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영천이씨(永川李氏)는 경상북도 영천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2. 시조
시조는 고려의 평장사 문한(文漢)이며, 그의 후손 중 고려무신정권 시 대장군 이극인(李克仁)이 1202년(신종 5) 경주의 별초군(別抄軍)이 운문(雲門)의 반란군 및 부인사(符仁寺)·동화사(桐華寺)의 승도들과 함께 영주(永州)[1]를 침탈하였을 때 관직에 있지 않으면서 이를 물리쳤는데, 이 공로로 관직에 나아갔다. 그 뒤 장군에 올랐으며, 1217년(고종 4)에는 전군 병마사(前軍兵馬使) 김취려(金就礪)의 지휘 하에 정주(定州)에 주둔하여 거란 유종(契丹遺種)의 침입을 방어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1224년에 대장군으로서 상장군 최유공(崔愈恭), 장군 김계봉(金季鳳) 등과 더불어 당시의 집권자인 최우(崔瑀)를 죽이려다 실패하고 죽임을 당하였다.3. 파
크게 4개의 파가 있으며, 장파(長派)인 서승공파(포은 정몽주의 외조부), 이극인을 중시조로 하는 대장군파, 수춘을 중시조로 하는 상장군파, 세화를 중시조로 하는 상서공파가 있다.3.1. 영동정공파
현재 영동정공파로 불리는 파는 한때 (박(磚, 벽돌전, '박'으로 읽는다)을 시조로 하는 또다른 영천이씨라고 주장하였으나. 이는 휘 박의 상계에 대한 정보미상으로 인한 것으로, 2004년 영동정공파 총회에서 족보표기는 그대로 휘 박을 1세로 하되 중앙종회의 명칭은 쓰지 않는 것으로 의결하였다. 또한 2005년에도 한국성씨 총연합회 산하 종중분쟁 조정위원회에서 추가로 쌍방이 시조별립 여부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를 한 결과도, '시조는 한 분이며 영동정공파는 영천이씨의 한 분파로 수록하기로 한다'고 '쌍방이 완전히 합의'하고 그 결과에 따라 한국성씨총감에는 한 파로 수록하였다.3.2. 서승공파
장파인 서승공파 가첩에 시조 문한 공의 6대손으로 추봉 금오위대장군 '영'의 후손으로 장파인 광순, 광청, 봉, 극인, 수춘, 세화 6 아들이 있고, 그 중 광순의 자인 경태, 엄태 두 아들 중 엄태의 자로 박(磚)과 그 아들인 정고(貞固)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가희 놀라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이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신빙성 있는 자료가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일정시대에 장파인 서승공파의 후손 중 희수(憙洙)공이 영동정공파의 집성촌인 경북 의성군 산원마을을 찾아 서로의 만남을 기뻐하는 문장을 남긴,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서명을 한 문서가 서승공파에 전해져 내려온다.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39명과 많은 명신·학자를 배출했으며, 역사상 대표적 인물로는 현보(賢輔)·종검(宗儉)·보흠(甫欽) 등이 있다.
현보는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 부제학·호조참판·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에 올라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종검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 한림·직제학·대사간을 역임하고 역시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보흠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집현전박사를 지내고 단종손위 후에는 순흥부사(順興府使)로 있으면서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장류(杖流), 순절하였다.
이밖에 응(膺)·순몽(順蒙)·승손(承孫) 등이 유명하다.