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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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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미합중국 제63-77대 연방 상원의원
조지 W. 노리스
George W. Norris
파일:NORRIS,_GEORGE_W._SENATOR_LCCN2016856728_(cropped).jpg
본명 조지 윌리엄 노리스
George William Norris
출생 1861년 7월 11일
미국 오하이오 샌더스키 카운티 요크 타운십
사망 1944년 9월 2일 (향년 83세)
미국 네브래스카 맥쿡
재임기간 연방하원의원(네브래스카 5구)
1903년 3월 4일 ~ 1913년 3월 3일
연방상원의원(네브래스카 클래스 2)
1913년 3월 4일 ~ 1943년 1월 3일
학력 볼드윈 대학교[1] (수료)
북인디애나 보통학교[2] (법학사)
선수 5 (하원)
5 (상원)
대수 58, 59, 60, 61, 62 (하원)
63, 66, 69, 72, 75 (상원)
정당

(1902~1936)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36~1944)
가족 천시 노리스 (아버지)
메리 "무크" 노리스 (어머니)
배우자 플러마 래실리[3]
엘리 레오나드[4]
자녀 거트루드 노리스 (장녀)
헤이즐 노리스 (차녀)
메리엄 노리스 (삼녀)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하원의원2.3. 상원의원
3. 소속 정당4. 여담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정치인. 1900년대 초부터 1940년대 초까지 40여 년의 기간 동안 네브래스카에서 의원직을 지낸 유명 정치인으로, 공화당 소속임에도 윌리엄 보라와 함께 뉴딜 정책을 적극 지지하면서 로버트 M. 라폴레트의 뒤를 잇는 중서부의 유력 진보주의농본주의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또한, 한국의 독립운동에도 여러 도움을 준 점 때문에 대표적인 외국인 독립운동가로서 건국훈장 애족장 등을 수훈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1861년 7월 11일, 오하이오주 클라이드 인근의 작은 마을인 요크에서 스코틀랜드계-아일랜드계-네덜란드계 혼혈 극빈층 가정의 11번째 자식으로 출생했다. 노리스가 4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죽었고 불과 1달 뒤 맏형이 남북 전쟁 종전을 불과 몇 달 남겨두고 전사하는 불운을 겪었으며, 이는 그가 생애 내내 빈자들을 위한 정책을 내세우는 데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게 된 그는 어머니와 형제들의 도움을 받고 본인 또한 겨울 학기엔 공부를 하면서 여름 학기엔 농장에서 일하고 조수로 근무하는 등 학비를 열심히 던 덕분에 고향 근처에 위치한 볼드윈 대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고, 특히 토론에서 두각을 드러냈기에 법학을 공부해 정계로 진출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에 가족들로부터 독립해 오하이오의 옆 주인 인디애나로 이주, 그곳에 위치한 사립대학인 북인디애나 보통학교에서 1883년 법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졸업 선물로 어머니에게서 네브래스카에 위치한 80에이커의 토지를 받고 누나에게 300달러의 돈을 빌린 노리스는 더 큰 꿈을 위해 1885년 네브래스카 게이지 카운티의 소도시인 비어트리스로 이주했으며, 1890년엔 비버 시티로 이주해 수년간 도시 검사를 역임하다가 1899년 첫 부인인 플러마 래실리와 결혼, 그대로 가족들과 함께 더 큰 도시인 맥쿡으로 최종적으로 이주했다.

맥쿡으로 이주한 그는 판사로 일하면서 강도 귀족들이 농부들에게 돈을 빌려준 뒤 이를 갚지 못하면 토지를 압류해 무일푼으로 쫓아내는 일이 너무나도 많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아 농부들에게 그들이 잃어버린 토지를 합법적으로 되찾아줄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실감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첫 정치 경력으로 하원의원이 되는 것을 선택했다.

2.2. 하원의원

노리스는 하원의원이 되기 위해 자신의 원래 의도를 철저히 숨겼고, 대표적인 강도 귀족 집단인 철도 업계의 후원을 받아 네브래스카 5구에서 아슬아슬하게 선출되었으며 이후 1904년에도 철도 업계의 도움을 받아 재선에 성공해 여러 친기업적 정책 실시에 협력하는 척했다.

하지만 자신의 기반이 철도 업계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자립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히 굳혀졌다 판단한 1906년 돌연 철도 업계와의 더 이상의 협력은 없을 것임을 선포하고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손을 잡아 3선에 성공하는 돌풍을 일으키며, 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아직 유지하고 있던 전직 인민당 출신의 민주당 진보파 정치인들과 협조해 테네시강을 이용하던 수운업자 등에 대한 다양한 반규제 입법 도입과 농본주의적 정책을 실시했고 1908년에는 4선에도 성공했다.

이후,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후임 대통령으로 취임한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이전까지의 다양한 진보주의 정책들을 폐기하고 보수주의 노선으로 돌아서자, 태프트의 정책수행에 적극 협력하는 하원의장 조셉 거니 캐넌 및 공화당 보수파의 행보에 격분한 노리스는 하원 중진으로서 진보파들을 끌어모아 보수파의 어떠한 정책 수행도 거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출범한 지 2년도 채 지나지 않은 태프트 행정부가 갑자기 레임덕에 빠져들 위기에 처하자, 당황한 공화당 보수파는 진보파와의 타협에 나섰고 이를 통해 하원의장의 독재적 권한을 혁파하고 당내 협치를 강제하도록 만드는 일련의 하원 개혁들이 통과되었다.

이후 자신과 마찬가지로 공화당 진보파 출신의 거물인 로버트 M. 라폴레트가 태프트에게 반대하는 공화당 진보파 코커스인 국민진보공화연맹(National Progressive Republican League)을 창설하자 곧바로 합류했고, 19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라폴레트가 출마할 기미를 보이자 그를 지지했다.

하지만 공화당 경선에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재출마를 선언하자 라폴레트에 대한 지지를 포기하고 더 유력한 후보로 점쳐졌던 루스벨트를 지지하는 쪽으로 선회했는데, 이후 경선에서 탈락한 루스벨트가 불복 이후 진보당을 창당하자 이번에는 루스벨트를 배신하는 박쥐같은 행보를 보였고(...) 공화당 보수파와의 타협 하에 단일후보로 네브래스카 상원의원직에 출마하는 쪽을 선택, 이는 노리스 본인은 당선되었지만 진보당에 합류한 동료들은 네브래스카를 비롯한 중서부 일대에서 패배를 겪는 결과로 이어졌다.

2.3. 상원의원

2.3.1. 우드로 윌슨 행정부

이미 하원에서 5선을 하면서 경력을 쌓았기에 초선 상원의원인데도 진보파의 중진으로 취급받게 된 노리스는 윌리엄 보라로버트 M. 라폴레트의 상원 직선제[5]를 지지했고 수정헌법 제17조가 1913년에 비준되면서 상원에서의 첫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상원 내의 사법위원회 및 농업·영양·입업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주로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통과시켰던 각종 환경보존 정책들의 유지와 중서부 빈농들에 대한 지원 분야에서 활동했던 그는 우드로 윌슨을 상대로도 그가 적어도 공화당 출신 대통령들에 비해선 진보적임을 순순히 인정하면서 정책수행에 협력했는데, 확고한 평화주의적 고립주의자로서 윌슨 행정부가 중남미의 여러 국가들을 침략하는 것은 다른 공화당 진보파와 마찬가지로 영 좋지 않게 보았지만 적어도 1차대전에 끝까지 개입하지 않으려 드는 태도엔 호감을 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밀월관계는 1917년 대독선전포고안이 통과되면서 깨지고 말았다. 유럽을 말아먹을 기세로 싸워대는 협상국과 동맹국 진영에 대해 "양쪽 모두에서 잔인함과 비인간성의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며 강하게 규탄한 그는 우드로 윌슨이 1차대전에 참전하기로 결정하자 이를 월 스트리트와 런던의 금융가들만 배불려주는 꼴이라고 매우 큰 실망을 보이며 윌슨 행정부에 대한 더 이상의 지지를 포기했으며, 곧바로 비타협파에 합류해 미국의 대규모 전쟁 수행과 베르사유 조약의 체결 및 국제연맹 가입을 끝까지 저지하려 시도했다.

2.3.2. 광란의 20년대

전쟁이 끝난 후, 광란의 20년대가 찾아오자 노리스는 공화당에서 연이어 집권한 워런 G. 하딩캘빈 쿨리지에 대해 전혀 호감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공화당 보수파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생각한 그는 19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선 대놓고 로버트 M. 라폴레트의 지지를 선언하며 선거유세를 도왔고 192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앨 스미스가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자 당시까지 중도개혁적 후보로 알려졌던 허버트 후버가 생각보다 무능한 후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후버에 대한 지지를 포기하고 스미스를 지지하고 나섰는데, 대선 결과 후버가 대승을 거두면서 욕을 먹어야 했지만 단 1년만에 대공황이 터지면서 이는 선견지명이었음이 드러났다.

연방정부의 여러 테네시강 유역 개발 정책들을 원내에서 통과시켜도 허버트 후버가 번번히 거부권을 행사하자, 후버를 농민과 의회, 더 나아가서 국민의 적이라고 여긴 노리스는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금주법에 대해 정반대의 태도를 보임에도 지지했으며,[6] 민주당의 협력을 얻어 대통령의 레임덕을 최소화하기 위한 수정헌법 제20조를 성공적으로 비준하고 당시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던 피오렐로 라과디아와 함께 비폭력 노사분규에 대한 법원의 금지명령 권한을 축소하는 노리스-라과디아 법안을 통과시키는 성과를 얻었다.

2.3.3.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의 출범 이후 자신이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테네시강 유역 개발이 실시되자, 심적으로 민주당에 더욱 가까워진 노리스는 자신이 보기에 헌법을 위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 반린치법을 제외한 대부분의 법안에 찬성표를 던지고 연방 차원의 투표세 금지 시도에도 협력했다. 또한, 1931년에 호주를 여행할 당시 퀸즐랜드의 단원제 개혁에 관심을 가진 그는 연방의회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각 주의회들이 굳이 상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주의회 단원제 개혁 운동을 펼쳤으며, 그 결과 네브래스카의 주의회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단원제와 결선투표제를 채택한 의회가 되었다.

이후 적극적으로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TVA)를 후원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딴 댐과 신도시가 테네시에 건설되는 등 여러 성과를 거두자, 원내에서 '뉴딜의 수호자'로 명성을 얻은 노리스는 다음 목표로 교외전력화법(REA)의 도입을 적극 추진해 도시뿐만이 아닌 미국의 모든 국민이 전기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했다.

대중의 힘과 지혜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이는 문명의 진보에서 나온다고 믿은 노리스는 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경선 과정에서 공화당의 보수화가 더욱 진행된 모습이 나타나면서 더 이상 공화당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판단하고 곧바로 탈당을 선언했으며, 탈당하자마자 민주당에게 의장직을 맡아달라며 러브콜을 받았지만 이를 정중히 거절하고 상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지원을 받는 수준으로 갈음했다.

1937년 루스벨트 행정부 2기가 시작된 뒤에도 코트 패킹 사건 같이 명백히 선을 넘었다 여겨진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민주당과 대체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고립주의적 성향 때문에 루스벨트가 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들을 지원하는 쪽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는 공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8월 28일 상하이 전투에서 폭격을 맞은 기차역에서 화상을 입은 아이가 주저앉아 울고 있는 한 장의 사진인 '피비린내 나는 토요일(Bloody Saturday)'을 접하면서 정반대로 바뀌었는데, 일본군의 반인륜적 전쟁범죄 행위에 큰 충격을 받은 노리스는 곧바로 고립주의를 포기하고 인권을 지키기 위해 중일전쟁에 개입해야 한다 주장했다.

이후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고 대일 및 대독선전포고안이 상정되자 당연히 찬성표를 던졌고, 이는 그가 원내에서 벌인 거의 마지막 활동이 되었다. 1942년 6선째에 출마한 그는 이전과 달리 자신의 몸상태가 많이 나빠졌다는 것을 깨닫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감했으며, 선거유세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공화당 보수파의 정치인인 케네스 S. 웨리(Kenneth S. Wherry)에게 의원직을 내준 뒤 미련없이 낙향해 1년 정도를 더 살다가 1944년 병사했다.

사후 1년이 지난 1945년 그의 자서전인 '투쟁하는 자유주의자(Fighting Liberal)'가 출간되었고, 이 책은 후대의 많은 진보주의자 및 좌익 포퓰리스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3.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02 - 1936 입당
정계 입문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36 - 1944 탈당
사망

4. 여담

  • 현역으로 활동할 당시엔 양당을 넘나드는 탁월한 협치 능력으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전기에선 그를 '원내 조정의 달인(master of parliamentary maneuvering)'이라고 평가했다.
  • 뉴딜 정책에 매우 적극적으로 찬동했기 때문에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매우 좋아하는 정치인이었다. 1936년 탈당하기 전까지 라이벌 정당인 공화당 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민주당원 중의 민주당원(Democrat of Democrats)'이라는 찬사를 남겼을 정도.
  • 1955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5명의 상원의원'을 선정하기 위해 존 F. 케네디가 주도하는 상원의원회가 출범했을 당시 가장 먼저 물망에 올랐지만, 당시 네브래스카의 공화당 보수파 상원의원이었던 로먼 흐루스카(Roman Hruska)와 칼 커티스(Carl Curtis)가 훼방을 놓으면서 결국 선정되는 데엔 실패했고 최종적으로 대니얼 웹스터, 로버트 A. 태프트, 로버트 M. 라폴레트, 존 C. 칼훈, 헨리 클레이가 선정되었다. 하지만 케네디는 그를 공식적인 선정 결과와는 별개로 자신이 가장 위대한 상원의원으로 선정한 '용감한 8인'의 목록에 올렸고, 1961년엔 출생 100주년을 기념해 미국우정공사에서 기념우표를 발행하고 네브래스카 주의회에서 '명예의 전당'의 첫 번째 인물로 선정하는 영예를 누렸다.
  • 대표적인 친한파 정치인이었다. 3.1 운동 직후인 1919년 7월 1일 상원에서 일제의 한국 침략을 중단하라고 촉구하는 연설을 하고 일제의 식민통치 실상을 기록한 증거물을 의회에 제출하는 등 한국의 독립 열망과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미국 의회의 주요 의제로 부각하는데 이바지했으며, 우드로 윌슨 행정부의 국제연맹 가입 반대 이유에도 일제의 한국 및 중국 침략을 자동으로 승인하는 꼴이 될 것이라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또한 이승만서재필이 설립한 한국친우회의 미국측 부총재직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워싱턴 회의에 이승만이 참석할 수 있도록 다양한 도움을 주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는 등 독립운동을 매우 적극적으로 지원했기에 2016년 5월 9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했다.*
  • 노리스가 죽은 지 한 달 뒤에 건조된 리버티선 중 2388호가 그를 기리기 위해 SS 조지 W. 노리스로 명명되었다.


[1] 현 볼드윈 월리스 대학교.[2] 현 발파라이소 대학교.[3] 1889년 결혼, 1901년 사별.[4] 1903년 결혼.[5] 당시까진 상원의원들이 주민들이 아닌 주의회의 간접선거를 통해 선출되었고, 이는 19세기 말~20세기 초 상원의 부정부패와 보수화에 일조했다.[6] 루스벨트는 금주법의 폐지를 최우선 공약으로 내건 반면, 노리스는 금주법의 시행에 가장 적극적으로 협력한 의원에 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