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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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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169E1> 조(趙)씨 가문 12대 종주
양자
襄子
영(嬴)
조(趙)
무휼(毋卹)
아버지 조간자(趙簡子) 조앙(趙鞅)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443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475년 ~ 기원전 443년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춘추시대 말기와 전국시대 진나라의 경(卿)이자 조씨 가문 12대 종주.

2. 생애

원래 적(翟)나라 출신 첩에게서 태어난 서자인 데다가 막내라서 후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기 조세가에 의하면 정나라 출신 관상쟁이 고포 자경(高布 子卿)이 조앙의 적자들의 관상을 봤는데 장군이 될 만한 아들은 없는 것 같다고 했는데, 지나가던 무휼을 보더니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이 아이야말로 진정 장군의 재목"이라고 지목했다. 조앙은 이 아이는 첩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라고 했으나 자경은 "하늘이 내려주신 그의 운명은 비록 천하게 태어났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필시 귀한 신분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정말 그럴까 싶었던 조앙은 아들들을 전부 불러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무휼이 가장 재능이 있었다. 얼마 뒤 조앙은 아들들을 모두 불러놓고 "내가 보물과 같은 부절을 상산(常山)에 감춰 놨다. 먼저 찾는 자에게 상을 주겠다"고 말했다. 조앙의 아들들이 말을 달려 산에 올라가 찾았으나 찾지 못했는데, 무휼은 제일 먼저 돌아오더니 대뜸 부절을 찾았다고 알렸다. 조앙이 부절을 보여달라고 하자 "상산의 꼭대기에서 대(代) 땅이 보이는데, 대나라를 도모하라는 거 아니냐"고 대답했다. 조앙은 그제서야 확신을 갖고 태자를 적자인 백로(伯魯)에서 무휼로 교체했다.

이후 기원전 475년, 조간자가 죽자 무휼이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았다. 조양자는 아버지에게 선언했던 대로 가장 먼저 대나라를 공격했다. 조양자는 하옥산(夏屋山)에서 대나라의 왕을 초대했는데, 이 자리에서 요리사 락(犖)을 시켜서 구리 국자로 대나라 왕과 일행들을 때려 죽인 뒤 군대를 대나라로 보냈고, 결국 대나라는 조양자의 손에 떨어진다.[1] 조양자는 점령한 대나라를 (자신 때문에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난) 형 백로의 아들 주(周)에게 위임하니 그가 대 성군(代成君)이다.

기원전 464년, 정나라를 공격할 때 지백이 술이 뿌리고 구타를 하며 모욕하였다. 이렇게 무휼과 지백의 악연이 시작되었다.

진나라 말엽, 지(智)·한(韓)·위(魏)씨의 세 가문과 함께 세력을 과시했는데 지씨가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려 하자 한·위와 힘을 합쳐 지씨를 멸하고, 세 가문이 함께 지씨와 공실의 영토를 나눠가져 조나라의 기틀을 마련한다.[2] 이를 삼가분진(三家分晉)이라 하는데, 흔히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구분하는 분수령 중 하나로 꼽힌다.[3] 이는 한비자 십과(十過) 편에서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다 패망하는 사례'로 꼽기도 했다.

사기 자객열전에 나오는 예양이 암살하려던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예양이 바로 조양자가 멸한 지씨를 섬겼던 인물이기 때문. 조양자는 지씨의 대부 지백과 그 후손을 멸하고 지백의 두개골에 칠을 해서 음기(飮器)로[4] 삼았다고 한다. 지백이 조양자의 근거지 진양(晉陽)[5] 땅을 포위하고 3년 동안 수공을 펼쳤는데, 결국 성 안에 양식이 떨어져 굶주린 사람들이 자식을 교환해 잡아먹었을 정도로 처참한 지경까지 몰렸으니 골수까지 원한이 맺힐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예양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한 번은 "저 사람은 자기 주인에게 충성했을 뿐"이라며 놓아주고, 두 번째 시도 때 예양이 그토록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이유를 듣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예자'라고 칭찬하고는 자신의 옷을 내 주어 예양에게 원수를 갚게 하는 퍼포먼스라도 하게 해 준 것[6]을 보면 잔인하긴 했어도 제법 배포가 큰 인물이었던 듯하다. 이건 적이었어도 자기 주인에 대해 충의를 지키는 사람은 용서한 아버지 조간자를 닮았다. 사실 지백에게 워낙 맺힌 게 많아서[7] 그렇지, 그 외에는 특별히 잔인하게 군 적도 없다. 예양도 자결하기 전에 원수인 조양자에게 자신을 신(臣)이라고 칭하며 '어진 사람'임을 인정하였다.[8][9]

사기 조세가에 의하면 조양자의 재위 기간은 33년에 달한다. 조양자에겐 아들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아까 얘기했던 조카 주를 후계자로 삼았고, 주가 자신보다 먼저 죽자 주의 아들 완(浣)에게 가절을 물려준다.[10] 이 완이 바로 조나라 헌후로 이후 조나라 군주 자리는 헌후의 후손들이 이어간다.[11]


[1] 죽은 대나라 왕의 부인은 바로 조양자의 누이였는데, 남편이 죽자 대나라에 있던 조양자의 누이는 비녀로 자기 목을 찔러 자결했다.[2] 원래 지·한·위·조 네 가문 중 지씨가 가장 세력이 강해 지백은 한·위에게 함께 조씨를 공격해서 땅을 나눠갖자고 했으나 조양자는 거점인 성에 미리 만반의 준비를 해 두고 무한방어에 들어갔다. 이후 조씨에 대한 공격이 지지부진해지자 수공으로 조씨를 위협하지만, 조양자는 지백 몰래 한씨·위씨의 종주에게 군사 장맹담을 보내 '야, 지백이 너네들 땅 강탈했을 때 나만 그거 거부했어. 그래서 지금 이렇게 싸우는 거야. 지백이 말로는 나를 몰아내고 땅을 나눠가지겠다고 하지만 진짜로 그럴 거 같음? 입 싹 닦고 지 혼자 다 처먹을 걸?' 하며 밑밥을 깔았고 이미 진양성을 수공할 때 지백이 한 말 때문에 불안해하던 한·위는 조씨와 손을 잡고 지씨를 공격하여 멸한다.[3] 나머지 두 사건은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한 사건과 전씨가 강씨를 몰아내고 제나라의 국군이 된 사건이다.[4] 「자객열전」, 〈예양〉의 주석에서는 술잔, 요걍, 술통 등등 여러 설이 나온다.[5] 태원(타이위안)[6] 예양이 옷이라도 벨 수 있게 해 달라고 조양자에게 요청하자 선뜻 자기 옷을 내 주었다. 예양은 세 번을 뛰어 조양자의 옷을 베고 자결했다.[7] 앞서 보았듯 조간자 생전에는 구타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었고 바로 위의 문단을 보면 알겠지만 지백과의 전쟁에서 막판에는 사람들이 식인을 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 이러니 화가 안 치밀어 오르는 게 이상한 일[8] 열국지에는 예양이 벤 조양자의 옷에 선혈이 묻었고 이를 보고 놀란 조양자가 이후 얼마 살지 못하고 죽었다고 나오지만 사기, 전국책 등 더 오래된 기록에는 나오지 않으므로 후대에 창작된 이야기로 보인다. 다만 청화간 계년에 의하면 조양자는 기원전 443년에 죽기 때문에 조양자가 지백이 죽은 후에도 훨씬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은 재고해볼 필요가 있어보인다.[9] 예양 문서에도 자세히 나와있지만, 사기 자객열전에서 예양과 조양자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결코 화해할 수는 없지만) 서로를 최대한 인정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10] 일단 장자승계를 고집했다간 가문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아버지가 판단했)던 게 자신이 종주가 된 가장 큰 이유였으니, 지씨를 밀어내고 안정을 찾은 지금은 다시 장자승계로 회귀하는 여유를 부린 게 아닐까 싶다. 아니면 가문을 온존할 잠재력만으로 종주 자리를 물려받은 본인에 비해 아들들의 역량이 좀 아니었을 수도 있고. 백로 외에 이복 형제들이 하나둘도 아닐 테니, 본인의 카리스마가 그 효용을 다한 시점에서 주공단처럼 적당히 빠지는 길을 택한 것.[11] 다만 헌후도 완전히 순탄하게 지위를 물려받은 건 아니고 조양자 사후, 종조부(당숙이란 말도 있음) 조환자와 다툰 끝에 당주 자리를 손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