, 제기된 질문에 응답한 것도 잘못이었소. 법의 권위가 아니라 논쟁의 정신에서, 즉 여가를 오용하여 심심풀이처럼 제기한 논점은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만 제한해야 하며, 대중 집회에서 서둘러 발표하거나 경솔하게 대중의 귀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될 것이오. 그토록 숭고하고 난해한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오.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II, p. 64-72, 《비잔티움 연대기》에서 간접 인용
그대들의 근본적인 차이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충실하게 조사한 결과, 나는 그 원인이 참으로 사소한 것이며 격렬한 쟁점으로서는 너무도 부족하다는 점을 깨달았소 … 그러므로 이제 그대들은 인내심을 발휘하여 그대들과 같은 하느님의 종이 드리는 충고를 받아들여 주기 바라오.
이 충고란 다름이 아니오. 실은 이런 질문을 제기한 것도 잘못이었고, 제기된 질문에 응답한 것도 잘못이었소. 법의 권위가 아니라 논쟁의 정신에서, 즉 여가를 오용하여 심심풀이처럼 제기한 논점은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만 제한해야 하며, 대중 집회에서 서둘러 발표하거나 경솔하게 대중의 귀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될 것이오. 그토록 숭고하고 난해한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오.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II, p. 64-72, 《비잔티움 연대기》에서 간접 인용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가 로마 제국 전역에 유포되면서 제국 전체가 삼위일체 논쟁으로 분분해지자 콘스탄티누스는 지역 주교들의 회의는 중단하고 대신 니케아(니체아)에서 권위있는 보편 공의회를 열어서 아리우스파와 정통파 양측이 모두 승복할 만한 판결을 내자고 했다. 이러하여 325년 6월 19일에 니케아에 있는 황제 별궁에서 교회 역사상 최초의 공의회를 소집했으니 이것이 바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이다. # 이때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는 318±2명이라고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4]
나는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소요를 전쟁이나 전투로 간주할 것입니다. 오히려 소요는 전쟁이나 전투보다도 진정시키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소요를 적대시할 것입니다.
《비잔티움 연대기》 중 콘스탄티누스의 공의회 개막 연설
《비잔티움 연대기》 중 콘스탄티누스의 공의회 개막 연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공의회의 개막식 때 개회 연설까지 맡게 되었는데, 참석한 주교들 거의 대부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 주교들이었고 황제 자신도 그리스어를 비교적 잘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공용어인 라틴어로 연설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제 막 제국을 통합시킨 입장이라 교리 문제로 제국이 분열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막고 싶어했다. 편지와 연설의 어조만 보더라도 '정확하고 합리적인 결론' 같은 것보다는 '당장 이 문제를 끝내는 것'에 관심이 컸다.[5]
당시 카이사레아의 주교 에우세비오는 황제가 공의회 개막식에 입장하는 모습을 보고 '하늘에서 하느님의 천사가 내려오는 것 같았다'고 묘사하였다. 공의회에 소집된 주교들은 그리스도교 공인 이전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극심했던 박해 때문에 한쪽 눈이 없던 주교도 있었고, 양쪽 손에 힘이 안 들어가는 주교도 있었고, 다리를 질질 끌고다니는 주교도 있었다는 사실이 공의회 교부의 기록에 등장한다. 신자들과 교부들 입장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상전벽해가 이루어진 셈이다.
3. 공의회의 쟁점과 결과
공의회의 쟁점은 주로 아리우스 논쟁이었고, 간간이 부활대축일의 날짜 계산 같은 것들이 논의되었다.
공의회는 아리우스의 새로운 주장을 물리치고, 예수와 성부가 동일본체(homoousia)라는 사도들로부터 이어져 오던 가르침을 발전시켜서 삼위일체론으로 정립하였다. 그리고 아리우스는 결국 그리스도가 성부와 성령과 똑같은 천주성(天主性)을 지녔다는 니케아 신경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여서 이단자로 결정되어 파문되었고, 그는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으로 유배를 갔다. 그는 후에 진심으로 후회하여 회개를 하게 되고 니케아 신경에 서명을 하게 된다.
그리고 부활대축일의 날짜 계산에서는 요일과는 관계없이 유대력에 따라 니산월 14일을 그리스도의 수난일로 정하고 성만찬을 했으며, 15일을 무교절로 기념하는 전통과 그 다음의 일요일을 부활절로 정하고 기념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이러한 초대교회의 진리를 부정하고 유월절을 없앤 다음 춘분 이후의 만월 다음에 오는 첫 번째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키기로 결정되었다. 여담으로 동방정교회에서는 20세기까지 율리우스력을 사용하였기에 동서방교회가 둘 다 부활절의 날짜를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과에 따라 기념함에도 그레고리오력을 사용하는 서방교회와 부활절이 차이가 난다.[6]
그리고 이 공의회는 사제 서품과 성직자의 승격 그리고 교회 위계 질서에 대한 스무 가지 규범과 니케아 신경을 채택했다.
니케아 공의회는 역사적으로 굉장히 의미가 큰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이 공의회를 통하여 콘스탄티누스는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였고 교회 전체의 통합까지 도왔다는 찬사를 들었다. 황제는 공의회로 소집된 주교들을 몇 주일 더 비티니아에 머물게 하고 자신의 즉위 20주년 기념 연회에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리스도교 사제들의 사회적 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 신부와 아리우스파의 비극적인 최후를 예고하는 시발점이기도 하였다.
앞서 언급한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오는 이 공의회에서 정통파로 돌아왔으며 이 연회에도 참석했는데, 당시의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주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황궁의 연회에 참석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연회였다. 황제의 경호관을 비롯한 여러 병사들이 검을 빼어 들고 황궁 입구를 에워싸고 있었다. 성직자들은 그 한가운데로 아무런 두려움 없이 들어갔다. 황궁의 가장 깊숙한 곳에 이르자 황제의 벗들 몇 사람이 앉아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양측에 배치된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마치 그리스도의 왕국을 미리 본 것처럼 그 장면은 현실이라기보다 꿈과 같았다.-콘스탄티누스의 생애- III, 15 |
4. 니케아 신경
위 문서 참고5. 규범
- 고자: 고자는 성직자가 될 수 있으나,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은 안 된다. (규범1)
- 개종자: 이단으로부터 개종한 자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성직품에 오를 수 있다. 신품성사 이전에 고백하지 않은 죄가 드러나면 면직된다. (규범2)
- 가족: 가정 집에 모친과 자매 외에는 어떤 의심받을 만한 여인도 함께 있을 수 없다. (규범3)
- 주교 선출: 주교는 교구에 속한 모든 주교, 최소한 주교 3명의 선임과 그외는 동의서신을 받아야 하고 최종적으로 대주교의 확인이 있어야 한다. (규범4)
- 시노드(주교회의): 주교회의는 일 년에 두 번 해야 한다. 사순시기 전과 가을 전에 개최되어야 한다. (규범5)
- 파문: 주교에 의해 파문된 자는 그 어느 주교도 복귀시킬 수 없다. 단, 무기력이나 다툼 외에 이와 비슷한 경우에 의한 파문은 제외된다. (규범5)
- 관할 구역: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는 리비아, 펜타폴리스을 관할하며, 로마 총대주교는 로마에 속한 지역을,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는 그 이외의 지역을 관할한다.
대주교의 판단에 거슬리는 주교는 주교 자격이 없다.실제 규범에는 수석 대주교의 협의 없이 주교가 된 인물에 대하여 일반적으로는 그가 주교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결정을 내린 것임을 밝히고 있다. 다만 모든 이들이 주교 선출에 합리적으로 결정하여 승인하였다면 대다수의 결정을 관철한다.(규범6)- 성직 자격: 검증 없이 신품성사를 받은 자가 이후 죄인임이 밝혀지면 면직된다. (규범9)
- 면직: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타락한 성직자는 서품을 베푼 자와 함께 면직된다. (규범10)
- 회개: 타락한 자는 관대함을 받을 만하든 못하든 12년 동안 회개해야 한다. (규범11)
- 폭력: 폭력을 참고 유혹을 물리쳤더라도 차후에 사악함에 빠졌다면 10년간 파문당한다. 그 기간 동안 회개하는 생활은 철저한 감시와 검증을 받아야 한다. (규범12)
- 영성체: 임종에 있는 자는 영성체를 받는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면 기도와 준비를 한 후에 영성체 한다. (규범13)
- 예비신자: 예비신자가 타락하면 3년 동안 다시 예비신자 준비를 한 후에 예비신자가 되어야한다. (규범14)
- 구역 이탈: 주교, 사제, 부제는 도시를 옮겨 다닐 수 없다. 계속 옮겨다니면 소속 도시로 돌려 보내져야 한다. (규범15)
- 소속 구역: 사제 혹은 부제가 소속 교회를 이탈하여 다른 교회에 받아들여졌다면, 본래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타 교구 소속인 자에게 신품성사를 소속 주교의 허락 없이 베풀어졌다면 무효가 된다. (규범16)
- 고리대금: 150%의 고리대금을 받는 자는 교회법규에 의해 파문된다. (규범17)
- 부제: 부제는 자신의 구역에만 머물러야 한다. 부제는 사제에게 성체성혈을 베풀거나, 사제보다 먼저 영성체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동석을 하지 못한다. (규범18)
- 파울루스파에서 다시 가톨릭 교회로 피신한 이들은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하며, 만약 이들 중 성직자가 있다면 이들은 다시 정당한 교회의 주교로 부터 서품을 받아야 한다. 이는 부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며, 만약 이중에서 입증되지 않은 부제에 관하여서는 평신도로 여겨야 한다(이러한 논의가 여러 이유로 여성에게 허용되었던 부제직의 직무를 남성에게 제한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규범으로 바라보기도 한다)(규범 19)
- 기도: 주일과 오순절에는 서서 기도한다. (규범20)
6. 관련 문서
[들어보기] 해당 영상 18분 12초~52초[2] 요한복음서에도 나오듯이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하느님" 같은 개념으로 제대로 정립되지 않고 내려오던지라 유일신 종교인 그리스도교에서는 큰 논란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사실 아리우스파도 이 개념을 정립하려 들다가 나온 이단설이다. 다만 아리우스파의 주장은 간단명료하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가장 극단적인 해석이라는 위험성도 있었다. 즉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구절과 '예수는 하느님'이라는 구절을 어떻게든 둘 다 받아들이려고 애를 쓰던 게 당시의 삼위일체 떡밥인데, 아리우스는 한쪽의 구절을 완전히 무시하자는 단순하면서도 극단적인 주장을 한 것이다. 이는 아리우스파가 단죄되는 원인이 되었다.[3] 사실 이후에도 네스토리우스파 논쟁, 단성론 논쟁, 단의론 논쟁 등 굵직굵직한 논쟁들이 계속 따라오지만, 이들은 엄밀히 말해 삼위일체론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론 논쟁으로 봐야 한다.[4] 이 주교들 중 아리우스 본인을 포함한 3명은 끝까지 아리우스파를 옹호하다가 파문당했다.[5] 그는 당시 보통 사람들처럼 세례성사가 원죄와 본죄와 그 벌까지 한방에 모조리 용서하는 효과가 있다는 걸 노리고 죽기 직전 337년 5월 22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세례를 받는 등 교리 자체에 큰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6] 4년마다 한 번씩 겹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