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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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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Turnb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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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c5f><colcolor=#ffffff> 본명 조지 헨리 턴불
(George Henry Turnbull)
출생 1926년 10월 17일
사망 1992년 12월 22일 (향년 66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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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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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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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버밍엄 대학교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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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전 기업인이자, 국내에서는 현대자동차의 초기 시절 근무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2. 생애

1926년 10월 17일에 영국 코번트리에 기반을 둔 자동차 제조사인 스탠더드 모터 컴퍼니 작업 매니저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살 때 그래머 스쿨을 중퇴하고 스탠다드 사에서 6년간의 자동차 공학 디자인 견습 기간을 가졌다. 이후 회사의 지원으로 버밍엄 대학교에서 공학 학사를 따냈다. 이후 1950년에 결혼해 슬하에 3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후 자신을 채용한 스탠다드 모터 컴퍼니에서 기술 책임자의 개인 조수로 경력을 쌓기 시작했으며, 1955년부터 1956년까지는 엔진 제조업체였던 페터스(Petters) 사[1]의 작업 관리자로 잠시 근무하다 1959년부터 1962년까지 다시 스탠다드 사에서 부장(General Manager)급 직위에 올랐다. 이후 레일랜드가 이 회사를 인수한 후에도 당시 레일랜드 회장인 도널드 스톡스의 지지를 받아 계속 근무하였다.

1968년브리티시 레일랜드의 이사진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나이 41세로 이사진 들 중 최연소였다. 오스틴-모리스 사업부의 상무이사로 1973년까지 재직했으며, 이 시기의 BL공사는 계열사들 중 만년 적자였던 오스틴-모리스 사업부가 1973년에 흑자전환을 하며 BL공사의 수익 중 절반을 만들어낼 정도로 전신인 브리티시 모터 코퍼레이션 후반 시절부터 시작된 제품 개발 및 생산 기술에 대한 10년간의 불충분한 투자에서 그나마 수확을 거두었던 시기였고, 모리스 마리나오스틴 알레그로가 이 시기에 개발되었다. 하지만 회사 경영에 대해서는 도널드 스톡스 당시 BL공사 회장과의 견해 차를 보였고, 그의 경쟁자였던 존 바버가 기존 도널드 스톡스 회장의 자리를 이어받은지 5개월 후에 사임하게 되었다.[2]
현대차 부사장 시절을 담은 다큐멘터리[3]

이후 1974년 3월에 현대자동차의 부사장 겸 이사로 선임되었다고 알려졌으며, 4월부터 근무를 시작했다고 언급되었다.# 이후 1977년까지 3년 동안 근무하였다. 따지면 현대자동차그룹 역사 속 1호 영입 인재였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 과정에서 정세영 당시 사장이 코벤트리 자택에 이수천 이사를 두 번씩 보내 현대에 대해 설명했고, 비행기 일등석까지 쥐어주며 조선소와 자동차 생산공장을 보여 준 후 '현대차는 손대지 않은 원석과 같다'며 부사장직을 제안했고, 이에 응해 5명의 정예 엔지니어를 데리고 왔다는 일화가 있다. [4] 이를 두고 BL공사에서는 '큰 인재를 잃었다'며 안타까워했다는 후문이 있다.

또한, 한국에 올 때 모리스 마리나 세단 및 쿠페 각각 1대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후 해당 차량들은 현대자동차 최초의 고유 모델인 현대 포니 개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1977년에 계약 기간이 만료되자 한국을 떠났다.

한국을 떠난 후에는 국유화로 인해 많은 병크를 저지르고 어려움을 겪던 BL 공사나 이들과 영국 정부가 만든 독립 기관인 '영국 국영 기업 위원회'(British National Enterprise Board) 인사로 내정될 것으로 관측했으나, 1977년 9월에 이란 내셔널에 합류한 후 힐만 헌터를 기반으로 한 승용차인 이란 코드로 파이칸의 현지 생산률을 높히고 산업의 발전을 육성하는 직책을 담당했다. 이때 힐만 헌터를 개발한 루츠 그룹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에서 PSA 그룹으로 매각되자 헌터의 지적재산권이 이란 내셔널로 넘어가고, 생산 설비도 기존의 아일랜드에서 이란으로 옮겨서 엔진 및 변속기의 현지생산을 시작할 수 있었다. 또한 턴불은 이란에서도 한국처럼 자체적인 자동차 산업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으나 이란 혁명으로 인해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집권, 이란이 극단적인 제정일치 국가로 변해가고 이란 내셔널도 국유화되며 조지 턴불은 이란을 떠났다.

이후 영국으로 돌아온 1979년탈보 영국 지사의 회장으로 복귀했으며 힐만 임프탈보 선빔, 탈보 어벤저가 제조되던 렌프루셔 지역의 린우드 공장 폐쇄를 담당했다.# 대신 코번트리의 라이튼(Ryton) 공장을 포함한 탈보 소속의 영국 내 나머지 시설들의 신차생산 및 개발 포트폴리오를 정착시키고자 했으며, 1984년까지 PSA 그룹 계열에 남아 있으면서 자동차 제조업자 협회의 회장을 1982년부터 담당했다. 탈보를 떠난 뒤에는 1984년부터 수입차 전문 딜러망을 운영하던 인치케이프 투자 회사에 회장 겸 최고 경영자가 되어 1991년까지 근무한 후 업계에서 은퇴했다. 해당 회사는 토요타 차량의 영국 수입을 담당했으며, 일본의 자동차 제조사들이 영국에 공장을 지을 수 있도록 설득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 12월에 별세했다.#

1990년에는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3. 여담

  • 그의 형제인 조셉 턴불(John Bartholomew Joseph Turnbull) 역시 자동차 디자이너였다고 한다.
  • 생애가 리 아이아코카와 비슷한데, 기존 회사에서 짤린 후 다른 회사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턴불이 있었던 현대자동차는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위용을 떨치고 있지만, 아이아코카가 있었던 지금의 크라이슬러는...

4. 참고자료


[1] 고정식으로 설치하여 사용하는 내연기관 엔진인 정치 기관(Stationary engine)을 전문적으로 만들던 회사로, 1896년부터 휘발유나 디젤로 동작하는 정치 기관을 생산했다. 1984년에 리스터와 합병하여 리스터 페터(Lister Petter Co. Ltd)를 결성했으며 2023년 기준 슬리먼 앤 호큰(Sleeman and Hawken Limited)의 계열사로 존속하고 있다.[2] 존 바버가 도널드 스톡스의 후임으로 내정될 당시, 턴불은 BL공사 트럭 및 버스 부서 직책을 받았다. 턴불은 브리티시 레일랜드가 대량생산 대중차 기업으로 성장하기를 바랬고, 전신인 브리티시 모터 코퍼레이션 시절을 따라 최고경영진들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된 경영방침을 브리티시 레일랜드라는 대규모 기업에 적용하면 오히려 윗선에서 하위 조직들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이유로 회사의 탈집중화와 계열사 간 자율성 부여를 외쳐 당시 브리티시 레일랜드의 회장이자 턴불을 기용한 상사 도널드 스톡스와 대립하곤 했다. 결국 도널드 스톡스는 조지 턴불의 경쟁상대이자 영국 포드 출신으로서 회사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키면서 영국 포드 같은 경쟁사들 대비 판매량으로의 정면돌파가 불가능함을 받아들이고, 대신 각 제품들의 고급화를 감행해 대당 마진을 키우자고 주장한 존 바버를 자신의 후임으로 선택했다. 조지 턴불은 이 상황을 회고하면서 장기적으로는 자신이 BL공사의 최고경영자가 될 기회가 있었을지 몰라도 보다 빠른 시기에 최고경영자를 맡고 싶었다면서 실망감을 표출했고, 모든 사항들을 본사에서 제어하려고 하는 중앙집권식 회사 경영에 대해서도 오스틴-모리스 사업부를 경영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방식이었음을 몸소 겪었으며 애초에 효과를 볼 수 없는 구성이자 포드에서는 중앙집권식이 통했을지 몰라도 포드와 BL공사는 전혀 다른 부류라고 평했다.##[3] 영상 속에 70년대 한국의 모습이 나오는데, 군사정권 시절 답게 공장 경비원들이 턴불의 차량에 거수경례를 올려 붙이고, 턴불이 돼지머리 제사상에 고사를 지내는 모습을 공장관계자들이 지켜보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마지막에는 요정에서 여자들 끼고 술을 먹는다.[4] 이 5명의 인물은 차체 디자인을 담당하는 케네스 바넷, 엔지니어 존 심슨과 에드워드 채프먼, 섀시 엔지니어 존 크로스트와이트, 수석 개발 엔지니어 피터 슬레이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