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32:27

제1차 양맥 전투

고구려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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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양맥 전투
第一次 梁貊 戰鬪
<colbgcolor=#C00D45,#032807><colcolor=white> 시기 244년 (동천왕 18년) 8월
장소 고구려, 양맥[1]
원인 공손연 멸망 이후, 고구려위(魏)의 관계 악화.
교전국 <rowcolor=black> 고구려
(공세)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고구려 군기.svg 동천왕 (고구려 국왕)
지휘관

[[위나라|
]] 관구검
병력 고구려군: 20,000명 위나라군: 10,000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사상자: 3,000여 명
결과 고구려의 승리

1. 개요2. 전개3.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고구려-위 전쟁 중 양맥에서 벌어진 첫 번째 전투로 동천왕 대인 244년 8월에 일어났다.

2. 전개

다시 병사를 이끌어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싸워, 또 이겨 3,000여 명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wiki style="text-align: right"
《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본기> 제5 동천왕}}}

244년 8월 동천왕 시기, 관구검이 10,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에 쳐들어오자 이에 맞서 20,000명의 보병과 기병을 동원해 양맥 계곡에서 위군 3,000여 명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후 맞붙은 비류수 전투에서 반대로 대패하고, 수도까지 함락당하는 굴욕을 겪게 되었다.

3. 대중매체

소설 《우리나라 삼국지》에서는 관구검이 보낸 장군 장문이 비류수에서 패배하자, 장군 허일에게 군사 10,000명을 이끌고 강을 따라 올라가서 양맥을 지나 고구려군의 후위를 공격하도록 지시한다.

허일이 양맥의 골짜기를 지날 때 고구려군의 기습을 받았고, 이에 허일이 거세게 저항하여 고구려군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3,000명의 병사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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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치는 불명으로, 현재 중국 요양시 태자하 상류 또는 중국 요녕성 번시 시에 위치한 오녀산성의 서측 혼강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