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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돈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조성돈
趙誠惇[1] | Cho, Sung-don
파일:독립운동가 조성돈.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6년 음력 2월 7일[2]
안동부 상주군 내남면 도상리
(현 경상북도 상주시 인평동[3] 도상마을 130번지)[4]
사망 음력 1945년 12월 13일[5] (향년 49세)
경상북도 상주군 (현 상주시)
본관 풍양 조씨[6]
이명 조성민(趙誠敏)
가족 배우자 유풍우[7]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362호
상훈 1998년 대통령표창 추서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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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조성민(趙誠敏)이라고도 한다.

2. 생애

1896년 음력 2월 7일 안동부 상주군 내남면 도상리(현 경상북도 상주시 인평동 도상마을 130번지)에서 아버지 조대연(趙大衍, 1879. ~ ?)[8]과 어머니 영천 이씨[9] 사이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큰아버지 조항연(趙恒衍, 1860. ~ 1886.6.11.)[10]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친아버지 조대연은 1894년(고종 31) 식년 진사시에 3등 949위로 입격하여 순종 때 장례원 제사보(掌禮院典祀補)로 한 달간 근무하였고[11], 양아버지 조항연은 1885년(고종 22) 식년 생원시에 3등 54위로 입격하였다. 조부 조남식(趙南軾, 1845. ~ 1920.7.10.)[12]은 1865년(고종 2) 식년 진사시에 2등 9위로 입격하였으며 1873년(고종 10) 식년 문과에 병과 32위로 급제하였고, 1886년(고종 23) 중시(重試) 문과에 을과 2위로 급제한 인물로, 고종 때 벼슬이 사간원 대사간에까지 올랐다. 친증조부 조준구(趙駿九, 1823. ~ 1902.12.22.)[13]음서[14] 경주부윤에까지 올랐다. 외조부 죽파(竹坡) 이장섭(李章燮, 1854. ~ ?)[15]은 1888년(고종 25) 식년 문과에 갑과 2위로 급제하여 벼슬이 부사과(副司果)에까지 올랐다. 친외증조부 금악(錦嶽) 이철재(李澈在, 1834.1.28. ~ 1890.9.23.)[16][17]와 외고조부 모암(募巖) 이노구(李魯求, 1786.12.2. ~ 1870.10.22.)는 모두 선공감 가감역관(繕工監假監役官)을 지내는 등 친가와 외가 모두 꾸준히 과거나 음서 등으로 관직에 진출하던 문벌 가문이었다.

1919년 6월 중화민국 펑톈성 둥볜다오(東邊道) 류허현 제3구(第三區) 구산쯔가(孤山子街) 부근의 허둥(河東) 다두쯔(大肚子)[18]에 있던 신흥무관학교에서 파견된 최재화(崔載華)·배승환(裵昇煥)으로부터 신흥무관학교에 학생으로 입학할 것을 권유받았다. 이에 25촌 지간의 족숙(族叔)인 조태연, 아내 쪽 집안 처남뻘인 유우국 등과 함께 권유에 응하여 같은 해 7월 펑톈성 안둥현[19]에 이르렀다. 여기서 상하이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행선지를 바꿔 망명 계획을 세웠으나, 도중에 병 기운이 있어 9월에 다시 조태연과 함께 경기도 경성부로 돌아왔다.

1920년 4월 조선노동공제회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고 조선인의 실력을 양성하는 데 앞장서던 중, 1년 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을 시도한 정황이 일본 제국 경찰에 발각되어 1920년 9월 말 체포되었다. 이후 1920년 10월 9일[20] 기소중지불기소처분을 받았다.[21] 그러나 다시 수감되었고, 1920년 12월 20일 대구지방법원의 예심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대구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다.[22] 그리고 1921년 2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23] 곧 출옥하였다.

1921년 3월 조선노동공제회 정기총회에서 대표자 61명 중 1인으로 선출되는 등 노동운동을 계속하였다. 음력 1945년 12월 13일 경상북도 상주군에서 사망했다.

1998년 8월 15일 광복절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묘는 본래 상주시 화개동 뒷산에 있었으나 2006년 11월 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3. 여담


[1] 1921년 2월 22일 대구지방법원 수형인명부, 1920년 10월 9일 대구지방법원 형사사건부(2), 1921년 2월 22일 형사사건부에는 조성순(趙誠淳)으로 오기되어 있다. 이는 惇(도타울 돈)을 淳(순박할 순)으로 잘못 쓴 것이다.[2] 양력 3월 20일[3] 독립유공자 조월연은 인평동 월평마을 출신이다.[4] 1920년 10월 6일 대구지방법원 형사사건부[5] 양력 1946년 1월 15일[6] 전직공계(殿直公系)-호군공파(護軍公派)-부사공파(府使公派) 28세 성(誠) 항렬.[7] 디지털상주문화대전에는 배우자가 유옥희(兪玉姬)로 기록되어 있다.[8] 자는 성수(聖數).[9] 죽파(竹坡) 이장섭(李章燮, 1854.6.4. ~ 1907.11.12.)의 차녀이다.[10] 자는 성순(聖舜).[11] #[12] 초명은 조횡(趙鑅), 자는 계의(啓宜).[13] 초명은 조기준(趙起駿), 자는 여관(驪寬).[14] 조부 조남식이 조준구의 형 조기문(趙起文, 1814 ~ 1842.6.11.)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므로 조기문은 조성돈에게 양증조부가 된다.[15] 초명은 이장기(李章夔), 자는 이일(理一).[16] 자는 계순(季淳).[17] 외조부 이장섭이 이철재의 큰형 이연재(李淵在, 1817.12.23. ~ 1856.5.11.)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므로 이연재는 조성돈에게 양외증조부가 된다.[18]중국 지린성 퉁화시 류허현 구산쯔진(孤山子鎭) 다두쯔촌(大肚子村).[19]중국 랴오닝성 단둥시[20] 1920년 10월 6일 대구지방법원 형사사건부에는 1920년 10월 6일로 되어 있다.[21] 1920년 10월 9일 대구지방법원 형사사건부, 1920년 10월 9일 대구지방법원 형사사건부(2)[22] 1921년 2월 22일 형사사건부[23] 1921년 2월 22일 대구지방법원 집행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