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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연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조태연
趙台衍 | Cho, Tae-yeon
파일:독립운동가 조태연.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5년 5월 15일
경상도 상주목 장천면 신평리
(현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운평리[1] 신평마을 306번지)
사망 1945년 4월 1일[2] (향년 49세)
만주국
본관 풍양 조씨[3]
초명 조학연(趙學衍)
창씨명 토요카와 야스나가(豊川泰永)[4]
취삼(聚三)
낙재(樂齋)
학력 와세다대학 (학사)
가족 배우자 강봉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434호
상훈 2005년 대통령표창 추서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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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처음 이름은 조학연(趙學衍), 자는 취삼(聚三), 호는 낙재(樂齋)이다.

2. 생애

1895년 5월 15일 경상도 상주목 장천면 신평리(현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운평리 신평마을 306번지)에서 아버지 정운(精雲) 조남욱(趙南昱, 1873.10.2. ~ 1958.1.27.)[5]과 어머니 인천 채씨(仁川 蔡氏, 1871.10.4. ~ 1915.2.20.)[6] 사이에서 8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3월 경기도 경성부 경성고등보통학교 임시교원양성소 내에서 교사 및 학생들 130여 명이 계원으로 활동하던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契)에 가입하여 물산장려운동을 통한 국권회복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1917년 3월 5일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나 이후 풀려났다.

1919년 6월 중화민국 펑톈성 둥볜다오(東邊道) 류허현 제3구(第三區) 구산쯔가(孤山子街) 부근의 허둥(河東) 다두쯔(大肚子)[7]에 있던 신흥무관학교에서 파견된 최재화(崔載華)·배승환(裵昇煥)으로부터 신흥무관학교에 학생으로 입학할 것을 권유받았다. 이에 25촌 지간의 족질(族姪)인 조성돈과 조성돈의 아내 쪽 집안 처남뻘인 유우국 등과 함께 권유에 응하여 같은 해 7월 펑톈성 안둥현[8]에 이르렀다. 여기서 상하이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행선지를 바꿔 망명 계획을 세웠으나, 도중에 병 기운이 있어 9월에 다시 조태연과 함께 경기도 경성부로 돌아왔다.

1920년 4월 조선노동공제회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고 조선인의 실력을 양성하는 데 앞장서던 중, 1년 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을 시도한 정황이 일본 제국 경찰에 발각되어 1920년 9월 말 체포되었다. 1920년 12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대구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고[9], 1921년 2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10] 곧 출옥하였다.[11]

1921년 3월 조선노동공제회 정기총회에서 대표자 61명 중 1인으로 선출되는 등 노동운동에 종사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을 졸업하였고, 이후 만주국으로 망명하여 1945년 4월 1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2005년 8월 15일 광복절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묘는 2006년 11월 2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3. 여담

  • 더불어민주당 소속 정치인 조원희는 8촌 삼종손(三從孫)으로, 조원희의 조부 조욱연(趙郁衍, 1918.11.4. ~ 1991.4.10.)과는 6촌 재종형제간이다.

[1] 인근의 승곡리와 함께 풍양 조씨 집성촌이다.[2] 음력 2월 19일[3] 전직공계(殿直公系)-호군공파(護軍公派)-부사공파(府使公派) 27세 연(衍) 항렬.[4] 1921년 2월 22일 대구지방법원 수형인명부[5] 자는 한익(漢益).[6] 채정진(蔡鼎鎭)의 딸이다.[7]중국 지린성 퉁화시 류허현 구산쯔진(孤山子鎭) 다두쯔촌(大肚子村).[8]중국 랴오닝성 단둥시[9] 1920년 12월 20일 대구지방법원 예심 형사사건부[10] 1921년 2월 22일 대구지방법원 수형인명부[11] 1921년 2월 22일 대구지방법원 집행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